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김태유 서울대 산업공학 명예교수 | “美 대중 견제, 한국엔 기회…초기술 격차로 ‘中 의존’ 탈피해야”
“보호무역주의 확산과 지정학적 위기에 대한 대책은 ‘한국 기술력이 발전하는 것’밖에 없다. 잘하는 것을 더 잘하게 하는 선택과 집중만이 살길이다.”
김태유 서울대 산업공학 명예교수는 최근 인터뷰에서 "미국과 같은 강대국이 아닌 한국은 적극적으로 보호무역을 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김 교수는 경제·공학·역사학 등을 넘나들며 쌓은 지식과 통찰로 한국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온 ‘문명사학자’다. 2021년 한국의 저성장 탈출 해법을 담은 저서 ‘한국의 시간’으로 학계에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세계은행과 유엔개발계획(UNDP) 등은 한국이 ‘중진국의 함정’을 벗어나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것으로 인정했지만, 김 교수의 시각은 다소 냉소적이다. 그는 “한국이 선진국으로 분류된 것은 국제사회에서 선진국으로서 의무를 다하고 더 이상 중진국의 혜택을 기대하지 말라는 의미”라며 “우리는 더 보수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엔데믹(endemic·감염병 주기적 유행) 이후 한국에 대한 경제성장률 전망은 선진경제권 가운데 중하위 수준에 머물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한국의 올해 연간 성장률은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일본(2.0%)보다 낮은 1.4%로 전망된다.
김 교수는 “미국의 대중 경제 제재는 단기적으로는 한국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중국 의존’으로부터 탈피할 기회가 될 수 있다”며 “기술 격차를 벌릴 수 있도록 정부는 반도체, 배터리 등 강점 산업의 우수 인재 양성을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문명사학자의 시각에서 볼 때 한국이 과거 ‘중진국의 함정’에 빠졌던 이유는.
“세계 국가들은 두 가지 그룹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한 가지는 주변에 의존하는 ‘의존 경제형 국가’다. 이런 국가는 규모가 매우 작다. 싱가포르가 대표적이고 아일랜드, 노르웨이, 덴마크 등이 있다. 그 외에는 영국, 프랑스, 독일, 한국, 일본 등의 ‘국민 국가’가 있다. 무역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국민 국가는 국가가 자활할 수 있는 독립 체제를 갖췄다.
국민 국가의 기본 발전 원리를 얘기할 때 의존 경제형 국가의 사례를 예시로 들 수는 없다. 국민 국가가 자유시장 경제를 채택한 경우, 후발국이 선발국을 따라갈 수 없다. 구조적으로 두 국가의 차이는 점점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후발국이 선발국을 따라잡은 사례를 보면 예외없이 자유시장 경제 위에 계획 경제적 요소를 넣은 경우이다.
영국이 관세 정책, 전쟁 등으로 과거 조선 강국이었던 네덜란드를 꺾어버린 것도 이 같은 경우다. 하지만 강대국이 된 영국은 딛고 올라온 사다리(정책·제도)를 치워버리고 다른 국가에는 ‘자유무역을 하자’고 했다. 미국도 그랬다. 이후 국제적으로 사다리 걷어차기를 조약화한 게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다. 문명사적 흐름으로 봤을 때, 박정희 정부의 계획 경제로 빠르게 성장했던 한국이 중진국의 함정에 빠졌던 근본적인 이유다.”
세계은행은 2008년까지 ‘중진국의 함정’을 성공적으로 탈출한 나라로 한국을 꼽았고, UNDP는 2021년 한국을 선진국으로 인정했는데.
“세계은행 등은 후진국, 중진국, 선진국의 평가를 국내총생산(GDP)을 기준으로 한다. 한국의 명목 GDP는 이미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한국 경제가 선진국에 도달했는지는 의문이다. 과거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면 선진국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IMF 위기에 경제가 몰락할 뻔했다. UNDP가 2021년 한국을 선진국으로 분류한 것은 국제사회에서 선진국으로서 의무를 다하고, 더이상 중진국의 혜택을 기대하지 말라는 의미다. 세계가 한국을 선진국으로 분류해도, 우리는 보수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한국은 ‘한강의 기적’으로 중화학공업 발전에 성공해 선진국의 기틀을 닦았다. 하지만 지난 30년간 여러 정부를 거치며 경제성장률은 평균적으로 1%포인트씩 하락했다. (심지어 최근에는) 일본에도 뒤떨어지려고 한다. 게다가 출생률은 (2분기 기준) 0.7명으로 추락했고, 노인 빈곤율, 자살률은 OECD 국가 1위다. 한국이 빠르게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한 것은 맞지만 자만할 때가 아니다.”
