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cm커진 함지훈요? NBA진출하겠죠”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혼혈 농구 선수하면 전태풍과 더불어 이승준(45‧205cm)을 빼놓을 수 없다. 주한미군 출신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미국에서 자랐다. 미국 이름은 에릭 산드린으로 동생은 이동준(미국명 다니엘 산드린‧43‧200cm)이다. 둘 다 KBL에서 활약한바 있으며 이동준은 정규 드래프트, 이승준은 혼혈 드래프트를 통해 국내 무대를 밟았다.
이승준의 플레이 스타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압도적인 운동능력이다. 전태풍이 현란한 드리블, 문태종이 빼어난 슈팅 능력으로 주목받았다면 이승준은 토종 선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듯한 엄청난 탄력을 자랑하며 아메리칸 스타일임을 입증(?)했다. 백인 혼혈이었지만 어지간한 흑인보다 훨씬 다이나믹하고 화려한 플레이를 보여줬다.
이승준은 KBL 역대 최고의 덩커로 불린다. 다양한 묘기성 덩크슛을 경기중에 자유롭게 구사하던 것을 비롯 틈만 나면 인유어 페이스를 시도했다. 올스타전 슬램덩크 컨테스트에서도 단골 우승자였다. 크고 단단하면서도 탄력까지 대단했던지라 조금의 틈만 있으면 위치에 관계없이 강력한 덩크슛을 림 안에 꽂아 넣었다.
이승준의 스타일을 잘 모르던 시절에는 그가 달려와 덩크슛을 시도하면 끝까지 막아내려 애쓰는 선수도 많았다. 하지만 이후 쉴새없는 덩크쇼가 이어지자 나중에는 늦었다 싶으면 슬쩍 피해버리기 일쑤였다. 어차피 한골 줄 것 바스켓 카운터를 헌납하거나 인유어 페이스의 희생양이 되기 싫었기 때문이다.
이승준은 덩크슛만큼은 NBA급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무수한 덩크 하이라이트 필름은 비단 국내에서만 기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CBA를 비롯, 브라질, 카타르, 폴란드 리그 등에서 뛸 당시에도 모두가 인정하는 덩크 머신이었으며 심지어 묘기농구단인 ’할렘 글로브트로터스(Harlem Globetrotters)‘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2006~07 시즌에는 포르투갈 리그에서 뛰며 올스타전 덩크 콘테스트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승준은 비록 미국에서 자라기는 했지만 진작부터 어머니의 나라 한국에 관심이 많았다. 사랑하는 어머니로부터 한국인의 피를 물려받은 것도 있지만 여기에 더해 동생 이동준과 함께 외갓집인 전라북도 정읍을 종종 방문했던지라 낯설지가 않았던 이유도 크다.
그런만큼 KBL에서 뛰기 위해 꾸준히 문을 노크했지만 잘 풀리지 않았다. 현대모비스에서 대체 외국인선수로 뛰기는 했으나 윈윈 결과를 내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2009년 귀화혼혈 드래프트가 실시됐고 전체 2순위로 서울 삼성에 지명받으면서 국내 무대 연착륙에 성공한다. 귀화시험에 합격하면서 '이승준'이라는 한국 이름까지 얻는다.
KBL에서의 이승준은 당초 기대치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운동능력은 쟁쟁한 외국인선수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지만 팀플레이 등에서 아쉬움을 남기며 '양날의 검'으로 불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농구 팬은 이승준을 좋은 이미지로 기억한다. 국내리그에서의 활약상이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으나 국가대표로서는 정말 잘했다.
'같은 선수가 맞냐?'는 우스갯소리까지 심심찮게 나왔을 정도다. 프로농구 창설 이후 역대 국가대표 골밑지킴이 계보는 서장훈, 김주성, 오세근, 김종규 등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에 이승준의 이름이 들어가도 이상할 것이 없다. 뛴 기간은 해당 선수들에 미치지 못하겠지만 몸을 사리지 않고 열정적으로 코트를 뛰어다니며 대표팀의 골밑을 지켰다.
이전 선수같은 경우 국제대회에서 이름값 높은 선수나 팀을 만나면 기가 죽어서 가지고 있는 실력도 다 펼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승준은 달랐다. 오히려 승부욕이 불타오르며 더더욱 펄펄 날았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남자 농구 최종예선 C조 도미니카공화국과의 2차전에서 NBA서 뛰던 알 호포드를 상대로 쇼다운을 벌이며 21득점, 6리바운드의 활약을 펼쳤던 것이 대표적이다.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국가대표로 나서면 눈빛부터 달라지는 남자였다. KBL 은퇴 뒤에도 농구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고 40대 중반의 나이인 현재까지 3x3 농구선수로 뛰고 있다. 국가대표로 경기를 뛰기도 했다. 농구와 한국에 대한 애정만큼은 누구보다도 뜨거운 남자임을 알 수 있다.
