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 어린 나이에 ‘첫 앨범’...하춘화 “62년 가수 인생 후회 없어요”
“저는 금년에 일곱 살 된 하춘화입니다.” 1962년 하춘화의 독집 음반 ‘당년 칠세 소녀 가수 하춘화 가요 앨범’에서 들려온 이 앙증맞은 인사말이 대중을 발칵 뒤집어 놨다. 국내 최연소 정식 음반 데뷔 기록. “1961년 첫 공연을 기점으론 올해 데뷔 62주년”이라는 하춘화(68)는 ‘어린이 가수’란 말을 국내에 처음 유행시켰다. 최근 자신처럼 여섯 살 때 뮤지컬 배우로 데뷔한 조카 손녀 하유나(12)양과 듀엣곡 ‘엄마와 딸’을 발표했다. “’여섯 살 하춘화’가 많이 떠올랐고, 우리 대중가요에 시대의 삶이 스미는구나 깨달았다”고 했다. 16세 때 냈던 히트곡 ‘물새 한 마리(1971)’도 “당시 급속했던 산업화가 가사의 배경”. “‘외로이 흐느끼며 혼자 서 있는 싸늘한 호숫가에 물새 한 마리.’ 성공을 위해 홀로 상경한 지방 출신 청춘들의 외로움을 노래한 거였죠.”
◇'당년 칠세 소녀 가수 하춘화’
4자매 중 둘째로 태어난 그의 가수 재능을 처음 알아본 건 부산에서 선박용 밧줄 제작 사업을 하던 아버지였다. 다섯 살 때 집 근처 중국집 주인의 “탕수육 한 조각 줄게”란 말에 혹해 가게 앞에서 노래했는데 “인파가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고 했다. 퇴근길에 이를 목격한 아버지가 이듬해 가족을 모두 데리고 상경해 하춘화를 동아예술학원에 입학시켰다. 여기서 만난 작곡가 형석기와 함께 낸 것이 바로 데뷔 음반이 됐다. 세계 최연소 데뷔 기록은 몇 년 후 마이클 잭슨(만 5세 데뷔)에게 뺏겼지만 “해외에서도 큰 화제가 되어 내 공연 때마다 일본, 미국 등 외국인 관객이 찾아왔다”고 했다. 인기 어린이 연예인만 나가던 ‘베이비 쇼’에도 출연해 “1962년 당시 열한 살이던 배우 안성기와 함께 춘향이와 이몽룡을 연기했다”고 했다.
어린이를 돈벌이에 이용한다는 따가운 시선도 있었다. 1965년 2월 MBC라디오 ‘가요 1번지’에선 MC가 어린이 가수를 공개 비판했다. 하춘화는 “그럼에도 아버지가 남다른 분이셨기에 하고 싶은 노래를 계속할 수 있었다”며 웃었다. “’딴따라’ 인식이 있을 때지만 ‘자식의 타고난 재질을 키워줘야 한다’는 의지가 강하셨어요. 아버지는 장손에 장남인데 딸만 넷이니 할머니뿐 아니라 어머니까지 ‘밖에서 아들을 낳아 오라’ 했는데, ‘앞으로는 아들딸 관계없는 시대가 온다’며 거절하신 분이셨죠. 70세 때 컴퓨터를 배워 제 팬카페 관리를 직접 하셨고요. 2006년 뒤늦게 제가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예술철학 박사 학위를 딴 것도 아버지의 자극 덕분이었죠. 다른 자매들이 먼저 박사 학위를 따니 벽에 칸 4개를 만들어 나이 순서대로 걸면서 두 번째 칸만 비워두셨어요. 둘째인 내가 따 와서 채우라고요.”
◇8500번 공연과 마이크 수집
이후 하춘화는 고봉산과의 듀엣 ‘잘했군 잘했어’, ‘영암아리랑’ 등 연이은 히트로 1972년부터 4년 연속 TBC 여자 가수상을 탔고, 1991년 ‘국내 최다 공연(8500회)’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1983년 후배들에게 나눠준 무대 의상만 150벌이었을 정도. ‘다이애나 로스’ ‘마이클 잭슨’ 등이 찾는 뉴욕의 악기 가게를 단골로 들러 수집한 50여개 무대용 고급 마이크에는 수천 번 무대에서 흘린 땀이 묻어 있다. “어릴 땐 송해 선생님과 무대를 자주 섰는데, 제가 키가 작으니 유선 마이크를 꼭 입에 직접 갖다 대주셔야 했죠(웃음).”
