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힘도 없어…발 뻗을 집도 사랑도 다 날아가고 바다로 떠난다
'내가 1004호 전셋집 계약서를 왜 썼을까. 대체 왜.'
32살 최지수씨는 계속해서 과거로 돌아간단다. 전세 계약을 했던 2020년 여름으로. '사기'일 줄은 꿈에도 몰랐었던.
"진짜 그 순간을 1000번도 넘게 생각한 것 같아요. 자꾸만 돌아가서 '안 돼, 계약하면 절대 안 돼'. 그런 거지요."
지수씨가 말했다. 표정에 그늘이 졌다. 혹여나 자책할까 싶어,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선명한 선을 그어주었다. 그런 말이 전혀 위로가 안 된단 걸 알았다. 전세금 5800만원을 통째로 날린 피해자에겐.
전세사기. 해결된 건 전혀 없는데 여론의 기억에선 밀려나고 잊혀졌다. 또 다른 이슈에. 연예인 마약이나, 누가 실은 여자였고 그런 것들에. 그러는 동안에도 지옥 같은 삶은 계속되었다.
그를 만나 인터뷰한 건 시월 말. 반듯한 흰 셔츠를 입고 나온 그에게 물었다. 배는 며칠에 타게 돼 있느냐고. 12월 15일이라고 했다. 시간이 좀 남았다. 배 타기 전엔 히말라야 하이킹을 하고 싶단다. 친구들도 많이 만나고, 가족들과도 시간을 보내고. 그동안 피해에 잠식돼 너무 우울하게 산 것 같다며.
피해가 계속된단 게 이런 거다. 지수씨가 올해 크리스마스를 원양상선에서, 머나먼 바다에서 보내게 된 것. 원래 꿈은 조종사임에도.
경매 2차가 시세 70%로 진행됐음에도 낙찰이 안 됐다. 그 무렵엔 헝가리에 있는 여자친구에게 전화했다. 함께 해외 취업 교육을 받으며 만난 사이. 전세 사기 피해를 수습하러, 한국에 돌아올 땐 거짓말을 했었다. 지수씨가 말했다.
"레스토랑 사장 되러 간다고 했었어요. 여자친구한텐 그냥 쓰레기가 되어서 왔지요. 해결될 거란 희망이 그 때만 해도 있었어요. 그런데 돌아온 뒤 알게 됐죠. 아무 희망이 없단 걸."
전화로 "헤어지자"고 했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3차 경매에서 빌라 건물이 낙찰됐다. 25억4000만원. 감정 평가 금액의 절반 정도였다. 소액 임차인의 최우선변제금, 2000만원이라도 받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그마저도 안 됐다. 변제금을 받을 소액 임차인 기준에 안 맞았다. 천안시는 보증금 5000만원까지만 변제금을 받게 돼 있었다. 지수씨가 계약했던 2020년 기준이 그랬다. 부동산 사장이 그랬었다. "건물에 문제 생겨도 최우선변제금 받을 조건은 충분하니, 아무 걱정 말라"고. 모든 희망이 꺾였다.
'갑자기 거대한 소행성이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무릎이 꺾였다. 울지 않았다. 울 힘도 없었다.'(전세지옥, 최지수 작가, p137)
이 빌라 전세 사기의 또 다른 피해자인 지영씨. 간호사인 그는 대학 졸업 후, 스물 네 살부터 병원에서 밤낮으로 교대하며 일했다. 착실히 전세금을 모았다. 오래 사귄 남자친구와 지난해 결혼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전세 사기 피해로 올해까지도 결혼을 못하고 미루었다.
'우리 인생을 철저히 짓밟은 건물주는 1원도 반납하지 않은 채 길어야 겨우 2~3년 징역형을 선고 받을 거다. 분명 꽁꽁 숨겨두었던 우리 돈으로 비싼 밥을 먹고 골프를 치고 해외여행을 다니며 편하게 살 거다. 정말 불공평한 세상이다.'(전세지옥, p150)
지수씨가 최근에야 경찰로부터 진행 중인 수사 내용을 들었다. 그에 따르면, 지수씨가 살던 천안 빌라 뿐 아니라 인근 건물까지, 총 세 곳을 대상으로 동시에 사기를 쳤단다. 그가 말했다.