◆ 이승준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278경기 출전 평균 13.7득점, 7.2리바운드, 2어시스트, 0.6스틸, 0.9블록슛
⁕ 정규리그 한경기 최다기록: 득점 ☞ 2011년 10월 27일 원주 동부전 = 33득점 / 3점슛 성공 ☞ 2011년 2월 26일 전주 KCC전 = 8개 / 어시스트 ☞ 2012년 12월 14일 안양 KGC전 = 8개/ 리바운드 ☞ 2011년 12월 17일 서울 SK전 = 29개 / 스틸 ☞ 2013년 3월 9일 울산 모비스전 = 4개 / 블록슛 ☞ 2013년 2월 11일 고양 오리온스전 = 5개
“농구를 하는 아이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시켜주고 싶어요”
Q.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저야, 뭐 잘 살고 있죠. 하하핫…, 한솔레미콘 소속으로 3x3 농구하고, 코칭하고, 스킬트레이닝하고 와이프는 농구 선수하고 있고, 그렇습니다.
Q.나이가 적지않으실텐데 계속 코트에서 뛰고있네요. 힘들지않으세요?
하핫, 뭐…, 한국 나이로 46살인지라 힘들기는 하죠. 옛날 같지는 않아요. 숨도 많이 차고 회복력도 많이 떨어졌고…, 하지만 재밌어요. 농구 계속했으니까. 그냥 일상 같아요. 뛸 수 있으면 뛰어야죠. 어릴 때나 지금이나 농구에 묻혀 살고 있습니다. 아이는 아직 없어요. 친동생 동준이는 아들 딸 다 있는데 우리는 와이프가 현역 선수라 조금 더 기다려야 해요.
Q.저도 현재 육아를 하는 입장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이 아이를 늦게 낳은 것이에요. 체력적으로 힘들더라고요.
아직 아이는 낳지않았지만 알 것 같아요. 운동 체력하고 육아 체력은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이)동준이보면 알 수 있어요. 동준이가 40살 넘어서 첫째를 낳았는데 옆에서 봐도 엄청 힘들어 보였어요. 그래서인지 저한테도 ’형, 빨리 낳아야 되요‘그렇게 말하더라고요. 기자님 말씀 바로 이해가 되요. 새벽에 일어나야 하고, 잠도 끊어 잘 수밖에 없고, 저도 당시에 가서 조금씩 도와줬는데 매일매일 보통일 아니었어요. 우리 부모님은 현재 미국 시애틀에 계시고요. 동생도 영주권 나와서 고향으로 돌아간 상태에요. 현재는 저희 가족만 여기에 있어요. 동생 없을 때 제가 이곳 지켜야죠. 하하핫…,
Q.어서 아이를 낳기를 바라는 팬들도 적지않아요.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2세가 기대되거든요.
안그래도 주변에서 그런 얘기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동생 같은 경우 첫째 아들은 흙, 돌, 나무 이런 것 좋아하는 아기자기한 성격이에요. 둘째 딸은 공 좋아하더라고요. 농구공도 만지면서 잘 놀아요. 둘 다 키는 커요. 첫째도 아빠와 큰아빠, 큰엄마가 농구선수였으니까 시간 지나면 농구에 흥미보일 것 같아요. 환경이 온통 농구에 관련된 것 들이라 관심 안 가지기가 더 어렵지 않나 싶어요. 더불어 아직 낳지는 않았지만 저와 와이프 사이에서 나올 아이도 기대는 됩니다.(웃음)
Q.농구교실은 따로 운영하는 것인가요?
