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신유빈 황선우 꿈꾸며 퇴로 없이 '올인'… 한국 스포츠의 비극
<2> 외길 인생과 이도류 인생
전교 1등 농구 선수 양자택일 강요에 운동 포기
학생 선수 90% 중도 포기 "할 줄 아는 게 없어"
운동에만 '올인' 땐 사회성·학습력 떨어져 방황
운동 외길 극소수만 성공 "운동·학업 병행해야"
편집자주
한국 스포츠, 어떻게 기억하나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크게 도약한 우리 스포츠는 국민들에게 힘과 위로를 줬습니다. 하지만 저력의 K스포츠가 위기에 섰습니다. 프로 리그가 있는 종목조차 선수가 없어 존망을 걱정합니다. 반면, 라이벌 일본은 호성적을 거두며 멀찍이 달아났습니다. 희비가 엇갈린 양국 스포츠 현실을 취재해 재도약의 해법을 찾아봤습니다.
#1. 올해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한 방서연(23)씨는 중학교 때까지 농구 선수로 활약했다. 10세 때 클럽에서 취미로 농구를 시작한 그는 남다른 재능 덕에 각종 대회에서 상을 휩쓸었다. 자연스럽게 “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문제는 방씨가 공부도 전교 1등이었다는 점이다. 한국에선 운동부에 들어가는 순간 운동에만 목숨을 걸어야 하기에, 부모는 흔쾌히 딸의 꿈을 지지해주지 못했다. 방씨는 '농구부에 가도 지금처럼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겠다'고 약속한 뒤, 농구 명문인 서울 숙명여중으로 전학을 갈 수 있었다.
각오는 했지만 농구부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수업 듣고, 훈련하는 '주경야독' 생활이 반복됐다. 그래도 농구는 즐거웠고 성적도 좋았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고교 진학을 앞두고 농구와 공부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한국의 고교 농구부는 훈련량이 많아 공부할 틈을 주지 않았다. 방씨는 미래를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농구에 '올인'하는 대신 그만두는 길을 택했다.
#2. “아빠, 농구 제대로 해보고 싶어.” 3년 전, 직장인 정모(56)씨에게 중3 아들은 '농구부에 들어가 프로를 목표로 뛰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아들은 유소년 농구교실 때부터 '웬만한 선수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았다. 농구계에 발이 넓은 정씨는 전ㆍ현직 프로선수에게 실력을 봐달라고 했다. 모두 “프로에 갈 수 있는 재목”이라고 했다. 명문고에서 '스카우트하고 싶다'는 제안도 해왔다. 하지만, 정씨는 아들과 상의 끝에 거절했다. "프로에 간다고 해도 서른이면 나와야 할텐데 이후 삶이 그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학업을 접고 농구에만 매달리기엔 선수 생명은 짧고 인생은 길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중학교 2학년 수영 대표 장희진(37)이 영구 제명 처분을 받았다. “선수촌에서 합숙은 할 테니 학교에서 7교시 수업까지 듣게 해달라”고 요구한 게 이유였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장희진은 선수촌을 떠났고, 대한수영연맹은 그를 징계했다. 우여곡절 끝에 올림픽에 출전은 했지만, 이듬해 미국으로 떠났다. 이를 계기로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장씨는 현재 미국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23년이 흘렀지만, 달라진 건 없다. 여전히 학생 선수들은 '운동이냐, 공부냐' 선택을 강요받는다. 운동을 택한 이들은 어릴 때부터 바늘구멍 같은 프로 무대만을 바라보며 공부를 포기한다. 이렇게 외길 인생을 걷다가 운동을 그만두는 대다수 선수들은 학교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방황한다. 외동 자녀의 인생 대차대조표를 따져보는 요즘 부모들은 ‘모 아니면 도’ 운동부에 자녀를 보내려 하지 않는다. 거의 모든 종목이 학생 선수 ‘구인난’에 처한 배경이다.
한국일보는 학교 운동부 활동을 했거나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지만 끝내 선수 생활을 중도 포기했던 당사자와 학부모 11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이들은 "한국처럼 어린 선수를 '운동하는 기계'처럼 만드는 구조에서는 선수층이 두터워지기 어렵다"고 말했다.
선수 이전에 학생, 왜 안 될까?
우리나라는 왜 일본처럼 운동과 학업을 병행할 수 없을까. 시스템이 그렇게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체육특기자 제도에 따라 학생 선수는 성적과 관계 없이 운동만 잘하면 명문대에 갈 수 있다. 2016년 ‘정유라 사태’ 이후 최저학력제 등이 도입됐지만, 여전히 체육특기자 입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전국대회 8강 이상’ 같은 기록이다. 어릴 때부터 상급학교 진학에 필요한 성적을 만들기 위해 훈련량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한국스포츠개발원의 ‘한국 초ㆍ중ㆍ고 학생 선수 훈련시간 국내외 실태조사’(2014년)에 따르면, 초등학교 축구 선수는 1주일 평균 19시간, 중학생은 22시간, 고교생은 28시간 훈련했다. 반면 독일은 초등학생 8시간, 중학생 12시간, 고교생 14시간에 불과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2019년 조사에서도 고교 선수 55.9%가 “하루 평균 4시간 이상 운동한다”고 했다.
