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라이프이스트-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천년은 갈 일을 해라
종합기획실 발령을 받고 출근하기 전날 밤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눈치챈 아버지가 어머니를 시켜 아래층으로 호출했다. 그제야 발령받은 걸 말씀드렸다. “걱정도 되겠지”라며 아버지는 술 한 잔을 따라 주며 마시라고 했다. 이어 “걱정은 내가 할 수 없을 때 생긴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여기면 걱정은 사라진다. 할 수 없는 사람을 발령내는 건 인사권자가 걱정할 일이다”며 “해야 할 일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안 하면 된다”고 간단히 정리했다. ‘다만’이라고 허두를 잡은 아버지가 한참 뜸을 들이다 내놓은 말이다. “낯선 곳에 가면 고개를 숙이고 자세를 낮춰라. 그러면 떨어진 휴지나 문방구가 보일 게다. 그걸 줍는 일부터 시작하면 된다. 숙이면 보이고 낮추면 쉽게 주울 수 있다.”
아버지는 “어느 회사든 기획실은 그 조직의 핵심부서다”라고 전제한 뒤 ‘기획’이 뭐냐고 불쑥 물었다. 머뭇거리자 아버지의 설명은 이랬다. 기획(企劃)과 계획(計劃)은 둘 다 일을 이루기 위해 미리 생각하고 세우는 것을 의미하지만, 엄연하게 다르다. 기획은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고, 계획은 세부적인 실행 방안을 수립하는 것이다. 기획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한 목적과 목표를 설정하고, 전략과 방향을 제시한다. 계획은 기획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수립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이어 “기획의 기(企)자는 ‘꾀하다’나 ‘도모하다’, ‘발돋움하다’라는 뜻이다. 파자하면 사람 인(人)자와 발 지(止)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지’는 사람의 발을 그린 것으로 ‘발’이라는 뜻이다. 무엇인가를 시작하기 위해 크게 ‘발돋움한다’라는 뜻을 표현했다. ‘기’는 발돋움해서 멀리 바라본다는 뜻이다”라고 정의했다.
획(劃)자는 ‘긋다’나 ‘계획하다’라는 뜻이다. 그림 화(畵)자와 칼 도(刀)자가 결합했다.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는 모습으로 ‘그림’이라는 말이다. ‘자국을 내다’는 뜻을 나타내는 글자 획(畫)에 칼 도자가 붙어 ‘칼자국을 내서 나누다’의 뜻을 지닌다. 그렇게 설명한 아버지는 “기획은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하니 창의성과 상상력이 중요한 반면 계획은 이미 정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과정이어서 논리성과 합리성이 중요하다”고 했다. “또 기획은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을 고려해야 하므로 유연성이 중요하지만, 계획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수립하는 것이니 확실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라고 구분지었다.
“자세가 정해졌으면 부탁 하나 하겠다”면서 아버지는 “천년은 갈 일을 해라”라고 당부했다. 천년 갈 일을 하는 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첫째, 일 년도 못 갈 일은 하지 마라. 일이 년 갈 일이면 선험자들이 고심해 만든 길을 따라가라. 특히 전임자들이 만들어놓은 고민을 백지화해서는 안 된다. 백지화는 계획이나 정책의 일관성을 잃어 신뢰를 떨어뜨리고, 불확실성을 증가시킨다. 이미 투입된 비용의 낭비도 문제지만 집행하는 이들의 기대감만 갉아먹는다. 다른 계획의 집행력마저 약화할 우려가 있다”며 길게 폐해를 설명해 경고했다.
둘째, 기획자인 네 이름을 반드시 남겨 책임지라고 했다. 아버지는 “서울 성곽은 천년은 커녕 아직 600년도 안 됐는데 상당 부분이 무너졌다. 그러나 그걸 쌓은 이들의 이름이 들어간 축석은 고스란히 남아있다”며 책임성을 강조했다. 셋째는 기획한 일이 집행될 현장에 반드시 가 볼 것을 주문했다. “책상에 앉아서 상상만으로 채울 수 없는 간극은 집행 현장에서만 느끼고 답을 구할 수가 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감당하기 어려우면 언제든 그 자리를 떠나라. 능력이 안 되면서 자리에 앉아 있는 건 너나 조직을 위해서도 불행하다”고 못박았다.
아버지는 야율초재(耶律楚材)를 불러내 “유목국가에 불과한 몽골을 칭기즈칸의 참모가 돼 세계제국으로 발돋움시킨 인물”이라고 칭송했다. 오고타이 칸이 “아버지께서 대제국을 남겨주셨고, 나는 그것을 개혁하려고 한다, 그대는 좋은 방법이 있는가?”란 질문에 야율초재가 답한 말을 새기라고 일러줬다. “한 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한 가지 해로운 일을 제거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새로운 제도로 백성을 번거롭게 하는 것보다는 기존의 불합리한 것을 제거하십시오[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
아버지는 “천 년은 갈 일을 하기는 쉽지 않다”며 큰 그림을 그리고, 기본을 탄탄하게 다지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그게 어렵다면 야율초재처럼 불합리한 것을 없애는 일이라도 매진하라며 내 걱정을 덜어줬다. 천 년 넘은 구조물은 서울엔 없다. 옛 선인들이 개성을 오가던 세검정 옛길만이 천 년을 넘었다. 때때로 그 길을 오르내리며 선조들이 발돋움해 앞을 내다본 창의성을 되뇌어 본다. 손주들에게도 꼭 물려주고 싶은 창의성은 모진 각오와 노력이 없으면 쉽게 얻을 수 없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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