"경찰 말로는, 전세 사기는 컨설턴트, 건물주, 관리소장, 공인중개사가 함께 했다고 합니다. 공인중개사를 제외한 모두가 구속 상태입니다. 건물 인수시에도, 건물주는 전세계약서를 속여 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인수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걸 가능케했던 '부실한 제도'. 지수씨는 대출 규제가 필요하다고 했다. "빌라 같은 경우 무너지면 도미노로 와르르, 무너집니다. 대출 한도를 낮춰서 깡통 전세가 일어나지 않게 해야해요. 집주인이 수십, 수백 개 건물을 못 갖게 바꿔야 합니다." 피해를 본 이가 하나하나, 뼈저리게 공부해서 전하는 말이었다.
예방책 뿐 아니라 피해자들을 위한 보상 제도도. '먼저 구제, 나중에 회수'로 해결해달란 게, 전세 사기 피해자 다수 입장이라 했다. 일단 예산을 써서 구제하고, 나중에 집주인이나 사기꾼들에게 돈을 회수하는 방법. 이에 지수씨는 "큰 예산이 든단 걸 안다. 그러니 저는 현실적으로 매매로, 10년 무이자 대출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생각했어요. 제 꿈을 싣고, 꿈을 찾아 어디론가 떠난다고요. 어찌보면 꿈 배달부인 거지요. 누군가의 꿈도 그리 날라주고 싶은 거지요."
빚은 여전히 남았고, 모아야 할 돈은 많고, 시간은 많지 않았다. 선택의 시간이 왔다. 지수씨가 부모님께 조심스레 말했다. 원양상선을 타려고 한다고. 최대한 담담하게 꺼내두었다.
'아버지는 할 말을 잃으셨고 어머니는 울음을 터트리셨다. 전세 사기로 이미 평생 끼칠 걱정을 모두 끼쳐드렸는데, 또다시 그만큼의 걱정을 더 만들어드린 셈이 되었다.'(전세지옥, p240)
구체적인 일정을 물었다. 지수씨가 설명했다. "카타르와 한국을 오가는 배에요. LNG(액화천연가스)를 받아오는 선박이고요. 6개월 동안 내리지 못한대요. 그걸로도 돈이 모자랄 것 같아요. 한 번 더 타야지요. 1년 정도로요." 아마도, 올해 크리스마스도 외국으로 향하고 있을 낯설고 큰 배. 거기엔 치킨집이 망해 1억6000만원을 날린 사장님도, 코로나19로 뷔페를 운영하다 망한 나이 지긋한 분도 있다고.
지수씨가 눈물 1리터를 쏟으며 썼단 책. '전세지옥'의 마지막 문장이 이랬다.
'내가 전세 사기 피해를 완전히 극복하는 순간은 돈을 온전히 돌려받는 날이 아니라, 조종사 훈련을 시작하는 첫날일 것이다. 이 책도 그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아직 꿈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전세지옥, p255)
에필로그(epilogue).
하루종일 초밥집·횟집에서 진동하는 비린내와 싸우던 시절. 조금 남은 월급으로, 중고마켓에서 '피아노'를 사고 싶었다고 했다. 왜 하필 피아노였을지 궁금해 물었다. 지수씨가 답했다.
"진짜 그땐 삶에 행복한 게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나에게 조금이나마 행복을 선물해보자, 그런 심경이었어요."
'전세지옥' 책을 만든 사람. 또 인터뷰 할 때도 곁에 있던 이다희 세종서적 편집팀장이 피아노 얘길 이어갔다.
"하루종일 서서, 생선 만지면서, 알바를 했잖아요. 몸에선 비린내가 진동하고 너무, 삶의 활력이 하나도 없잖아요. 그런데 피아노란 게 되게 감성적인 거지요. 저는 그 대목을 읽으면서 뭔가 내 인생에도 그런 선율을 들려주고 싶은 느낌이었을까 싶었어요. 그게 다른 것보다 더 막 짠하더라고요."
이는 크게 봐선 지수씨가 전세사기 피해자들에게 하고픈 말이기도 했다.
"친구가 공연 티켓 있다고 보러 가자고 하더라고요. 그걸 보는데 너무 행복한 거예요. 이런 행복을 너무 다 흘려보내고 있었구나 싶었어요. 저처럼 자책만 하며 지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곧 봄날이 오겠지요, 행복도 함께."
남형도 기자 huma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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