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쥐고 몰입하게 되는 통탄과 전율의 141분, '서울의 봄'

아이즈 ize 정수진(칼럼니스트) 2023. 11. 14.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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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ize 정수진(칼럼니스트)

사진=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패배로 끝난 역사적 사건을 스크린에서 보는 경험이 이토록 몰입되고 짜릿할 수 있을까. 한국영화 최초로 12.12 군사반란을 소재로 한 '서울의 봄'(감독 김성수)은 '역사가 스포일러'라는 치명적인 단점을 뒤로 하고 1979년 12월 12일, 그날의 현장으로 관객들을 오롯이 몰아넣고 또렷이 목격하게 만든다. 그 시대를 살아온 이들은 물론이요, 그 시대를 책으로만 읽은 이들에게도 40여 년이 흐른 그날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게 만드는 영리한 장르영화의 탄생이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서울의 봄'은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며 유신 체재가 막을 내리고 신군부에 의해 5.18 민주화운동이 짓밟히기 전까지, 대한민국에 민주화의 바람이 불 것이란 희망이 있던 시기를 뜻한다. 그리고 12.12 군사반란은 이 서울의 봄이 실패로 끝나게 된 결정적 사건으로,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꾼 사건으로도 꼽힌다. 1979년 12월 12일 당시 한남동에 살던 고등학생이었던 김성수 감독은 그날의 총성을 직접 들었으나 10여 년이 흐르고 나서야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됐다고 한다. 하룻밤 사이 우리나라 군부가 무너질 수 있다는 놀라움과 의구심은 감독에게 오랫동안 화두가 되었고, 그는 '그동안의 숙제에 대한 답을 갈음한 작품'이라며 '서울의 봄' 연출의 의미를 밝혔다. 

사진=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영화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해되는 것에서 출발한다. 계엄령 하에서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된 보안사령관 전두광(황정민)은 군대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이용해 세를 불려가고,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 정상호(이성민)는 전두광을 견제하고자 뚝심 있는 군인인 이태신(정우성)을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한다. 정상호가 자신을 한직으로 발령시킬 것이란 정보를 입수한 전두광은 그가 10.26 사건 때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체포하고자 한다. 계엄령 하에 계엄사령관을 체포한다는, 그야말로 초유의 반란이다. 권력을 찬탈하려는 전두광의 반란군과 그에 맞서 군인의 신념을 지키려는 이태신의 진압군이 맞부딪친다. 

1979년 12월 12일 저녁부터 다음날 최한규(정동환) 대통령이 새벽 5시 10분이라고 적어 넣은 사후 재가의 시간까지 약 9시간을 중심으로 한 '서울의 봄'은 반란군과 진압군 사이 벌어진 일촉즉발의 일들을 속도감 있게 그려낸다. 반란군의 승리라고 짧게 기록된 역사의 이면, 그 빈틈을 영화적으로 재구성하는데, '제4공화국' '코리아게이트' '제5공화국' 등 드라마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등 교양 예능으로 접한 12.12 군사반란과는 사뭇 다른 긴장감과 몰입감이 일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건 자체의 자료는 많이 남아 있으나 군사반란이 본격 전개된 9시간 동안 반란군 내부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와 모의가 오갔는지, 그에 대한 진압군의 구체적인 움직임은 어땠는지 남아 있는 자료가 없기 때문. 이 틈을 김성수 감독은 영화적 상상력으로 풍성하게 메운다. 특히 하나회가 주축인 반란군 지휘부가 시시각각 상황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모습은 블랙코미디 양상을 띠는데, 진짜 저랬을 것 같다는 묘한 공감은 덤. 

사진=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진압군의 패배, 반란군의 승리로 기억될 수 있는 사건을 스크린으로 끌어온 이유는 자명하다. 영화는 드라마 '제5공화국'처럼 자칫 악인들이 미화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닙니까!"를 외치는 전두광은 승리하지만 영화의 엔딩에서 그가 홀로 터트리는 웃음은 허망하기 짝이 없다. '서울의 봄'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괴변의 시대를 넘어, 반란군의 승리가 결국 후세에 비극이자 반역으로 기록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과거의 일을 다루었지만 곱씹어볼 여지도 많다.

하나회로 대변되는 혈연, 지연, 학연의 끈끈한 카르텔은 그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강력해 보인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강력한 누군가가 자기를 리드해주길 바란다니까"라고 일갈하는 전두광의 대사도 의미심장하다. 민주주의가 공기처럼 여겨지는 현재라도, 12.12 군사반란과 같은 쿠데타까지는 아니어도 그 못지 않은 탐욕의 반란은 언제고 일어날 수 있음을 명확히 들려주는 대사가 아닐 수 없다. 다만 역사적 사실을 몰라도 충분히 즐길 순 있지만, 어느 정도 배경지식이 있으면 더욱 흥미진진한 요소들이 곳곳에 배치돼 있다는 점은 약간의 진입장벽이 될 수도 있겠다. 시사회에서 전두광의 아내가 등장할 때 웃음을 터트리는 이들과 그에 반해 영문을 몰라 하는 이들로 나뉜 것처럼.

사진=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배우진의 촘촘한 연기는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절대적 이유 중 하나. 영화적 상상력이 가미됐기에 실존 인물과 다른 이름들을 부여받았지만, 모티프가 된 실존 인물과의 싱크로율에서도 합격점을 줄 수 있다. 특히 고 전두환 전 대통령을 모티프로 한 전두광 역의 황정민은 민머리 분장의 비주얼 싱크로율부터 눈길을 끌지만, 대사 하나하나며 탐욕으로 이글이글대는 눈빛이며 야욕으로 바르르 떨리는 입술까지 무엇 하나 감탄하지 않을 요소가 없다. 너무 연기를 잘해서 그 실존 인물의 이미지까지 강렬하게 오버랩되며 꼴보기 싫어지는 부작용이 있다면 모를까.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모티프로 한 이태신 역의 정우성은, 연기적으로 또 다른 진일보를 보여준다. 군인정신에 투철한 반듯한 신념을 지닌 캐릭터는 기존의 정우성이 무척 할 법한 안정적인 선택으로 보이지만, 신념 속에서도 고뇌하고 현실에 좌절하는 모습으로 공감을 산다. 카리스마에서도 황정민의 전두광에 밀리지 않는다.

내로라하는 대한민국 남자배우들이 대거 등용됐기에 반가운 얼굴들도 많다. '남산의 부장들'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연기한 이성민은 이번에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모티프로 한 정상호로 분해 사뭇 다른 모습을 선보인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로 유명한 박해준은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과 모종의 관계성을 그리며 눈길을 끈다. 어쩌면 이 영화로 또 다른 명대사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끝까지 강경 대응을 주장하는 진압군 김준엽 헌병감 역의 김성균, 특전사령관 역의 정만식, 전두광의 선배 라인인 반란군 장성 역의 안내상, 전두광 비서실장 역의 박훈 등은 물론, 특별출연한 오진호 소령 역의 정해인과 총장 경호원 역의 이준혁 등 모두가 역사 속 그날의 한 장면이 되어 현실감을 더한다. 

'서울의 봄'은 11월 22일 개봉한다. 러닝타임은 141분으로 다소 긴 편이지만 141분 내내 주먹을 쥐고 몰입되는 흡인력을 자랑한다. 스크린으로 그날을 경험하고 나면 몇날 며칠이고 그 역사의 줄기를 탐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 장담한다. 12세 관람가이니, 부모와 자녀가 함께 관람하는 것도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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