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스라엘이 추구할 공존의 지혜

기자 2023. 11. 13.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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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 전쟁이 한 달 이상 지속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선택을 역사와 종교의 진리로 성찰해본다.

이스라엘 민족은 정체성이 강하다. 선민의식을 표출하고 독주한다. 아브라함 자손인 유대민족이 이스라엘로 이주한 동기를 반추하면 이해하기 어렵다. 그들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을 중재하는 메신저 역할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 유대교와 기독교는 오랫동안 공존했다. 하지만 유대국가가 근본주의를 강화하고 시온주의를 갑자기 실행하자 분쟁이 발생했다.

유대가 경험한 수난의 역사는 모세의 출애굽에서 시작됐다. 이집트를 떠나 사막을 떠돌다 여호수아가 예리코 공략에 성공하면서 가나안에 진입했다. 당시 유대인 리더 다윗과 팔레스타인 장군 골리앗의 역사적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의 서막이다.

신바빌로니아의 침입으로 바빌론유수에도 직면했다. 노역에 시달리며 시온으로의 귀향을 고대한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키루스왕이 난공불락의 요새 바빌론을 함락시킨 다음에야 풀려났다. 키루스를 칭송한 유대인들은 조로아스터교와 교류하며 유일신교를 확립했다.

헬레니즘 제국의 통치로 400년 암흑기가 시작됐다. 개방적 문화의 영향으로 우상과 주술도 약화됐다. 유대 보수파는 혼혈인 사마리아인과의 교류를 경계했다. 반면 예수는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기존 체제의 혁신을 추구했다.

로마는 수탈에 항거한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성전을 파괴하고 요새도 점령했다. 로마와 이슬람의 지배하에 교류가 촉진되자 유대인은 상인 기질을 발휘했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교역 통제로 홍해가 붐비자 아라비아 상인처럼 무역에도 종사했다.

유대교는 유랑 와중에 성전과 제사장 중심의 중앙집권적 종교에서 회당과 랍비 중심의 자치분권적 종교로 진화했다. 종교개혁으로 구교와 신교가 싸우는 가운데서도 시너고그는 공공의 적으로 치부됐다. 1881년 러시아가 유대인을 핍박하고 1894년 프랑스가 드레퓌스를 기소하자 시온주의가 득세했다. 유엔에서 팔레스타인 분할안이 통과되고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하자 아랍 진영은 전쟁으로 응수했다. 1993년 백악관에서 라빈 총리와 아라파트 의장이 오슬로 협정을 체결했다. 이스라엘군이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서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허용한다는 타협안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정부의 협치 정신 부족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무능으로 협정 완수는 부진했다.

가자지구는 출입이 제한된 사실상 게토다. 제4차 중동전쟁 이후 50년간 누적된 분노가 하마스의 기습을 촉발했다. 지상전이 개시되면서 10배 보복으로 치닫는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이 늘고 있다. 유대인의 시련은 역사의 교훈과 성경의 뜻처럼 사랑으로 승화돼야 한다. 민족주의라는 투쟁의 시대를 마감하고 보편주의라는 공존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김정렬 대구대 자치경찰학전공 교수

김정렬 대구대 자치경찰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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