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교통사고처럼 올 수 있는데…‘9·19 합의’ 깨려는 윤석열 정부
지방소멸과 인구소멸은 대한민국의 존망을 결정지을 위기다. 또한 이 둘은 ‘연결된 위기’다. 지방 청년들이 서울로 집중하면서 출생률이 급감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 세대 안에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우리는 2050년 이후 착실하게 소멸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소멸 위기 지역에서 인구가 다시 늘어나지 않고 합계출산율이 0.5 이하 임계점 아래로 내려가면, 우리는 다시 회복될 수 없다. 사람이 서서히 늙어서 죽듯이, 대한민국도 그렇게 고령화의 길을 걷다가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그래도 이런 소멸은 꽤 안정적이다. 예비된 노년과 죽음을 차분히 맞이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안정적 소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처럼 우리를 덮치는 소멸도 있다. 전쟁이다.
얄타체제 해체가 전쟁 불러
세계적으로 전쟁은 저개발국가들에서 권력이나 경제적 이해관계를 두고 내전이 벌어지거나, 누적된 종교적·인종적 갈등이 우발적 테러 등으로 확산하는 경우처럼 예외적인 일이었다. 모든 사람이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는 첨단의 시대에 대규모 재래식 전쟁이 문명의 한복판에서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어떨까?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양상은 전혀 다를 것이다. 국토 면적과 인구, 재래식 무기의 질과 양, 핵무기 사용 가능성으로 볼 때, 어떤 식이든 전쟁이 일어난다면 한반도는 한 줌의 재가 될 것이다. 과연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
사회학자 백승욱은 저서 <연결된 위기>에서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말한다. 백승욱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원인을 미-중 신냉전이 아닌 ‘얄타체제 해체’라고 본다. 우리 국민이 한반도 신탁통치가 처음 논의된 얄타회담으로 아는 바로 그 사건에서 시작한 체제다.
1945년 2월 미국, 영국, 소련 3국의 수장인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이 모여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질서를 논의했다. 이렇게 시작한 얄타체제는 미국이 소련을 파트너 삼아 탈제국주의·탈식민지 시대에 새롭게 나타난 국민국가들의 독립과 안전을 보장하고 강대국 간 전쟁을 억제하려는 구상의 실현이었다. 물론 그렇게 아름다운 이상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그전까지 유럽에 있던 세계 패권을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장악했고, 그 헤게모니를 지속하기 위한 국제 전략이 필요했다.
이는 실질적으로 미국 일극 체제이면서, 형식적으로는 유엔을 통한 다자주의가 골자다. 이 체제에서 미국·영국·프랑스·중국·소련 5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들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강대국 간 비참한 전쟁인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여러 강자 중 하나가 그 힘을 발휘하기 어렵도록 동시에 상호 견제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특히 압도적 무력을 가진 강대국이 인근 영토를 침략하고 싶은 유혹을 방지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 체제는 미국이 예상치 못했던 유럽에서 소련의 급속한 성장,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한국전쟁 발발로 미-소 대결을 통한 ‘냉전’이라는 변형태를 갖게 됐지만, 기본적으로 얄타체제의 근간은 유지됐다. ‘열전’이 아닌 ‘냉전’이라는 말 자체가, 2차 세계대전 이후 70년 동안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강대국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전쟁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수의 인류가 ‘평화’를 상시적인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 기반 위에서 미국이 주도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무럭무럭 자라났다.
대만해협 분쟁과 한반도 위기가 동시에?
백승욱은 이 체제가 붕괴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좁게는 독일 통일과 소련의 해체 같은 사건들이 체제 붕괴의 시발점이 되었고, 더 넓게는 미국 단일 패권의 약화와 평화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적 발전 양식의 한계가 원인으로 꼽힌다. 어떤 이유로든 얄타체제가 무너진다면, 그것은 세계질서가 1·2차 세계대전 이전의 ‘야만적’ 상황으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강대국들의 힘의 경쟁을 제어할 수단이 사라지고, ‘제국’주의적 본성이 세계 곳곳에서 충돌하는 것이다.