아뇨. 그냥 자유롭게 움직이고있어요. 스킬트레이닝 센터랑 조선대 등에서 연락을 줘서 왔다 갔다 하면서 주기적으로 코칭을 하는 정도에요. 서울쪽 국제학교도 오가면서 방과 후 수업도 하고 있고요. 아무래도 체육관이 있으면 활동에 제약이 생겨요. 거기에 묶일 수밖에 없죠. (전)태풍이보면 알 수 있어요. 엄청 크게 잘해놓았더라고요. 마침 저희집 근처이기도 해요.(웃음) 하지만 그렇게 되면 모든 스케줄이 체육관 위주로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어쩔 수 없는거죠. 나쁘다는게 아니에요. 저같은 경우 아직은 그럴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요. 여기저기서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바로 가고싶어요. 체육관 있으면 그렇게 안되요. 예를 들어 지금은 전주에서 누가 저를 찾으면 제가 갈 수도 있지만 체육관 있으면 이곳으로 와주세요 할 일이 더 많겠죠. 당분간은 지금처럼 지방은 물론 다른 나라까지 편하게 왔다갔다 하면서 스케줄을 관리하고 프로그램 짜고 싶어요.
Q.전태풍, 이승준님같은 분들이 미국에서 농구를 해온 노하우를 국내 유소년들에게 많이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팬들이 많아요.
저도 좋아요. 그러려고 태풍이나 저나 농구 가르치는 일 하고 있는거에요. 한국은 한국대로, 미국은 미국대로, 각자의 농구에 서로의 장점이 있어요. 둘 다 경험해본 입장에서 잘 조율해서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어요. 무엇보다 재미있는 농구, 그게 기본 모토에요. 저나 태풍이나. 얼마 전에 NBA트레이너들이 한국에 와서 전국 캠프를 돌며 몸 관리라든지 여러 가지를 많이 가르쳐 주고 갔어요. 아이들을 위해서 초대했는데 반응이 좋더라고요. 저같은 사람도 좋지만, NBA와 관련된 인물들이 와서 얘기를 하면 아무래도 임팩트가 달라요. 농구 좋아하는 아이들에게는 그들과의 만남이 동기부여가 될 수도 있어요. 어린 친구들에게는 당장 무슨 스킬이나 정보를 알려주는 것보다 농구에 대한 재미, 꿈 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그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앞으로도 그런 기회가 아이들에게 많았으면 좋겠어요.
당연하죠. 앞으로도 적극적으로 선수, 지도자 등 다양한 인물들을 초대해 그럴 기회를 많이 만들 생각이에요. 아무래도 우리가 미국에서 살다보니 그곳에 다양한 인맥들이 많아요. 한국 유소년들과의 만남에 최대한 써먹을거에요. 미국에서 농구한 이들이 더 낫고 우월하다는 소리는 아니에요. 행여나 오해는 하지마세요. 미국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제가 성장했으면 그나라 인맥을 동원했을거에요. 아무래도 나라마다 특유의 문화나 고정화된 틀이 있어요. 한국도 마찬가지죠. 어릴 때부터 성장기까지 비슷한 얘기를 듣고 비슷한 노하우를 배워요. 그런 과정에서 다른 얘기나 스타일을 듣고 접해보는 것 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어요. 미국이나 NBA의 장점 중 하나는 전 세계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다는 점이에요. 본래 미국 스타일도 있지만 유럽 등 다른 유형까지 섞이고 경쟁하며 더 나은 쪽으로 발전해가요. 이른바 정체되지 않는다는 점이 최고의 경쟁력이 아닐까 싶어요. 비전이나 환경은 주변에서 제공하고 각 개인은 본인의 특성에 맞게 스스로 잘 녹여내야겠죠. 저는 한국을 많이 사랑하니까 미국 등에서 좋은 아이디어를 많이 가져오고 싶어요.(웃음) 그런 과정에서 저도 더 배우는 겁니다.
Q.혹시 대학이나 프로팀 등에서 지도자 제의가 들어오면 할 생각은 있나요?
음…, 저에게 누가 그런 기회를 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특별한 일 없으면 하고 싶습니다. 유소년을 가르치고 꿈을 꾸게 해주는 것이 뿌리를 튼튼하게 하는 과정이라면 그런 곳에서 지도자를 하는 것은 특히 프로 무대는 열매를 확인하는 거잖아요. 선수 못지않게 지도자로서도 승부욕이 많이 발동할 것 같고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미국과 한국 그리고 브라질, 카타르, 폴란드, 포르투갈 등에서 농구를 해온 다양한 노하우를 녹여낼 생각입니다. 제가 현역 시절에는 덩크슛도 많이 하고 운동능력 위주로 플레이를 했지만 그렇다고 아이들이나 선수들에게 ’나처럼 해라‘는 식으로 강요할 일은 없을 거에요. 선수마다 신체적, 스타일적 특징이 다 따로 있어요. 거기에 맞춰서 발전 가능성이 더 높은 쪽으로 이끌어 주고 싶어요.
