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약 없이 갇혀 숱한 매를 맞고도 보복 않은 홍범도
1910 년 4 월이었다. 홍범도는 러시아 연해주 재피거우 ( 梓皮溝 ) 마을에 머물러 있었다. 이 마을은 중국·러시아 국경에 가깝고 쑤이펀강 상류 산간지대에 있는 까닭에 한국 독립운동과 인연이 깊었다. 뒷날 반일 무장부대 ‘ 13 도의군’ 이 출범했고, 반일단체 혈성단의 근거지가 된 곳이기도 했다. 홍범도와 그를 따르는 비무장 병사 30 명은 재피거우 마을과 인근 한인 농가에 나뉘어 숙박하고 있었다. 국내 진공 작전을 위해 한국으로 곧 떠나려고 대기하던 참이었다.
국경 진출 준비하다 습격 날벼락
홍범도는 민족주의자 박문길의 집에 머물렀다. 집주인은 일본 토벌을 위해 수만원을 모금해 백만 군대를 양성하자고 주장한 <추풍사무통장> (1909 년 ) 의 발기인 25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홍범도 의병의 후원자였다.
의병운동을 하다가 국외로 망명한 지 벌써 1 년 반이나 지난 때였다. 홍범도는 그동안 연추 ( 노보키옙스크 ), 추풍 (쑤이펀 ), 소왕영 ( 우수리스크 ) 등 연해주 한인 밀집 이주지를 기반으로 무장투쟁 모금과 병력 충원을 위해 노력했다.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더는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소규모 병력이나마 국경지대 진출을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작전 예정지로 두만강 건너 무산 군 산악지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일이 터졌다. 수백 명 군중의 습격을 받아서 체포되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홍범도의 육성을 들어보자.
“추풍 사사 원호놈들 추겨가지고 나를 죽이자고 취군하여올 때, 리범윤의 군산적 관리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군대가 척후병이 되어 서고, 다디안재 안준현이고, 육성 최순경이고, 허커우 김가네 다수고, 박가네 다수고, 문창범 도수하여 250 여 명이 취군 작정하여, 재피거우 박문길 집에 달려들어 나를 결박하여가지고 ….”1
‘추풍 4 사( 社)’ 에 거주하는 한인 장정 250 여 명이 대오를 짜서 습격해왔다고 한다. 추풍 4 사란 쑤이펀강 유역의 넓은 평원에 자리잡은 번성한 한인 마을 4곳을 가리킨다. 사( 社 )란 한국 농촌지대 행정구역의 면( 面 ) 에 해당하는 명칭이다. 육성( 푸틸롭카 ), 허커우( 코르사콥카 ), 황거우( 크로우놉카 ), 대전자( 시넬니코보 )를 총칭하는 말이었다.2 이 마을들은 연해주 한인 사회의 양대 중심지 가운데 하나인 소왕영 서쪽 방면에 펴져 있었다. 그 도시로부터 가까운 곳은 25㎞, 먼 곳은 42 ㎞ 지점에 자리했다. 이 지역을 개척한 한인들은 농작물 재배에 열성을 기울였고, 그 덕분에 남부 우수리 지방의 곡창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홍범도는 자신을 습격한 군중을 가리켜 ‘추풍 4 사 원호놈들’ 이라고 지목했다. 원호( 原戶 )란 30~40 년 전에 일찌감치 연해주로 건너온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들은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고, 러시아 정부로부터 농지를 무상으로 분여받은 부유한 농민층이거나 지주였다. 러시아말을 구사할 줄 알았고, 러시아 정교를 수용해 교회 출입도 자연스럽게 했으며, 자제들에게는 러시아식 초·중등 교육을 받게 했다.
범인은 러시아 국적 한인들
이들은 러시아 국적이 없는 신출 이주민에게 소작을 주어 농업을 경영하곤 했다. 소작농은 여호(餘戶)라고 불렸다. 둘은 같은 한국 사람이지만 사이가 꼭 좋지만은 않았다. 원호들은 여호를 ‘레베지’(백조)란 별명으로 부르며 얕잡아 봤다. 흰옷을 입고 밭두렁에 줄지어 가는 모습이 마치 백조와 같다는 뜻이었다. 여호들도 원호를 ‘얼마우재’라고 멸시했다. ‘얼’ 은 중국어로 숫자 2 를 가리키고, ‘마우재’란 털 많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러시아인을 낮춰 부르던 함경도 방언이었다. 얼마우재란 서양 사람을 흉내 내는 2 류 러시아인이라는 멸칭이었다.
