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상한 단색추상화 너울 벗어나 현실과 부대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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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선생 말을 빌리면 무식한 사람들이 형상작업을 한다고 그랬죠."
1970년대 중반 팔팔한 청년예술가였던 이석주(71) 작가는 당시 그림판 분위기를 그렇게 요약했다.
동양사상 혹은 한국성을 강조하며 백색 혹은 회색빛의 추상화 일색으로 작업하던 선배들의 행태에 식상했던 작가는 정반대로 현실을 사진보다 더 정밀하게 옮기는 하이퍼리얼리즘(극사실주의) 회화를 동료와 함께 막 시작했던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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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선생 말을 빌리면 무식한 사람들이 형상작업을 한다고 그랬죠.”
1970년대 중반 팔팔한 청년예술가였던 이석주(71) 작가는 당시 그림판 분위기를 그렇게 요약했다. 동양사상 혹은 한국성을 강조하며 백색 혹은 회색빛의 추상화 일색으로 작업하던 선배들의 행태에 식상했던 작가는 정반대로 현실을 사진보다 더 정밀하게 옮기는 하이퍼리얼리즘(극사실주의) 회화를 동료와 함께 막 시작했던 터였다. 예상하긴 했지만, 선배 화가들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노자나 장자의 담론 얘기나 자연주의에 바탕한 이우환 선생의 만남의 관계론 같은게 당시 우리의 교과서였어요. 그게 이해는 되는데 가슴으론 안 와요. 왜 미술이 당장 급한 현실을 다루지 못할까요. 버스비가 없어서 쩔쩔 매고 장가도 갈만한 형편도 못되어 막막했던 시절인데. 왜 형식은 거리가 있냐는 고민을 많이 했을 때죠. 가능하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좀 이끌어보자 그런 시도에서 나온 것 같아요.”
경기도 마석 모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석주 작가의 기획 초대전은 그의 회고가 드러내듯이 절실한 사실적 재현으로 시작해 국내 화단에서 최고 수준의 경지를 구축하기까지 40여년간 이어져온 다기한 작품들의 편력을 다룬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단색조 추상회화와 리얼리즘 회화가 서로 대립하고 길항해온 한국 현대미술사의 흐름 속을 작가가 어떻게 헤쳐오면서 재현의 회화 언어를 정련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70년대 중반 화단에 철옹성처럼 군림하던 박서보, 하종현 등 당대 중견작가들의 단색조 벽지풍 그림에 염증을 느껴 사물과 풍경, 인물을 사진처럼 세밀하게 묘사하는 극사실주의 흐름을 일으켰던 1세대 주역이다. 화랑가에는 90년대 이후 말과 시계, 기차 등이 초현실적으로 배치된 대작 그림으로 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번 초대전은 출품작들의 양상이 상당히 다르다. 현실에 직면하고 부대낀다는 청년 작가시절의 문제의식 아래 1977년작 ‘벽’을 필두로, 잘 알려지지 않은 현실 탐색적 얼개의 구작들이 나와 눈길을 끈다.
막 튀어나올 듯한 색감과 구도로 강한 물질성을 발산하는 1970년대말~80년대 초반의 ‘벽’ 연작들부터 1층 도입부에서 예사롭지 않은 울림을 던진다. 전시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고립된 밀폐공간 속에서 각진 창 구멍을 통해 짓눌린듯한 80년대초 한국인들의 뒷모습 군상들을 보여주거나 80년대 중반 이후 소비문화의 시대로 진입하면서 달음박질하듯 터져 나오는 욕망의 감수성들을 신문콜라주 사이로 삐져나온 손짓과 발짓의 격렬한 이미지로 묘사한 ‘일상’ 연작들이 잇따라 등장하는데, 작가의 현실 탐색적 의지가 가장 뚜렷하게 배어든 문제작들로 꼽힌다.
작가의 재현적 작업들은 1990년대 초반 이후 면모를 바꾼다. 말과 시계, 명화와 책의 이미지들이 영화의 페이드 아웃기법처럼 명쾌해졌다 흐릿해지는 화면 속에서 투과되어 흘러간다. 작품들은 90년대식 ‘일상’ 연작과 2010년대 이래의 ‘사유적 공간’ 연작으로 정리되는데, 이런 화면상의 특징들이 2000년대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된다. 현실을 직시했던 작가의 눈길이 90년대 이래 정물과 명화 등에 대한 현상학적 역사적 맥락의 분석을 거쳐 초현실적 이미지를 추구하게 됐으며 최근 근작에선 더 나아가 세부를 아예 흩어놓고 해체하는 방향으로 바뀌어간 경로를 전시에서 파악할 수 있다. 시기가 각각 다른 구작들을 뒤섞는 얼개로 이런 경로의 면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석주 회화세계의 총체적 스타일을 색다르게 읽어낸 기획이라 할 만하다. 26일까지.
마석/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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