[안호기 칼럼] ‘아니면 말고’ 위험한 정치의 계절
세계적 명장 반열에 오른 박찬욱 감독 집안 가훈은 ‘아니면 말고’라고 한다. 딸이 초등학생이었을 때 숙제가 가훈 알아오기였는데, 즉석에서 써준 것으로 알려졌다. 가훈으로 정할 정도라면 ‘일단 해보자’는 도전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오픈 국어사전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고 그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으려고 할 때 쓰는 말’이라고 부정적인 뜻으로 정의한다.
아니면 말고는 언론계에서도 흔히 사용하는 용어다. 오보를 자주 내는 기자를 일컫는다. 사실 확인을 철저히 해야 할 기자에게 아니면 말고 식 취재는 절대 해서는 안 될 무책임한 일이다. 언론사마다 현장 기자가 작성한 기사를 출고 전에 수차례 확인하고 검증하는 ‘게이트 키핑’ 과정을 두는 것은 아니면 말고를 막으려는 조치다.
경기 김포시를 서울에 편입하겠다는 ‘메가시티 서울’은 대표적인 아니면 말고 식 발상이다. 편입을 당론으로 정해 추진키로 했다는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의 발표는 전격적이었다. 김포를 중심으로 서울 편입 얘기가 전부터 나오기는 했지만 논의 과정은 찾아볼 수 없다. 관련 정부 부처들도 여당이 메가시티를 일방적으로 추진 중이라는 사실을 털어놨다. “정부에서 고민하고 진지하게 생각한 적 없다”(추경호 경제부총리), “(서울 편입에 대해 보고를 받거나 협의한) 그런 적이 없다”(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사전 협의는 전혀 없었다”(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메가 서울은 지방 분권과 자치를 강조하는 기존 정책방향에 역행한다. 국토 균형발전 원칙에도 맞지 않는다. 시민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만큼 신중하게 검토하고 합의를 이뤄야 한다. 그러나 여당은 번갯불에 콩 볶듯 추진하고 있다. 1년 전부터 김포시가 요구해왔고, 당내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에서도 두 달 전부터 연구해왔다고 주장한다.
여당의 속내에는 내년 총선 때 표가 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을 것이다. 총선을 5개월여 앞둔 시점에서 설익은 정책을 잇따라 쏟아내는 배경이다. 메가 서울에 이어 ‘한시적 공매도 전면 금지’를 깜짝 발표했고, 일회용품 사용 규제 철회, 가정용·소상공인용 전기요금 동결 등이 뒤를 이었다. 총선 전초전으로 불렸던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참패하자 국면 전환을 위해 표가 되는 일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마구 던지는 듯하다.
정책은 예상되는 부작용과 문제점을 꼼꼼히 살펴 신중하게 추진해야 한다. 방향을 정했다면 이해관계자를 설득하고 숙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일단 던져놓고 보자는, 아니면 말고 식 정책은 위험하다. 원칙과 일관성 없이 급조한 정책은 지속 가능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대증요법에 그쳐 빛 좋은 개살구가 될 우려가 크다. 장기적으로는 국가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되돌리는 과정에서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소요되기도 한다. 찬반이 격화한 상태에서 추진됐던 4대강 사업은 마무리된 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정치권이 무리한 정책을 추진한다면 행정부가 나서서 제동을 거는 게 마땅하다. 입법부와 행정부 사이의 견제가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는 의미다. 관련 부처에 대한 여당의 패싱이 노골화하고 있지만 관료집단은 전혀 저항하지 않는다. ‘우리가 국가를 이끌어간다’고 호언할 만큼 실력과 자부심을 갖췄다는 고위 경제관료들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아무리 공무원집단에 ‘영혼’이 없다지만 보기에 답답할 정도다.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 홍남기 전 경제부총리는 재난지원금 지급 대상과 규모를 늘려야 한다는 여당 의견에 잇따라 반대했다. 재정지출 확대에 대해서도 줄기차게 ‘안 된다’를 외쳤다. 여당 안에서 ‘잘라야 한다’는 주장이 쏟아졌다. 나중에 사적인 자리에서 홍 전 부총리는 “경제관료의 소신이었다. 나를 임명한 대통령을 실패한 대통령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물론 홍 전 부총리의 반대에도 여당 뜻대로 정책이 추진됐다. 관료는 정치권력을 이길 수 없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여당과 정부가 충돌하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 손발이 잘 맞는다기보다는, 눈치보기에 급급해 반대 의견이 있어도 내놓지 못하는 것 같다. 내년 총선까지 여당은 아니면 말고 식 포퓰리즘 정책을 쏟아낼 것이다. 정부의 게이트 키핑 역할은 기대할 수 없으니, 정책 검증은 시민과 일부 언론의 책임이 됐다. 정책뿐 아니라 내년 총선에 출마하는 아니면 말고 식 무책임 정치인을 걸러내는 것 또한 중요하다.
안호기 사회경제연구원장 haho0@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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