홍범도는 추풍 군중을 부추긴 인물들을 거명했다. 딱 꼬 집었다. 대전자 마을의 안준현, 육성 마을의 최순경, 허커우 마을의 김씨네와 박씨네를 가리켰고, 문창범이 그들을 지휘했다고 한다. 누구나 다 원호층의 유력자였다. 안준현은 대전자 마을의 자치 책임자 ‘노야’ 직에 다년간 재임했고, 채소와 수박 등 상업적 작물과 잠업 및 마소 목축업을 크게 일으키는 등 영향력 있는 현지 유지였다.3 최순경이란 아마도 ‘최숭권’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도 안준현과 나란히 거론되는 유력자로서, 러시아 지방관청과 밀접히 유착해 있었다.4 문창범은 추풍 원호 세력 가운데 가장 저명한 이였다. 그는 추풍 일대의 풍속 개량 운동과 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아편 흡연 중단이나 금주 캠페인을 벌였고, 한인 마을에 사립 초등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기부금 모금 운동에 열성을 보였다. 러시아군에 쇠고기를 납품하는 일로 큰 재산을 모은 부자이기도 했다. 뒷날 전로한족중앙총회 회장, 대한국민의회 의장에 선임됐다. 1919년 10월 임시정부 통합운동 때는 재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총장 직에 오르기도 했다. 비록 취임을 거절하기는 했지만.
이범윤의 관리병 군대가 척후병으로서 맨 앞장을 섰다는 언급에 눈길이 간다. 이범윤의 관리병 군대란, 1903년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북간도관리사 (종 3 품직)에 임명된 이범윤이 북간도에서 양성한 무장부대를 가리킨다. ‘충의대’ 또는 ‘관리대’ 라고 불린 이 군대는 500~700 명 규모였으며, 1904~1905 년 러일전쟁 때는 러시아군과 연합해 반일 무장투쟁에 나섰다. 러일전쟁 종전 뒤 휘하 군대를 이끌고 연해주 연추로 망명한 이범윤은 그곳에 창의소를 설립해 의병투쟁을 계속했다. 이범윤이 지휘하는 이 무장부대는 여전히 ‘ 관리대 ’로 호명되고 있었다.
관리병 군대가 홍범도를 체포하는 작전에 참여했다고 한다. 추풍 원호 세력과 이범윤 의병부대가 공동행동에 나섰고, 둘 다 홍범도 의병부대에 배타적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적대적 입장에 섰음을 알 수 있다. 동포들에게 결박된 홍범도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이번에도 그의 진술에 귀 기울여보자.
“왕거우 유새장 집에다 가두고, 무수한 매를 치면서, 리범윤에게다 보고를 써서 해삼으로 보내되, 「 이 홍범도를 죽이는 데 관리사의 명령이 있고서야 죽이겠습니다 」 써 보내니 , 그 보고를 깔고 회답도 하지 아니한 고로, 14 일을 죽지 않으리만큼 숱한 매를 맞고 ….”5
‘왕거우 유새장’ 집에 갇혔다고 한다. 추풍 4 사 가운데 하나인 황거우 ( 크로우놉카 ) 의 유씨 성을 가진 ‘사장’ ( 社長 ) 의 집인 것 같다. 사장이란 한국 농촌의 면장과 비슷한 직책에 해당한다. 홍범도는 그곳에 기약 없이 구속됐다. 얌전히 갇혀 있었던 것이 아니다. ‘ 무수한 매’ ‘ 숱한 매’ 를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고 술회했다. 언제까지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짐작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견뎌내야만 했다 .
러시아군 치안 활동으로 구사일생
원호 유력자들은 홍범도를 살해할 의도가 있었다. 하지만 책임지고 싶지는 않았다. 러시아 형법의 형사상 책임과 한국 독립운동에 미치는 정치적 책임을 피하려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옛 북간도관리사 이범윤의 명령서였다. 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무는 이범윤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그 문서 안에는 홍범도 처단을 지시해달라는 요청도 포함됐다. 군사지휘권이 있는 대한제국 고위 관료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명분과 근거를 갖고 싶었던 것이다.
