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고에서 찾아낸 유물이야기] <78> 초량화관지도(草梁和館之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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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부산의 역사를 말할 때 주로 등장하는 주제가 왜관(倭館)이다.
이처럼 초량왜관은 조선 후기 부산의 왜관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 존속했다.
왜관과 성신당(誠信堂), 초량객사(草梁客舍) 등 왜관 내외의 건물 모습과 선창에 정박해 있는 선박, 말이 뛰어노는 영도, 왜관 내 일본인과 조선인 등 주변 풍경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조선 후기 초량왜관에서 그랬던 것처럼 부산이 교류의 장으로서 전 세계인들의 무대가 될 수 있기를 다시 한번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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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부산의 역사를 말할 때 주로 등장하는 주제가 왜관(倭館)이다. 왜관은 일본인의 거주 공간으로, 조선과 일본 간의 외교와 무역이 이루어진 장소였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선사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경제·문화에 걸친 모든 영역에서 교류를 이어왔다. 특히 조선시대 이후에는 부산에 왜관이란 특정한 공간을 지정하고 이를 운영하기 위한 다양한 제도들이 만들어졌다.
1407년(태종 7) 조선과 무역을 하기 위해 조선으로 건너오는 흥리왜선(興利倭船, 일본 무역선)의 정박 장소를 제포(내이포)와 부산포 두 곳으로 제한, 지정한 것이 왜관의 시작이다. 그리고 1426년(세종 8) 염포가 추가 지정되면서 삼포왜관 체제가 마련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영도의 절영도왜관, 동구청 부근의 두모포왜관을 거쳐 1678년 4월 이전한 용두산공원 부근의 초량왜관은 1876년(고종 13)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체결 때까지 존재했다. 이처럼 초량왜관은 조선 후기 부산의 왜관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 존속했다. 약 200년간 조선과 일본의 외교와 무역이 이루어진 곳이었으며, 1876년 근대 개항 후 일본 전관거류지(專管居留地)가 들어서면서 근대 문화와 문물이 유입되는 등 부산을 대표하는 신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초량왜관의 경관을 그린 그림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부산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초량화관지도(草梁和館之圖)’는 7미터가 넘는 긴 두루마리 그림으로 다른 초량왜관 그림과는 형태가 다르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부산포초량화관지도(작자미상, 18세기)’와 유사한 구도이지만 그림 상단의 영도와 적기의 윗부분, 오륙도가 보이지 않고 서관 오른쪽 평원의 매사냥 부분도 생략되어 있다. 또한, ‘초량화관지도’는 그림의 끝부분에 ‘草梁和館之圖 大正八年七月九日寫 (原圖宗家) 武田勝藏’라고 적혀있어 1919년 7월 9일에 쓰시마 종가 소장의 원본을 모사한 작품이며 소장자는 다케다 카츠武田勝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은 초량왜관의 뒤쪽에서 내려다 보는 방법으로 그렸다. 그림 하단은 오른쪽 초량왜관에서 왼쪽의 초량객사까지 이어지고 상단은 송도 해안부터 두모포까지 그려져 있다. 왜관과 성신당(誠信堂), 초량객사(草梁客舍) 등 왜관 내외의 건물 모습과 선창에 정박해 있는 선박, 말이 뛰어노는 영도, 왜관 내 일본인과 조선인 등 주변 풍경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당시 대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초량왜관의 모습과 인근 지형을 현재와 비교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이다.
2023 부산세계박람회 유치 홍보와 함께 부산의 북항을 포함한 원도심이 주목받고 있다. 조선 후기 초량왜관에서 그랬던 것처럼 부산이 교류의 장으로서 전 세계인들의 무대가 될 수 있기를 다시 한번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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