“국가대표로 뛸 때 더 경기력이 좋았던 이유요?”
Q.농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그 이야기를 하려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떻게 만나게 됐나부터 얘기 해야 될 것 같아요. 저희 어머니는 미국에서 살던 분이 아니었으니까요. 아버지같은 경우 대학교 1학년 때까지 농구를 했어요. 키가 2m정도 됐으니까 골밑에서 플레이하는 스타일이었죠. 그러다가 베트남 전쟁이 터졌고 미국에 있는 많은 대학생들도 군대를 가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어요. 당시 정부에서는 드래프트 번호를 나눠줬어요. 군대를 갈 순서를 정하는 거죠. 아버지같은 경우 너무 순번이 낮았어요. 낮을수록 늦게 가거든요. 아버지는 판단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늦은 나이에 군대를 가느니 일찍 갔다오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죠. 그리고 지원을 했는데 운이 좋았던지 한국으로 가게 됐어요. 당시 모두가 베트남으로만 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저기 다른 나라로 흩어졌는데 아버지는 전장이 아닌 한국으로 가게된거죠. 그리고 운명적으로 그곳에서 어머니를 만나게 됐고 저와 동준이가 태어났습니다. 하하핫…,
Q.운명같네요. 어쩔 수 없이 지원한 군입대를 통해 한 가정이 이뤄진거네요.
하하핫…. 그렇죠. 그런데 이건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결혼하게 된 스토리를 보면 다들 다양하더라고요. 저 또한 그렇고요. 어쨌거나 아버지는 농구를 정말 좋아하셨어요. 군대에서도 계속해서 농구를 했고 저와 동준이는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농구에 흥미를 가지게 됐죠. 사실 농구를 정말 좋아한 것은 동준이에요. 저는 축구를 더 좋아했어요. 헤헤, 축구 쪽으로 계속 갔으면 어땠을까도 싶지만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농구공을 더 많이 잡고있더라고요.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같아요.
Q.키가 커서 빅맨을 많이 봤을까요?
아무래도 어릴 때는 그랬겠죠. 그러다가 대학교에 가면서 2~3번을 많이 봤어요. 4번도 가끔 맡았고요. NBA 서머리그에서도 그랬어요. 미국같은 경우 장신자들이 많아요. 찰스 바클리나 알론조 모닝처럼 엄청난 파워를 타고나지 않는한 제키로 빅맨 보기에는 쉽지않아요. 딱 스윙맨 스타일이 저한테 맞는 옷이었어요. 내외곽을 오가며 림어택을 하고 슛찬스가 나면 슛을 던지고요. 저도 그게 좋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한국에 와서 빅맨을 보려고 하니 쉽지 않았어요. 지금이야 송교창, 최준용 그리고 해외에서 뛰는 이현중, 여준석 등 2m가 넘는 신장으로 스윙맨으로 뛰고 있는 선수들도 있지만 당시에는 달랐어요. 그 정도 키면 선택권이 없었어요. 더욱이 저는 미국에서 농구를 하다온 혼혈선수니까 기대치의 대부분이 골밑에서 힘을 발휘해주었으면 하는 것이었죠. 개인적으로는 제 주 포지션에서 마음껏 활개를 치지 못한 것이 아쉬워요. 그래서 요즘 젊은 선수들이 키하고 상관없이 잘맞는 포지션을 찾아가는 모습이 보기좋아요.
Q.늦은 나이에 와서 그런지 국내 무대에서는 기대만큼 잘하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국가대표로서는 달랐어요. 부진하다가도 국가대표 경기에서는 대부분 펄펄 날더라고요.
먼저 국내 무대에서 설렁설렁 뛴 것은 아니었다는 것부터 말씀드릴께요. 리그 경기와 국제 경기에서의 경기력 편차가 좀 심했으니까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저도 사실 왜 그렇게 차이가 났나 모르겠어요. 다만 국가대표 경기에서는 저도 모르게 집중력이 더 올라갔던 것은 사실이에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그냥 국가대표잖아요. 저는 어릴 때부터 국가대표가 되는게 꿈이었어요. 하지만 미국에서는 꿈을 이루는게 어려웠죠. 르브론 제임스나 고 코비 브라이언트같은 선수가 들어가는 자리가 국가대표잖아요. 현실을 알고부터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그러다가 한국에 간 동준이가 저를 부르더라고요. 이곳에서 국가대표를 해보라고.
Q.그렇죠. 아버지의 나라도 있지만 어머니의 나라도 있으니까요.