이범윤은 원호 유력자들의 생각과 달랐던 것 같다. 그들의 의도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가타부타 의견을 세우지 않은 채 관망하는 길을 택했다. 회신을 기다리는 추풍 원호 유력자들의 기대는 충족되지 않은 채 시일이 흘러갔다. 그러기를 14 일째 계속됐다.
홍범도가 사지에서 벗어난 것은 소왕영에 주둔하던 러시아군 사령관 덕분이었다. 상관의 명령을 받은 카자크 출신 러시아 병사들이 현장에 파견됐다. 완전무장한 그들은 황거우 마을 입구에서부터 실탄 사격을 하며 위협을 가했다. 그들은 갇힌 홍범도와 동료들을 석방하고, 그 대신 추풍 원호 쪽 장정을 30 여 명이나 체포했다.
체포된 자들은 소왕영으로 연행됐다. 러시아 정규군이 어떤 경위로 이 사안에 개입했는지는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 역내 치안을 확보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러시아 사법기관을 경유하지 않은 채 한인 이주민이 사적으로 타인의 신체를 제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 덕분에 홍범도와 동료들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홍범도 일행이 연해주 추풍 지역의 동포 사회에서 핍박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군자금 모금과 용처를 둘러싼 갈등이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홍범도 일행과 추풍 원호층은 군자금 모금을 위해 협력했다. 자금 모집과 무기 구매 실무를 자담하고 나선 이들은 박기만을 비롯한 추풍의 원호층이었다. ‘창의대장’ 홍범도와 ‘도총무’ 박기만이 연명으로 군자금 모금원에게 발급한 임명장이 남아 있다. 1909년 12월에 발급한 서류다. 양자의 협력관계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듬해 3월 재피거우에서 열린 군자금 결산 모임에서 양자 관계는 파탄 나고 말았다. 총액 4980 원 가운데 실제 무기 구매에 쓰인 것은 소액이었다. 구매한 소총은 30 자루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부적절하게 사용됐거나 사적인 고리대금으로 운용됐음이 밝혀졌다. 분노가 터졌고, 충돌이 일어났다. 급기야 도총무 박기만은 아수라장 속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이로 인해 이번에는 추풍 원호촌 주민들이 들고일어났다. 문창범과 안준현 등이 추풍 4사의 원호 장정 250 명을 이끌고 재피거우를 습격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연해주 한인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뒷날 연해주 한인 혁명운동사를 연구한 이인섭은 이 사건의 성격을 계급투쟁의 발현이라고 해석했다. 민족해방운동 내에서 무산계급 흐름에 속하는 홍범도에 반대해, 유산계급 지향의 양대 세력이 협력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문창범으로 대표되는 지주·부농층과 대한제국 고위 관료 출신의 이범윤 세력이 민중 지향의 평민 의병장 홍범도를 억압했다고 봤다.
죽도록 매 맞고도 화살 돌리지 않아
풀려난 홍범도는 무엇을 했는가. 여느 사람이라면 분노를 누르기 힘들었을 것이다. 2주에 걸쳐 줄곧 학대를 받은데다 생명의 위기마저 겪지 않았던가. 반격하거나 보복 행동에 나서기 십상이었다. 홍범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죽도록 매 맞은, 휘하 군사 30 여 명에게 총기를 지급했다. 비록 소부대이고 무장이 충분하지 않지만, 대오를 갖춰 한-중 국경지대로 나아가는 길을 택했다. 그는 혁명대오 내부의 알력에 대응하기보다는 적에 대한 투쟁에 전념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참고 문헌
1. 이함덕 필사본, ‘홍범도의 일지’, 카자흐스탄 우쉬토베 , 1958년 4월16일 9 쪽 뒷면,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https://search.i815.or.kr
2. 반병률, ‘주해 홍범도 일지’, <홍범도 장군>, 한울, 78 쪽, 2014년
3. ‘안준현씨의 선량한 사업’ , <권업신문> 1912년 11월17일 3 면
4. <대동공보> 1909년 6월3일
5. 이함덕 필사본, 앞의 글, 9 쪽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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