개중에는 ‘난관’인 공연도 있었다. 1972년 5월 17세 나이에 간 ‘월남 위문 공연’ 땐 “전선에 보호자가 따라가는 게 어려워 대학생이던 첫째 언니가 ‘무용수’로 등록해 함께 갔다”고 했다. “미성년자라 부모님이 반대했지만, 파병 군인들의 공연 희망 가수 설문에서 항상 1위를 하니 거절할 도리가 없었죠.” 월남 공연 중 만난 코미디언 ‘이주일’이 1977년 14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이리역 사고에서 인근 무대에 함께 섰던 하춘화를 구해내기도 했다. “1974년 지역 공연 사회자 오디션에서 얼굴이 너무 못생겼다며 악단장이 이주일씨를 떨어뜨리려던 걸 제가 기회를 줘보자 했죠. 제 8500회 공연 기록 중 7000회를 함께 했어요. 사고 당시 무너진 건물 파편 사이에서 두개골 골절상을 입은 이주일씨가 제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찾아다녔는데, 그분 아니었으면 전 죽은 목숨이었죠.”
대중 가수 최초로 ‘1985년 남북 예술인 교환 공연’에 갈 땐 “납북 사건이 많을 때라 부모님이 펑펑 울었다”고 했다. “남자 가수 대표로 뽑힌 나훈아와 함께 3개월간 국내 산업 현황 교육을 받은 뒤 판문점에서 마치 포로 교환하듯 시간을 재가며 남북 예술단원들을 교환했다”고 했다. “북한 사람들이 국내 사정 물으면 똑똑하게 답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았는데 단, 논쟁은 하지 말라더군요. 북쪽 애들은 자아비판을 하도 어릴 때부터 해서 말싸움을 아주 잘한다고.” 그렇게 북으로 넘어가 나훈아와 듀엣 공연을 준비할 때 자주 한 말은 “여기 살라고 해도 못 살겠다”였다고 했다.
◇자랑스러웠던 ‘가요 외교’
1999년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의 방한 당시 김종필 총리 주최로 신라호텔 영빈관 만찬 공연에 선 건 “대한의 딸로서 자랑스러웠던 순간”이었다고 했다. 당시 일본의 유명 가요 ‘항도 13번지(미나토마치 주삼반지)’를 부르며 마이크를 오부치 총리에게 넘겼는데, “같이 따라 부르며 분위기가 잘 풀렸다”고 했다. 다음 날 이 장면이 ‘가요 외교’로 불리며 “조선일보 등 신문에 크게 실려 무척 기뻤다”고 했다. “김종필 총리가 제 팬이라 성사된 무대였는데, 일본 활동 경험을 살려 가져간 선곡이었죠. 후에 김 총리가 오부치 총리에게 물으니 이 공연이 제일 좋았다고 해서 ‘다시 오면 또 들려주겠다’ 했대요. 그런데 이듬해 오부치 총리가 세상을 떠났죠.”
하춘화는 그때의 기사가 담긴 아버지의 대중음악 기사 스크랩북과 수집품을 토대로 2019년 전남 영암에 ‘한국트로트가요센터’를 열었다. 이난영, 남인수, 고복수 등 1세대 가수들의 활동부터 한국 대중가요사의 상세한 기록들을 “신문지 잉크가 날아갈 수 있다며 일본까지 가 모든 기사를 필름 제본해 소가죽 커버를 씌운” 스크랩북이다. 누적 기부액만 200억원이 넘는 하춘화의 남은 가수 생활 목표도 이 트로트 박물관을 거점 삼아 ‘국내 가요사 연구 아카데미 사업’을 펼치는 것. “아버지가 고향인 전남 영암에 박물관이 개관하기 두 달 전, 101세 나이로 돌아가신 게 참 마음 아팠어요. ‘전쟁이 나도 땅에 묻을 귀한 기록’이라며 소중하게 캐오신 대중음악사를 귀하게 연구하고 싶습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럼프 2기 앞두고…美, TSMC에 9조2000억원 보조금 확정
- 러 반정부 세력 견제하려...강제수용소 박물관 폐쇄
- 한국야구, 일본에 3대6 역전패… 프리미어12 예선 탈락 위기
- 서해안고속도로 팔탄 분기점 인근 5중 추돌 사고…1명 숨지고 2명 다쳐
- 동덕여대 “피해액 최대 54억”… 총학 “돈으로 겁박말라”
- 연기자로 美 OTT 데뷔...리사, 특급 배우들과 ‘할리우드 이슈’ 표지에
- [전문] “민의 왜곡, 죄책 가볍지 않다” 이재명 1심 판결 요지
- 5년만에 다시 설산으로... ‘스키 여제’ 린지 본 복귀
- 한 몸처럼 움직인 홍명보호... 상대 수비진 키까지 계산했다
- 尹, 사과 회견 이후 지지율 20%대 회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