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 R&D 예산과 사과
1980년대 유년기를 보낸 이들에게는 한 해외 드라마 방영을 오매불망 기다린 추억이 있을 것이다. 바로 <전격 Z작전> 얘기다. 이 드라마의 줄거리는 전직 형사인 주인공이 악당들을 찾아 준엄한 심판을 내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주인공과 함께하는 동료는 인간이 아니다. 자동차 ‘키트’다.
스포츠카인 키트는 단순한 자동차가 아니다. 인공지능(AI)이 장착됐다. 사람이 운전대를 잡지 않아도 목적지까지 알아서 달린다. 특히 놀라운 것은 ‘말’을 한다는 점이다. “오늘 날씨 알려줘” 같은 물음에 답하는 수준이 아니다. 악당을 잡을 방법을 두고 주인공과 상의를 한다.
현재 자율주행차를 현실로 옮기는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따지고 보면 키트를 보면서 자라온 세대다. 1980~1990년대는 기술 혁신이 일상인 때였다. 개인 컴퓨터와 인터넷이 보급되고, 바지 주머니에 손바닥만 한 휴대전화가 들어간 것도 이 시점부터다. 이때 자란 아이들의 장래 희망 1순위가 과학자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아이들의 장래 희망 1순위는 과학자가 아니다. 공부 잘하는 이공계 학생이라면 첫 번째 진학 고려 대상이 의대인 시대다. 개인의 행복을 과학자가 돼서는 이루기 어렵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지난 8월 내년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이 대거 삭감되자 과학계는 이 점을 걱정했다. 안 그래도 사회적 인식이 예전 같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가 과학계를 홀대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미래 세대에게 어떤 신호를 줄지 우려하는 시선이었다. 이런 우려는 이례적으로 과학계가 집단행동에 나서는 동력이 됐다. 지난 9월 이후 이공계 대학생과 대학원생, 교수, 정부출연연구기관 연구원 등이 R&D 예산 삭감의 부당성을 연이어 성토했다.
그래서일까. 13일 국민의힘은 일부 R&D 예산을 복원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과학계에 ‘카르텔’이 있다며 날을 세웠던 상황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이 시점에 불현듯 드는 의문이 하나 있다. 국민의힘은 과학계에 카르텔이 있다는 자신들의 기존 주장이 잘못됐다는 점을 인정하고 R&D 예산 일부를 복원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예산 복원과 동시에 과학자들에게 사과를 해야 옳다. 묵묵히 연구에 매진한 과학자들을 카르텔이라고 매도해놓고, 귀찮은 민원을 해결해주듯 예산 일부를 올려주고 모른 척하는 태도는 온당치 않다. 국민에게도 마찬가지다.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내놓아 국민에게 혼란을 준 것이라면 역시 사과해야 한다.
다른 가능성도 있다. 지금도 국민의힘은 과학계에 카르텔이 있다고 믿지만, 과학계 반발로 인해 예산을 일부 복원했다는 가정이다. 만약 그렇다면 국민 앞에 명확히 향후 계획을 내놔야 한다. 카르텔을 언제 어떻게 정리할지 말이다. 하지만 지금껏 제시된 사례를 보면 비효율적 연구 예산 집행은 있어도 과학자들이 카르텔을 결성한 경우는 나타나지 않았다.
과학계를 카르텔이 있는 곳으로 보는 시선의 시작은 지난 6월 윤석열 대통령이 주재한 국가재정전략회의였다. 당시 윤 대통령은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 발언 뒤 여권에서는 카르텔이란 표현이 공공연히 나왔다. 지금 윤 대통령의 입장과 생각은 무엇일지 궁금하다.
이정호 산업부 차장 run@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무료 공영주차장 알박기 차량에 ‘이것’ 했더니 사라졌다
- ‘블랙리스트’ 조윤선 서울시향 이사 위촉에 문화예술계 등 반발
- 최동석 ‘성폭행 혐의’ 불입건 종결···박지윤 “필요할 경우 직접 신고”
- 미납 과태료 전국 1위는 ‘속도위반 2만번’…16억원 안 내고 ‘씽씽’
- 고작 10만원 때문에…운전자 살해 후 차량 불태우고 달아난 40대
- 평화의 소녀상 모욕한 미국 유튜버, 편의점 난동 부려 검찰 송치
- “내가 죽으면 보험금을 XX에게”···보험금청구권 신탁 내일부터 시행
- 경북 구미서 전 여친 살해한 30대…경찰 “신상공개 검토”
- 가톨릭대 교수들 “윤 대통령, 직 수행할 자격 없어” 시국선언
- 김종인 “윤 대통령, 국정감각 전혀 없어” 혹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