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시련 속에 단단해진 오지환 “나락까지 가봐서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김지섭 2023. 11. 14.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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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MVP 오지환 우승 뒷얘기
"MVP 받고 갑자기 기증 생각 들어"
우승 식사 후 선수들 단체로 숙소행
혹시 모를 사고 방지 "여행 때 즐기자"
"선배들 많이 떠올라. 미안함 덜었으면"
LG 오지환이 13일 잠실구장에서 막을 내린 한국시리즈에서 최우수선수(MVP)로 호명되자 기뻐하고 있다. 오지환은 MVP 수상으로 고 구본무 전 LG그룹 회장이 남긴 롤렉스 시계의 주인이 됐지만 많은 팬과 선수들이 다 같이 볼 수 있는 사료실에 기증하기로 했다. 연합뉴스

한때 ‘오지배’라고 불렸던 LG의 캡틴 오지환(33)이 정말 한국시리즈를 지배했다. 과거엔 결정적인 수비 실책으로 경기를 자주 그르친다는 오명이었지만 이번엔 찬사에 가까웠다. 공격과 수비에서 완벽할 정도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해 LG의 29년 우승 한풀이를 이끌어냈다. 아울러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MVP) 영예도 그의 몫이었다.

2009년 LG에 입단한 프랜차이즈 스타 오지환은 시련을 겪으며 단단해졌다. 한국시리즈 우승 여운이 가시지 않은 14일 오지환은 전화 인터뷰에서 “우여곡절이 없었더라면 이 정도 위치에 오지 못했을 것”이라며 “단순히 내가 부족했기 때문에 채우려고 했고 빨리 인정하고 도전적으로 하려고 했다. 계속 잘했더라면 뒤를 돌아볼 시간도 없었을 것이고 선배들, 후배들, 팀에 대한 마음을 몰랐을 텐데 누구보다 잘 알게 됐다. 나락까지 가봐서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고 돌아봤다.

오래 기다린 우승인 만큼 축하 인사가 쏟아져 아직도 답장을 하고 있다는 오지환은 함께 우승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은퇴한 이병규(삼성 수석코치), 박용택(KBSN 해설위원), 이대형, ‘작은’ 이병규 등 선배들을 떠올렸다. 그는 “지금까지 좋은 선배들이 많았는데 ‘왜 성적이 안 났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고 원망하기도 했었다”면서도 “좋은 선배들이 있어 내가 잘 보고 배워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형들이 정말 많이 생각 났다”고 고마워했다.

후배들의 우승 순간을 그라운드 한편에서 지켜본 박용택 위원은 “2018년에는 (아시안게임 대표팀 선발 논란으로 인해) 국민 밉상처럼 욕받이였는데, 지금은 LG 팬들 마음속에 어쩌면 김용수 이병규 박용택도 아닌 오지환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선수일 것”이라며 “어려운 시간을 잘 참아내 대견하다”고 치켜세웠다. 선배의 칭찬에 오지환은 “LG가 빨리 우승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많으셨을 텐데, 이번에 해냈으니까 가슴속에 있었던 미안함을 덜어냈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오지환이 주연을 맡은 올해 한국시리즈는 이야기가 어느 해보다 풍성했다. 1994년 이후 무려 29년을 기다린 우승이 나오고, 동시에 전설로만 전해지던 물건도 세상에 공개됐다. 무엇보다 가장 큰 관심은 명품 시계의 ‘주인 찾기’였다. 고(故) 구본무 전 LG그룹 회장이 1998년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MVP)에게 주겠다면서 해외 출장 당시 구매한 시가 8,000만 원 상당의 롤렉스 시계는 25년간 주인을 찾지 못하다가 이번에 오지환의 품에 안기게 됐다.

그런데 반전은 또 있었다. 시리즈 전 롤렉스 시계에 욕심을 냈던 오지환이 막상 한국시리즈 MVP에 선정된 뒤 반납 의사를 드러낸 것이다. 그룹의 ‘야구 유산’이자, 금전적인 가치도 상당한 명품 시계지만 오지환은 “부담스럽다”며 “구광모 LG그룹 회장님께 돌려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구본무 LG 선대회장이 남긴 롤렉스 시계. 연합뉴스

이런 마음은 이튿 날에도 변함이 없었다. 오지환은 “MVP를 받고 나서 갑자기 든 생각이었다”며 “사실 나한테 상징성과 의미가 너무 크지만 시계는 누구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선대 회장님의 유품이다. 그래서 내가 차고 다니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팬들과 선수들이 볼 수 있는 사료실에 기증하겠다는 얘기를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은 혼자만의 결정”이라고 덧붙였다.

우승 후 식사 자리에서 구광모 회장과 함께했지만 시계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전날 현장 기자회견에서 “요즘 시대에 어울리는 시계를 받고 싶다”고 농담 섞어 말했던 그는 “아직 시계를 받은 것도 아니고, 다른 선물도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단지 “목표했던 우승을 이뤄내 홀가분하고, 이런 감정을 또 느껴보고 싶은 마음뿐”이라며 “지금도 여운이 계속 남아 있다”고 강조했다.

오지환은 3차전 9회 역전 3점포를 인생 최고의 홈런으로 꼽았다. 뉴시스

우승 당일 리더의 본분도 마지막까지 잊지 않았다. 기쁨에 취해 발생할 수 있는 혹시 모를 불미스러운 사고를 방지하고자 선수단 식사 후 다 같이 숙소로 향하자고 한 것이다. 오지환은 “주장이다 보니까 요즘 문제도 많고 아무래도 걱정이 좀 됐다”며 “선수들에게 ‘따로 여행을 가는 게 있으니 그때 즐기고 지금은 호텔로 이동해 편안한 시간을 보내자’고 얘기했다”고 털어놨다.

1년 내내 바쁘게 달려온 오지환은 “가족과 여행을 다니며 쉬고 싶다”며 “야구 인생 최고의 홈런인 3차전 결승 홈런과 한국시리즈 우승 순간이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을 생각을 하니 그게 더 기쁘다”고 흐뭇해했다.

김지섭 기자 oni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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