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문제집에 빨간 볼펜으로 매긴 점수…편견 깼던 소년수의 '78점'

홍유진 기자 2023. 11. 14.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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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부교도소 내 만델라 학교…EBS 특강·교재 가지런히
'사상 첫 교도소 수능'…"소년수들 높은 수준·학구열에 놀라"
수능을 앞둔 13일 오후 서울 구로구 남부교도소 내 교육시설 만델라 소년학교에서 소년수들이 수능 공부를 하고 있다. 2023.11.13/뉴스1 ⓒ News1 김민지 기자

(서울=뉴스1) 홍유진 기자 = 78점. 수능 영어 기출 문제집에 빨간 볼펜으로 매긴 한 학생의 점수다. 학원가에서 만난 학생이 아니다. 징역형을 받고 서울 남부교도소에 수용된 소년수의 성적이다. 3등급, 누군가에겐 아쉬운 성적일지라도 이곳 교도소에서는 값진 결과물이다. 이 학생은 남부교도소에 마련된 교육시설 '만델라 소년학교'에서 이틀 뒤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다.

◇모의고사 오답풀이 한창 13일 찾아간 만델라 학교에서는 푸른 수의 차림의 소년 수용수 8명이 모의고사 오답 풀이에 한창이었다. 소년수들은 미리 풀어온 모의고사 문제 중 모르는 수학 문제를 교사에게 질문하고 있었다.

교실 벽쪽에 있는 독서실 책상에는 EBS 수능특강 및 수능완성 교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동그라미 가득한 문학 문제집에는 등장인물마다 표시를 하며 지문을 읽어내려간 흔적이 역력했다. 모든 창문이 창살로 막혀 있다는 점을 빼면 여느 교실과 같은 풍경이었다.

소년수라고 해서 성적이 바닥일 것이란 것은 편견이자 오산이다. 만델라 학교에서 국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연세대 건축공학과 학생 김민선씨(20)는 예상을 뛰어넘는 소년수들의 실력에 놀랐다고 한다. 김씨는 "처음에는 아이들이 거의 초등학생 수준이라고 들었다"며 "숙제 내줘봤자 해 올 능력이 안 되니 기대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막상 첫 수업을 해보니 애들 수준이 정말 높았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문학 작품을 읽고 주제 파악하는 데 굉장히 실력 있는 편"이라고 덧붙였다.

만델라 소년학교 교장을 맡은 김종한 남부교도소 사회복귀과장도 "자기들끼리 방에서 영어 단어 경쟁을 하기도 한다"며 "얼마나 열정을 보이겠나 싶었는데 새벽 1시까지 공부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수능을 앞둔 13일 오후 서울 구로구 남부교도소 내 교육시설 만델라 소년학교에서 소년수들이 수능 공부를 하고 있다. 지난 8월 치른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한 소년수 10명은 오는 16일 사상 처음으로 교도소 안에 마련되는 고사장 안에서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다. 2023.11.13/뉴스1 ⓒ News1 김민지 기자

올해 3월2일 문을 연 만델라 학교는 만 15~17세 소년수들의 학업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된 교정시설이다. 처음에는 검정고시 중심으로 운영할 계획이었지만 소년수들의 학구열로 점차 수능 준비반까지 확대됐다. 지난 8월에는 고졸 검정고시에 28명이 응시해 27명이 합격했다.

이곳에서는 올해 10명의 소년수가 수능을 치른다. 서울교육청의 실사를 거쳐 '서울 구로구 제13지구 제6시험장'으로도 지정됐다. 사상 첫 '교도소 수능'이 열리는 셈이다. 수능 응시 수수료 전액은 서울교육청에서 부담하고, 수능 교재비는 남부교도소 교정협의회에서 지원 받았다.

김 교장은 "수형자가 수능을 보려면 이전에는 수갑을 채우고 묶어서 나가야 했다"며 "교도소 내에 공식적인 수능장이 차려지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고 설명했다.

수능을 앞둔 13일 오후 서울 구로구 남부교도소 내 교육시설 만델라 소년학교에서 소년수들이 수능 공부를 하고 있다. 지난 8월 치른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한 소년수 10명은 오는 16일 사상 처음으로 교도소 안에 마련되는 고사장 안에서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다. 2023.11.13/뉴스1 ⓒ News1 김민지 기자

◇'지능범 되는 것 아니냐' 따가운 시선

죄를 짓고 수감 중인 이들에게 수능 공부를 시켜준다는 것에 대해 따가운 시선도 분명 존재한다. 이들의 형도 최소 2년에서 15년으로 결코 가볍지 않다. 더욱이 15년형의 경우 성인수의 사형에 준하는 형이기도 하다.

소년수들도 이러한 여론을 접했다고 한다. 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임진호 교도는 "댓글 반응들을 (소년수들에게) 직접 전해줬다"며 "처음에는 기분 나빠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이렇게 악을 대변하는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냐'는 질문에 몇몇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 과장은 "반성하고 사과하는 게 가장 우선이지만 이미 형을 받고 들어오면 피해자에게 편지 쓰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며 "사회에 나가서 다시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제2의 피해자를 만들지 않는 게 현재로서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33년 넘게 교도관 생활을 해왔지만 소년범들은 대부분 재범을 저지른다"며 "아직 어리다. 대학갈 방안도 모색해 주면 범죄 말고 다른 살 길을 찾을 수 있지 않겠나"고 반문했다. 수능을 치른 소년수들은 대학 합격 후 휴학계를 내거나, 남은 형 기간에 방송통신대학교가 있는 시설로 이송되는 방안이 검토된다.

cyma@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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