서울의 한 중학교 축구부 감독은 “대학 입시에 필요한 성적을 만들려면 축구 명문고에 진학해야 하고, 그렇다 보니 지도자도 단기간에 성적을 내기 위해 어린 선수를 쥐어짤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축구 선수 출신이자 경기 광문고 축구부 담당 교사였던 이현우(37) 교사는 “스페인, 영국 등 유럽 유소년 축구 선수들은 하루 1~2시간 정도 훈련한다”며 “우리나라는 새벽ㆍ오후ㆍ야간까지 종일 축구를 시키니 학업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운동으로 먹고사는 건 10%도 안 된다
운동에만 전념해도 모두가 먹고 살 수 있다면 문제될 게 없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신유빈(여자 탁구)이나 황선우(남자 수영)처럼 될 가능성은 0.1%도 안 된다.
대한체육회에 따르면 야구 축구 등 71개 종목에 학교 운동부 선수로 등록된 초ㆍ중ㆍ고교생 및 대학생은 8만 1,000여 명이다. 그러나 야구ㆍ축구ㆍ농구ㆍ배구 등 4대 종목 프로 선수는 2,000여 명에 불과하다. 지자체 등 실업팀 선수(약 7,800명)까지 합쳐도 직업 선수는 1만 명이 안 된다. 학생 선수 10명 중 9명은 자의든 타의든 어느 시점에 운동을 그만둬야 한다는 의미다.
종목별로 보면 처참한 현실이 더 확실히 보인다. 한국일보가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이용 국민의힘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한국야구위원회(KBO) 자료에 따르면, 2017년 프로야구 드래프트 참가자 964명 중 현재까지 야구를 하고 있는 선수는 7.8%(76명)에 불과했다. 같은해 여자 프로농구 드래프트에 참가한 24명 중 여전히 프로에서 뛰는 비율은 고작 8.3%(2명)였다. 남녀 배구도 2017년 드래프트 참가자 중 각각 25.5%와 27.5%만 코트에 남아 있었다.
선수 출신 학생이 중도에 운동을 그만두고 느끼는 막막함은 상상 이상이다. 태권도 선수 출신 정모(29)씨는 “열한 살 때부터 합숙하며 운동만 하다 중3 때 처음 펜을 잡았다. 영어는 쉬운 단어조차 제대로 읽을 줄 몰랐다”며 “운동만 할 줄 아는 바보나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축구 선수 출신 남규빈(21)씨는 "9세 때부터 축구만 하다가 중3 때 공부하려니 책상에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고, 글자도 읽히지 않았다. 매일 PC방을 전전하며 방황했다”고 했다.
어릴 때 운동을 관둔 선수는 그나마 사정이 낫다. 고교 졸업과 함께 야구를 그만둔 백진영(34)씨는 아무 준비 없이 사회에 나왔다. 야구 외엔 기술도 지식도 없었다. 백씨는 20대 내내 트럭제조업체와 철강업체 등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서른 살이 돼서야 유리 제조업체 정규직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는 “회사 교육부터 영어로 진행되니 정말 힘들었다”고 했다. 대학 때 야구를 접은 고선영(30)씨도 “운동 그만두고 치킨집에서 일하는데 사장이 ‘왜 멀뚱멀뚱 서 있느냐’ 다그치더라. 야구부에서 감독ㆍ코치가 시키는 것만 하면서 살아오다 보니 사회성이 부족했다”고 털어놨다.
대한체육회가 2019년 실시한 은퇴 운동선수 실태조사에 따르면, 운동선수의 평균 은퇴 나이는 23.6세, 은퇴 후 무직 비율은 41.9%에 달했다. 어렵게 직장을 구해도 64.6%는 비정규직이었다. 월 200만 원 이하를 버는 경우도 절반 이상(51.6%)이었다.
‘정유라 사태’ 전으로 돌아가는 학교 운동부
학습권 보장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6년 정유라씨의 이화여대 부정 입학 사건을 계기로 체육특기자 입시에 내신 성적 등이 반영됐다. 대회와 훈련에 참가하는 학생 선수를 위해 결석을 출석으로 인정해주는 ‘출석인정일수’도 지난해부터 중학교 12일, 고교 25일로 대폭 축소됐다. 그러자 지도자와 학부모들은 “의대 가는 학생이 체력시험 보느냐”, “대학 가려면 대회에 나가야 하는데 어쩌란 말이냐”고 반발했다. 결국 인정일수는 중학교 35일, 고교 50일로 확대됐다. 체육특기자 제도를 유지한 채 학습권을 강화하려다 보니 충돌이 생긴 셈이다.
그럼에도 운동을 그만둔 뒤 좌절감과 막막함, 불안감 등을 느꼈던 전직 선수들은 학습권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돼야 한다고 말한다. 고1 때 축구를 그만둔 윤진민(20)씨는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두려운 마음에 축구부에 계속 붙어 있는 후배가 많다”며 “학생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주기 위해서라도 공부가 필요하다”고 했다. 고2 여름에 축구부를 나온 서하늘(23)씨도 “운동을 그만둔 학생들에게 체계적으로 제2의 진로를 모색해줄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했다.
운동부에 갇혀 있는 학생들에게 교우 관계, 체험학습, 수학여행 등의 ‘일상’을 되돌려줘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농구선수 출신인 임용석(44) 충북대 교수는 “공부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학생들이 운동부라는 좁은 사회에서 지도자와 선후배만 접하며 수년째 고립된 채 살아간다는 게 문제”라며 “운동부에선 문제 되지 않았던 언어와 행동이 사회에 나오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문제가 되면서 사회 적응을 어렵게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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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석 기자 pjs@hankookilbo.com
김지섭 기자 onion@hankookilbo.com
송주용 기자 juy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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