맞아요. 제 몸에 흐르는 피의 절반은 한국인의 피에요. 미국에서는 국가대표로 뛰지 못했지만 한국에서는 열심히 하면 가능성이 있겠더라고요. 더불어 명분이나 의미가 확실하잖아요. 미국에서 국가대표로 뛸 수 없으니까 가능한 나라를 찾아다니는게 아닌거죠. 저 역시 반절은 한국인이니까요. 만약 부모님이 그래도 한국에 정착하셨더라면 한국이 더 익숙한 사람이 되어있었을 수도 있고요. 사랑하는 어머니가 태어나고 자란 한국에서의 국가대표도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그 전부터도 외국인선수드래프트를 통해 한국에서 뛰고 싶었어요. 결과적으로 잘 안됐지만요. 리그에서라도 뛰고 싶었는데 하물며 국가대표라니…, 완전 느낌이 달랐어요. 한 국가를 위해 대표로 뛰는 것은 운동선수로서 최고의 자부심이고 긍지라고 생각합니다. 저 뿐 아니라 모든 선수들이 다 그런 마음이지 않을까 싶어요. 때문에 태극 마크를 가슴에 달았다는 자체로 너무너무 감사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저에게 최고로 영광스러운 순간 중의 하나로 남아있고요.
“김주성과 함지훈은 정말 최고의 빅맨들입니다”
Q.국가대표로 뛸 때 김주성 현 원주 DB 감독과 호흡이 참 잘맞았던 기억이 나요.
맞아요. 당시 (김)주성과 손발이 잘 맞았어요. 최고의 콤비네이션 파트너라고 생각합니다. 같이 있을 때 정말 편했어요. 솔직히 제가 국가대표로 좋은 모습을 보인 데에는 주성이 지분이 큽니다. 주성이는 정말 최고에요. 빅맨으로서의 포스트 지배력은 물론 BQ가 너무 좋아서 모두를 편하게 해줬죠. 포지션만 4~5번이지 머리나 센스는 거의 포인트가드라고 봐도 무방할 듯 싶어요. 지금 시대에서 뛰어도 정말 잘할 선수에요. 어떤 시스템, 어떤 멤버 구성에서도 제 몫이상을 해낼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농구는 정말 머리 좋아해야 되요. 특히 한국같은 경우 수비시스템도 많고 복잡해요. 다 외우고 응용할 수 있어야 하죠. 현 NBA 최고의 선수도 니콜라 요키치잖아요. 운동능력은 평균 이상에도 못 미치지만 머리, 센스 이런 것으로 잡아먹잖아요. 물론 덩치와 힘은 좋지만 머리가 좋지 않았다면 그런 장점조차 써먹지 못했을 것이라고 봐요. 미국은 운동신경 좋은 선수들 정말 많아요. 고등학교만 가도 슈퍼맨처럼 붕붕 날아다니는 선수들이 가득해요. 그러한 선수들끼리 레벨을 가르는 것은 머리에요. 시간이 지날수록 똑똑한 선수가 더 높은 기술을 구사하고 코트에서도 잘 써먹죠. 그런점에서 주성이는 정말 부럽고 멋진 선수였습니다. 혼자만 잘하는 것이 아닌 동료들 수비 위치도 지정해주고 밀린다싶으면 기가막힌 타이밍에서 도움 수비도 들어가고…, 와우! 진짜 최고였어요. 같이 뛰면 정말 편해요.
Q.함지훈도 머리좋은 빅맨으로 유명하잖아요.
어휴…, 지훈이는 말할 것도 없죠. 흔히 지훈이에게 운동신경이 없다고 하는데 제 생각은 달라요. 잘 달리고 높이 뛰는 것만이 운동신경은 아니거든요. 힘이나 순발력도 운동신경의 범위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봐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지훈이는 운동신경이 괜찮은 선수에요. 기동력, 점프력 등 일반적인 부분에서 눈에 띄지 않을 뿐 디테일한 부분이 잘 발달되어 있어요. 다이나믹해요. 공격시에는 순간 움직임이 엄청 좋아요. 느릿느릿 오는 것 같지만 직접 부딪혀본 선수들은 느낌이 달라요. 원체 힘이 좋은지라 부담스러울 정도로 묵직한 것은 기본이고 갑자기 움직이는 속도가 정말 빨라요. 순간적으로 스피드가 확 바뀌어버리니까 막기가 더 힘들어요. 거기에 잔스텝이나 방향전환이 좋아서 막을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놓쳐버리기 일쑤죠. 거기에 수비시에는 상대 동선을 잘 파악해요. 미리 가서 버티고 있는지라 상당히 까다롭습니다. 많은 선수들이 빨리 뛰려고만 해요. 지훈이는 달라요. 속도 조절의 달인이에요. 언제 스피드를 써야 할지 알아요. 다른 선수들이 7~10으로 꾸준히 움직인다면 지훈이는 3~4로 움직이다가 필요할 때 확 9~10으로 가속 패달을 밟아요. 그것도 아주 짧게. 독특해요. 많은 빅맨들이 지훈이를 부담스러워하는 데는 이유가 있어요. 사이즈가 조금 아쉬울 뿐이죠.