백승욱이 이 책을 쓸 때까지는 아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라는 이변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서구 세계에서 또 다른 전쟁이 쉽사리 벌어지리라고 예측하기 어려운 때였다. 그러나 전쟁은 또 일어났다. 김종대 전 의원이 얼마 전 <한겨레> 기고글에서 말한 것처럼 ‘전쟁이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해 하루에 수백 명이 목숨을 잃고 있다. 선제공격한 하마스가 민간인을 표적으로 삼았고, 보복에 나선 이스라엘도 민간인 거주 지역에 거리낌 없이 폭탄을 쏟아붓는다. 전쟁과 관련한 여러 국제규약은 휴지 조각이 됐고, 어떤 강대국도 이 상황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
백승욱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중국의 대만 위협, 북한의 핵도발이 서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중국이 얄타체제가 무력화됐다고 판단한다면, 제국적 질서가 부활하게 된다. 다시 열린 제국의 시대에 중국의 첫 목표는 대만이다. 러시아가 과거 소련의 영토였던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쟁을 ‘특별군사작전’과 ‘내정의 연장’이라 했듯이, 중국도 대만 문제를 ‘국내 문제’로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대만해협에서 분쟁이 일어날 경우, 한반도에서 동시적 위기가 발생하는 것이 중국에 대단히 유리하다. 대만해협과 한반도의 위기 발생 순서는 필요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 그래서 한-중 수교 이후 오랫동안 유지된 중국의 한반도 비핵화 원칙이 사실상 포기됐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 상황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러시아를 방문해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만났다. 김정은은 정상회담 머리발언에서 “러시아는 주권 수호를 위해 성스러운 전투를 벌이고 있다. 북한은 러시아가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데 항상 함께하겠다”고 말했다. 푸틴은 ‘러시아가 북한의 인공위성 개발을 도울 것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그래서 이곳에 왔다. 북한의 지도자는 로켓 기술에 큰 관심을 보인다”고 말했다. 북한이 핵무기를 장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최종 관문인 대기권 재진입 기술을 러시아에서 전수할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김정은은 ‘유리 가가린’ 항공기 공장을 방문해 러시아의 주력 전투기인 수호이(Su)-35에 큰 관심을 보였다. 김정은은 5세대 스텔스 전투기인 수호이-57의 조립 공정도 살펴봤다. 러시아가 미국 공군 F-22 랩터에 대항하기 위해 개발한 기종으로 레이더에 잘 포착되지 않는 스텔스 기능을 갖췄고, 2020년 12월 실전 배치도 됐다.
러시아가 로켓 기술과 방공망을 제공한다면?
김정은이 최신 로켓 기술과 최신예 전투기를 확인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북-러 정상회담 직전 북한은 전술핵공격잠수함 김군옥영웅함을 자체 건조했다고 밝히고, 김정은이 직접 진수식에 참여했다. 김정은은 “핵무기를 장착하면 그것이 핵잠수함”이라고 말했다. 물론 많은 전문가는 이 잠수함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북한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이 기술적으로 불완전하고 무엇보다 구형 디젤 잠수함이기 때문에 소음이 크고 잠항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미 해군과 공군에 쉽게 탐지되고 실질적인 작전능력은 거의 없다는 지적이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러시아가 로켓 기술과 방공망을 제공한다면 어떻게 될까? 한·미 공군이 탐지해도 그 지역이 북한 동해상이고 수호이 전투기가 잠수함 상공을 엄호한다면 말이다. 북-러 정상회담에서는 북·러 혹은 북·중·러 합동군사훈련 가능성이 언급됐고, 훈련 실시 가능성도 큰 것으로 전문가들은 본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이에 대항하는 한·미·일 합동군사훈련이 동해상에서 동시에 전개될 수밖에 없다. 일본 자위대의 이지스함이 독도 앞바다에 진출하는 상황이 현실이 되는 것이다. 여섯 군사강대국이 모인 상황에서 북한 잠수함이 탄도미사일 발사구를 열고, 한국과 일본의 이지스함이 이를 포착해 대함 미사일 발사 준비를 하고, 이를 다시 러시아의 수호이-35 전투기가 포착하고, 한·미의 F-15, F-22 전투기가 수호이를 미사일 ‘락온’(조준)하는 상태가 된다면, 이것은 전쟁의 시작이다.
백승욱은 <연결된 위기>의 ‘한반도 핵위기의 극단적 시나리오’라는 작은 항목에서 그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남북한 사이 공중전 중심의 국지적 위기가 고조되고, 남북한 중간지대가 분쟁지역의 특징을 띠게 되며, 이 과정에서 북한의 전투기가 연이어 격추된다. 북한이 남한의 전투기 발진 기지인 남한의 공군기지를 대상으로 제한적 전술핵을 발사한다. 동시에 북한은 미국이 공격하면 미국과 서울에 전략핵을 쏘겠다고 위협한다.” 이것은 소멸이다.
최후의 보루 ‘9·19 남북 군사합의’마저…
신원식 신임 국방부 장관은 ‘9·19 남북 군사합의’를 최대한 빨리 효력 정지하겠다고 밝혔다. 군사합의의 핵심 내용은 우발적 무력충돌을 막기 위해 군사력 공백 구간을 설정한 것이다. 현재 남북관계가 악화하면서 많은 합의사항이 무력화됐지만, 그나마 마지막으로 작동하는 것이 ‘9·19 합의’다. 합의 이후, 북한의 일부 도발 행위가 있었지만 과거처럼 무력충돌로는 가지 않았고, 비무장지대에서 전투비행과 군사력 투입도 일어나지 않았다. 합의가 무효화되면, 남북 사이 긴장 고조가 곧바로 국지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윤석열 정부는 ‘한반도의 전쟁을 막겠다’가 아니라 ‘도발에 응징, 보복하겠다’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이처럼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는 과연 교통사고 같은 우발적 소멸을 막을 준비를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이관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박사)
*소멸 직전의 정치: 2024년 4월10일 총선일을 디데이 삼아, 한국 정치에서 ‘희망’을 찾아보려는 칼럼입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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