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당 이끈 실록 ‘수호’ 인연 제자리 환수 연꽃 피워

노형석 2023. 11. 14. 07: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대산 실록 환수 주역 정념스님 인터뷰
지난 10일 오전 월정사 심검당에서 만난 정념스님. 환한 미소를 지으며 오대산사고본의 제자리 귀환에 대한 감회를 털어놓았다. 노형석 기자

“110년 만에 제자리를 찾은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은 사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유명한 고승 사명당(1544~1610)과 뿌리 깊은 인연이 있어요. ”

강원도 평창 오대산의 고찰인 월정사의 주지 정념(67) 스님은 기자에게 차를 권하면서 사명당 대사의 이야기로 다담의 화두를 풀어나갔다. 실록을 보관하는 오대산 사고가 1606년 조선 조정의 명령으로 산중에 지어질 때 건물터 자리는 사명당이 수행하던 거처였다는 말이었다. 지난 11일 문을 연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건립의 일등공신으로 꼽혀온 그는 “오대산 사고본이 원래 보관됐던 자리로 돌아오게 된 건 사명당의 호국정신과 호국을 위한 행적들이 지금 시대 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일본에 외교사절로 가서 장군 도쿠가와와 담판하며 수많은 납치 조선인들을 데려온 사명당 스님은 오대산을 무척 좋아해서 일본을 다녀온 뒤 5년 이상을 오대산에서 수행했어요. 그때 머물던 장소가 왕조실록이 보관된 사고 건물 터 부근이었답니다. 조선 조정이 외적의 침입에 안전한 실록의 보관처를 찾기 위해 나라 안 심산유곡을 수소문할 때 오대산도 후보로 올랐으나 당시 정선 부사 등 지방관들은 적지가 아니라는 보고를 올렸지만, 사명당의 생각은 달랐어요. 수년 동안 은거하며 수행했던 그는 이곳이 불과 물, 바람의 3재(세가지 재해)를 피할 수 있는 최고의 길지라고 적극 추천을 했고, 이를 조정이 받아들여 사고가 들어서게 됐다는 설이 절에 전해져옵니다. 월정사는 그 뒤 주지가 유사시 승병을 동원할 수 있는 왕의 밀부를 지난 수호총섭이 되어 300년간 실록의 관리 책임을 맡았습니다.”

지난 10일 오전 월정사 심검당에서 만난 정념스님. 미소를 지으며 오대산사고본의 제자리 귀환에 대한 감회를 털어놓았다.

사명당과의 인연으로 오대산에 1606년 들어선 사고는 307년을 존속하지만, 1913년 군경을 동원한 일제 총독부가 강탈에 가까운 반출 공작을 벌이면서 보존체계는 붕괴된다. 실록은 일본 도쿄제국대학과 경성제국대학, 의궤는 일본 궁내청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가져간 수백여권의 실록은 10년 뒤 간토대지진으로 불타버리고 75권만 남게 됐다. 그로부터 90년이 흐른 지난 2004~05년 월정사와 교단 관계자들이 도쿄대의 소장 사실을 파악하게 된 뒤 정념 스님은 과거 실록을 수호했던 절의 책무를 이어받아 환수에 나서는 것이 의무임을 깨닫는다.

스님은 지속적으로 면밀하게 책무를 실행했다. 2006년 3월3일 서울 경복궁에서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를 출범시키고 공동의장을 맡아 실록 환수는 물론 2011년 궁내청에 소장되어 있던 의궤의 반환에도 주도적으로 나섰다. 환수된 뒤 정부는 국가 유산임을 근거로 2016년 실록과 의궤는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했지만, 스님은 굴하지 않고 2021년 6월 문화계·불교 교단·강원도 지역 인사 700여명과 함께 ‘오대산 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의궤 범도민 환수위원회’를 발족시켜 의궤와 실록을 원래 사고가 있던 곳에 보관, 전시해야 한다며 정부 관계자 면담, 국회청원 등의 운동을 계속했다. 문화계는 물론 정치권 등에서도 호응이 확산됐다. 지난해 2월 국회는 여야 만장일치로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과 의궤 제자리 찾기를 위한 국립조선왕조실록전시관 설립 촉구 결의안을 의결했고, 그해 5월 문화재청의 국정과제로 박물관 설립 추진안이 확정되기에 이른다.

지난 2019년 이미 국비지원을 받아 2층, 2148㎡(650평) 규모의 첨단 수장 전시시설을 갖춘 ‘왕조실록·의궤 박물관’을 완공한 터라, 국가박물관 설립안이 확정되자 월정사 쪽은 바로 건물을 국가에 기부채납했다. 사명당의 발심 이래 오대산 사고를 300여년 지킨 수호사찰이었다는 긍지와 책임감을 후대에도 잇겠다는 굳은 마음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기적 같은 성과를 이룬 셈이다. 스님은 “지역의 문화분권과 역사유산에 대한 관심이 최근 들어 새롭게 고조되면서 더 이상 지역 연고 문화유산을 중앙 기관에 고립시키듯 두어서는 안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도 제자리 찾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고 떠올렸다.

“‘화중생연’이란 불가의 게송을 나름 지침처럼 삼아왔습니다. 불꽃 속에서도 연꽃을 피운다는 뜻인데, 힘들고 어려운 삶의 현장 속에서 수행되고 단련되어야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실록이 제자리를 찾아 굉장히 기쁘지만, 그런 환희심에만 머물지 않고 화중생연의 다짐으로 실록이 원래 자리로 돌아간 뜻에 따라 과거 절의 수호 정신을 계승해 지역의 문화를 선양하는 데 더욱 애쓰려고 합니다.”

평창/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