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포럼] 붉은 깃발이 걸린 '하나로'
'붉은 깃발법'은 제도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1826년 영국에서 증기기관을 이용하는 자동차가 등장한 이후, 꾸준한 상용화 과정을 거치며 점점 보급됐다. 하지만, 당시 기득권이었던 마차를 모는 마부들의 민원으로 증기자동차 운행이 제한됐고, 영국의 자동차 산업이 뒤떨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법의 내용을 요약하면, 증기자동차는 교외에서는 시속 6㎞를 넘지 말고, 시내에서는 3㎞를 초과할 수 없다. 1대의 증기자동차에는 운전수, 기관원과 기수가 필요하고, 그중 기수는 붉은 깃발이나 붉은 등을 갖고 자동차의 55m 앞에서 차를 선도했다. 자동차 앞에 있는 마부에게 자동차가 다가오는 것을 알려줘서 말이 놀라게 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법 내용만 봐도 과한 규제인 것이 느껴진다. 법이 선포된 1965년, 이미 시속 30㎞ 이상을 달릴 수 있었던 증기기관 자동차를 느린 마차 뒤에서 운행하도록 만든 법은 자동차 산업 성장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었을 것이다. 이 법은 30년이나 효력을 발휘했고, 결국 영국의 자동차 산업은 독일, 프랑스, 미국에 주도권을 넘겨주게 됐다.
규제는 만들어질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증기자동차는 매우 크고 무거웠으며, 배출구에서 나오는 증기와 연기는 말과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 일쑤였다. 사람들의 불안감을 고려해 만든 규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엄밀히 말해 신기술을 제한하고 있지 않았다. 법으로 제한된 대상은 증기자동차뿐으로 휘발유 자동차와 같이 새로운 기술은 적용 대상이 아니었다. 결과론적으로 '붉은 깃발법'으로 인해 증기자동차 퇴출이 빨라지고 휘발유 엔진 자동차의 등장이 빨라졌다고 볼 수도 있다.
갑론을박이 있는 법이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규제와 딱 들어맞는 사례가 원자력 연구 현장에 있다. 바로 연구용원자로 운영에 관련된 규제이다. 원자력 규제 시스템의 근간은 대형원전에 두고 있다. 대형원전은 경제적으로 대량의 전기를 생산하기 위한 시설이다. 방사성 물질로부터 시민들이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사고를 예방하고, 점검하도록 규제 체제를 만들어 놨다. 대형원전은 안전하고 값싸게 전기를 생산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모든 장치가 원자로를 안전하게 운영되도록 구성돼 있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하면 원자로 안전을 위해 정지하고 규제기관의 확인을 받은 후 다시 가동하는 절차가 생겼다.
하지만 연구용원자로는 대형원전과 다르다. 이름대로 다양한 연구 장비들에 중성자를 제공하기 위한 중성자 공장이다. 주목적이 연구 장비이기 때문에 원자로는 안전하더라도 연결된 연구 장비에 문제가 발생할 것 같으면 장비 보호를 위해 원자로를 정지하게 설계돼 있다. 즉, 애초에 원자로를 쉽게 끄고 켤 수 있게 만들어진 제품이다.
이러한 특성을 반영해 과거에는 실험장치 보호 등 비안전계통 문제로 발생한 정지의 경우에는 규제기관에 보고만 하고 능동적으로 재가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후쿠시마 사고 이후 더 강력한 규제에 대한 요구가 있었고, 그 영향으로 2018년에 연구용원자로도 모든 정지에 대해 보고 후 가동 승인을 받아야 다시 운전할 수 있게 관련 규정을 바꾸었다.
이러한 규정 개정은 현대판 '붉은 깃발법'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일본, 독일의 연구용원자로는 비안전계통의 문제로 인한 원자로 정지는 규제기관에 간소하게 보고하고 시설운영자에게 재가동 승인권을 맡기고 있다. 연구용원자로의 주 이용자는 반도체, 이차전지 등 첨단산업계와 기초 연구자들이다. 더욱이 하나로는 소아암 치료 물질을 생산하고 있어서 제때 가동되지 않으면 산업경쟁력을 잃을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아픔을 돌보지 못하게 된다.
다행히도 연구용원자로 운영에 관한 규정 개선의 목소리가 규제기관에까지 닿은 것 같다. 원자력 규제 전문기관에서는 관련 규제 개선에 관한 연구에 착수했고, 곧 결과가 나올 예정이다. 연구 결과가 나오면 부디 정쟁에 휘말리지 않고 조속히 규정 개정이 이뤄지길 희망한다. 하나로에 걸린 붉은 깃발을 내리는 것이, 치료제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소아암 환우와 그 가족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이영준 한국원자력연구원 정책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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