그리스, 아르헨티나는 선진국 반열에 오르는 듯했지만, 다시 경제 위기를 겪었다. 두 국가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많은 이가 두 국가가 경제 위기를 겪은 원인으로 포퓰리즘(populism·대중주의)을 꼽는다. 하지만 포퓰리즘 외에도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그리스는 해운과 관광 등 서비스업의 나라, 아르헨티나는 농업의 나라다. 이 둘은 생산성이 체감하는 산업이다. 산업구조상 경제 발전이 어렵다. 두 국가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었으나 기술과 제조업을 발전시키려 하지 않았다.”
한국 경제는 미·중 갈등으로 위기를 겪고 있지 않나.
“미·중 패권 싸움에 한국이 끼어서 지정학적 위기에 놓였다는 말들을 한다. 하지만 과거 미·일 갈등에서 가장 많은 수혜를 입은 게 한국이다. 당시 섬유, 자동차, 반도체 등을 다 시작했다. 기회를 잘 활용한 것은 한국의 능력이지만, 미국이 일본에 대한 수출 규제를 안 했다면 한국 산업은 일본에 밀려 큰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중국 경제는 폭발적으로 성장해 왔고, 이젠 한국이 중국보다 앞서는 게 얼마 없다. 반도체는 경쟁력이 있지만, 전기차는 중국에 밀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미국이 중국의 발전을 견제하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단기적으로 한국의 대중 수출이 좀 줄어든다고 해도 장기적으로 수혜를 입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미국도 중국도 자국의 이익만을 위한다. 어느 국가가 우방국인지를 따진다면 어느 국가가 한국과 보완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봐야 한다. 한국은 산업구조가 비슷한 중국과 경쟁 관계가 강하다. 둘 중에서는 미국이 우방국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 경제성장 둔화가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우려도 있다.
“중국 경제성장률이 떨어지면, 한국의 대중 수출이 줄어든다. 반대로 중국 경제성장률이 높으면 한국의 대중 수출이 늘어난다. 당장은 중국 경제가 호황인 게 좋다고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중국이 한국 산업과 격차를 따라잡을 힘이 더 생기는 것이다. 한국하고 모든 면에서 치열한 경쟁 관계에 있는 중국이 발전하면 장기적으로 더 큰 위험이 된다는 말이다. 중국의 경제성장 둔화가 오히려 한국에는 ‘중국 의존’으로부터 탈피할 기회가 될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보호무역주의 속에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대응책은 ‘한국 기술력이 발전하는 것’밖에 없다. 한국과 대만이 미국 주도의 칩 4 (Chip 4, 미국·한국·대만·일본) 동맹을 맺을 수 있던 것은 반도체 경쟁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술 격차를 잃어버릴 때 한국이 누리던 것을 뺏겨버릴 것이다. 보호무역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미국처럼 강대국이 아닌 한국은 적극적으로 보호무역을 할 수가 없는 위치에 있다. 결국 과학·산업 기술의 초격차로 승부를 봐야 한다.”
한국 경제를 뒷받침하던 반도체 산업도 부진을 겪고 있는데.
“강대국의 발전 전략은 못 하는 것을 잘하게 만드는 ‘균형 발전’이다. 국내에서 대부분의 제품을 잘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은 무역 의존도가 높은 강소국이다. 잘하는 것을 더 잘하게 하는 선택과 집중만이 발전 전략이다. 2000년대 초반 한국 D램이 세계 최고 경쟁력을 갖췄을 당시, D램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때 D램에 더 투자했다면 지금쯤 D램 소재·장비 산업, 혹은 설계 산업을 상당 부분 흡수해 세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반도체와 배터리 등 강점 산업을 더 밀어줘서, 더 잘하게 만들어야 한다. 현재 한국 반도체가 대만에 밀리는 것은 ‘우수 인재의 부족’ 때문이다. 한국은 연구개발(R&D) 역량이 비교적 떨어진다. 국가 정책이 인재 양성에 초점을 맞춰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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