Q.함지훈이 10cm만 컸더라면 장난 아니였겠네요.
10cm요? 그렇다면 지훈이는 NBA갔을지도 몰라요. 어차피 어중간하게 운동신경만 좋은 선수보다는 지훈이처럼 확실한 강점이 있으면 거기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성이도 그렇지만 지훈이도 정말정말 영리한 선수에요.
Q.미국에서 농구한 선수들의 공통된 꿈중 하나가 NBA잖아요. 드래프트는 참가했었나요?
아니요. 제가 다녔던 대학교가 그렇게 유명하지도 않았고 NBA 드래프트에 출전할 만큼 제가 성적을 쌓아 올리고 이름값이 높지도 못했어요. 다만 이후 해외리그를 다녀와서 서머리그, 프리시즌 경기 등을 뛰면서 다소 늦은 나이에 도전을 했었죠.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주목을 받은 시기도 있었으나 역시나 나이가 30살 가까이 되었던지라 힘들더라고요. 구단에서도 정말 아주 특별하게 눈에 띄지 않는 이상 경력도 없는 노장을 1군 무대로 끌어올릴 이유가 없죠. 저 역시 나이가 젊었더라면 몇 년 더 버티어봤겠지만 이내 현실을 인정하고 다시 해외리그로 떠났던 기억이 나요. 잘하려면 아주 잘하던가 나이 대비 재능이 넘치던가 해야지 어설프게 잘하면 NBA도전은 쉽지 않아요.
Q.어설프게 잘해도 끈기있게 버티면 길이 있지않을까요?
맞습니다. 있겠죠. 실제로 그런 사례들도 종종 있고요. 처음에는 어설프게 잘해도 NBA 도전을 꿈꾸는 이들과 함께 훈련하고 시합하다 보면 기량도 늘어갈테고 자신만의 주무기도 생길 수 있으니까요. 문제는 그 몇 년을 버티기가 쉽지 않아요. NBA리거가 아닌 이상 미국 내에서 농구선수로서 돈 벌기는 쉽지 않아요. 주기는 하는데 정말 소액이에요. 한국 어지간한 직장인들보다도 적어요. 아르바이트 비용 정도 생각하면 될거에요. 농구하는 친구 중에 부자 많이 없어요. 먹고 살기 위해, 농구로 큰돈을 벌고 싶어서 시작한 케이스가 상당수에요. 시간을 두고 도전하고 싶어도 당장 생활부터 힘들어지니까요. 최소한의 생활비만 해결되어도 장기전으로 준비하는 친구들도 많을거에요. 하지만 현실은 다르잖아요. 억지로 버티고 버티었다 해도 NBA에 올라간다는 보장도 없고요. 그렇게 시간만 흘러버리면 나중에는 이도저도 안되는 거죠. 불확실한 미래에 배팅을 하기가 어려운지라 아니다 싶으면 바로 해외리그로 가는거죠. 일부는 해외리그에서 돈 벌어서 다시 도전하기도 하고요.
Q.마지막으로 농구인 이승준에게 농구란 무엇일까요?
음…, 항상 저에게 길을 제시해주는 친구? 농구를 했었기에 미국에서도 즐겁게 꿈을 찾아갈 수 있었고, 어머니의 나라에 와서 국가대표로도 뛰는게 가능했죠. 살다보면 인생의 방향을 못 잡아서 갈팡질팡할 때도 많잖아요. 다행히 저는 농구라는 친구가 중심을 꽉 잡아줬어요. 어떻게 그 친구와 놀아야될까만 살짝 고민되었을 뿐 기본은 늘 똑같았죠. 지금도 제 옆에 있습니다. 친구, 다음에는 어디로 갈까?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KBL 제공, 본인제공
Copyright © 점프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