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리더] 비운의 이인자 리커창 전 중국 총리 타계 | 리커창 추모 열기에 담긴 메시지들…‘냉처리’ 나선 中 당국
중국 공산당 이인자였던 리커창(李克强) 전 중국 총리가 10월 27일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향년 68세. 한때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리 전 총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추모 열기가 고조되며 현실 권력에 대한 중국 국민의 불만이 표출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 관영 CCTV는 “상하이에서 휴식 중이던 리커창 동지가 10월 26일 갑작스러운 심장병이 발생했고, 구조에 전력을 다했지만 27일 0시 10분 세상을 떠났다”고 10월 27일 보도했다. 올해 3월 열린 양회(兩會)에서 총리직 퇴임을 공식화한 지 약 7개월 만이다. 리 전 총리 영결식은 11월 2일 베이징 바바오산 혁명공묘 예당(禮堂)에서 엄수됐다.
추모 열기 확산…검색어 사라지고 언론 잠잠
리 전 총리 서거 소식이 알려진 후 중국 전역에서 애도 분위기가 이어졌다. 대만 중앙통신사는 10월 29일 “안후이성 허페이의 리 전 총리 생가에 헌화하려는 조문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며 “조화가 동이 나 외지에서 배송할 정도로 추모 열기가 높다”고 전했다. 리 전 총리가 성장과 당서기를 지낸 허난성의 성도인 정저우 시내 광장과 공원 등에도 조화가 쌓였다.
추모 열기는 온라인에서도 이어졌다. 웨이보 등 중국 소셜미디어(SNS)에는 리 전 총리를 추모하는 글이 잇달아 올라왔다. 중국 포털 사이트 등에서는 리 전 총리 부고 소식이 검색어 순위 상위권에 올랐으며, 한때 ‘리커창 동지가 세상을 떠났다’라는 해시태그(#)가 22억 회 이상 조회 수를 기록했다. 리 전 총리의 모교 베이징대는 교내 신문 ‘베이징대 교보’ SNS 계정에 추모문을 게재했다.
그런데 리 전 총리의 사망 사흘째인 10월 29일 온라인에서 그와 관련된 해시태그가 돌연 사라졌다. 중국 언론도 잠잠한 분위기다. 중국 관영 매체들은 리 전 총리 사망과 관련해 단신성 보도만 내보냈을 뿐 별다른 후속 보도를 내지 않았다. 이에 리 전 총리를 애도하는 분위기 확산을 원치 않는 중국 당국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리 전 총리에 대한 추모 열기가 현 정권에 대한 불만 표출로 비화할 것을 우려한 중국 당국이 ‘냉처리(冷處理)’에 나섰다는 것이다. ‘냉처리’란 찬물을 끼얹듯 특정 사안의 주목도를 의도적으로 낮추는 조치를 뜻한다.
중국 당국이 각 대학에 리 전 총리 추모식을 열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보도가 나왔으며, 베이징 등 주요 도시 대학엔 ‘모임 금지령’이 내려진 것으로 알려졌다.
시진핑 경쟁자에서 ‘유령 총리’ 전락
1955년 7월 안후이성에서 태어난 리 전 총리는 베이징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에서 경제학 석·박사를 마친 ‘경제통’이다. 1993년 중국 공산당 산하 청년 조직인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제1서기(장관급)에 올랐고, 허난성, 랴오닝성 서기 등을 거쳐 2007년 공산당 최고 지도부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 발을 들였다. 한때 그는 시 주석과 함께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주석의 유력 후계자로 꼽혔다. 그러나 2008년 시 주석이 국가부주석에 오르고 2013년 국가주석 자리까지 꿰차며 리 전 총리는 ‘비운의 이인자’로 남게 됐다. 시 주석 집권 초기에는 그가 국방과 외교를, 리 전 총리가 경제를 담당하는 양분 구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다. 그러나 시 주석 중심의 권력 체제가 강화하며 리 전 총리의 존재감은 점차 옅어졌다. 두 사람은 이념적으로도 맞지 않았다. 경제통인 리 전 총리는 ‘성장’을 중시했지만, ‘분배’를 우선시한 시 주석은 ‘공동부유(共同富裕·다 함께 잘살기)’를 추진했다. 리 전 총리는 중국 공식 통계의 문제를 인정할 만큼 솔직한 관료로도 평가 받았다. 2007년 랴오닝성 당서기 시절 언급한 전력 소모량, 철도 운송량, 은행 대출 증가율 등 세 개 지표를 합친 이른바 커창 지수는 중국 정부 통계보다 더 신뢰를 받았다. 리 전 총리가 내세운 ‘대중 창업, 만인 혁신’과 규제 완화 노력은 중국의 창업 열풍으로 이어졌지만, 시 주석이 중앙집권을 강화하며 민간의 활력이 줄었다는 지적이다. 결국 그는 ‘유령 총리’ ‘최약체 총리’라는 평가까지 받았고, 지난 3월 10년간 공직 생활을 마감했다.
“사람이 하는 일 하늘이 보고 있다”…소신 발언 재조명
그러나 리 전 총리는 결정적 시기마다 기득권에 대한 소신 발언을 하며 민생을 챙기려는 행보로 주목받았다. 리 전 총리는 2020년 5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연례회의 폐막 기자회견에서 중국의 빈곤과 불평등 문제를 꼬집으며 “6억 명의 월수입은 1000위안(약 18만원)이다. 이 돈으로는 도시에서 집세를 내기조차 힘들다”고 말했다. 이는 당시 시 주석이 강조한 ‘샤오캉(小康·의식주 걱정 없이 풍족) 사회 건설’을 정면 비판한 발언으로 읽혔다. 중국판 카카오톡인 위챗에는 ‘앞으로는 월수입 1000위안이 안 되는 중국인이 6억 명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추도사를 전하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지난해 연설에서는 “경제사회 발전을 추진하는 것은 정부의 기본 직책이며, 깨끗한 정치를 의미하는 당풍건설의 필연적 요구”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책 집행 과정에서 구호만을 외친다거나 좋은 성과만 상부에 보고하고 문제점은 숨기는 방식을 지적한 것이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시 주석이 사실상 주도해 온 경제정책 집행의 부진을 은근히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리 전 총리는 지난 3월 퇴임을 앞두고 국무원 직원들에게 “사람이 하는 일은 하늘이 보고 있다(人在幹, 天在看)”는 발언도 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차지한 시 주석의 권력을 겨냥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이 밖에 “양쯔강과 황허강은 거꾸로 흐를 수 없다” “10년간 면벽했으면 벽을 부숴야 한다” 등 그의 생전 발언들 역시 최고 권력층에 대한 저항 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Plus Point
리커창 추모 경계하는 中
‘이인자 사망’ 트라우마?중국 당국이 리 전 총리 추모 분위기를 경계하는 이유는 추모 열기가 자칫 ‘반(反)시진핑’ 시위로 확대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1976년과 1989년의 베이징 톈안먼(천안문) 1·2차 시위가 모두 이인자 사망을 계기로 발생했기 때문이다. 1976년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 사망을 계기로 일어난 추모 행사는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을 비판하는 4·5운동으로 이어졌다. 1989년 4월엔 후야오방(胡耀邦) 총서기가 사망하자 개혁 성향 정치인이었던 그에 대한 추모 분위기가 강했고, 결국 그해 6월 톈안먼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중국 정부는 시위 참여자들을 무력으로 제압해 대규모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특히 이 사건들이 중국의 사회·경제적 혼란기에 벌어졌다는 점에서 중국 당국의 우려가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중국 당국은 부동산 위기, 높은 실업률 등 경제난에 직면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리 전 총리에 대한 추모 분위기는 현 정권에 부담과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다. 다만, 리 전 총리의 정치적 위상이나 대중적 인기가 전임자들만큼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대규모 시위 발생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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