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백의 사연史淵] 한반도 문제 해결 주체의 아쉬운 상상력

신주백 역사학자·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2023. 11. 1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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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전 독립운동 세력은 널리 분산·고립되었다. 이에 비해 열강은 한반도 문제를 자기 이해관계에 맞게 풀어가기 위한 ‘관리’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주체와 열강의 구성 방식 그리고 관리와 해결이라는 주체와 열강 사이의 관계는 지금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자기 안의 모습과 한계를 짚어내려는 주체의 노력이 부족한 풍토는 그것의 다른 표현이다. 이리되면 우리는 당분간 계속 관리의 대상에 머물지 않을까

세계가 신냉전적 다극 질서로 변해가고 있다. 냉전 질서가 확고했던 시절처럼 이념으로 편을 가르지 않고, 다른 편과의 군사 대결도 전제하지 않지만, 진영 간 안보 대립이 존재하는 시대 말이다. 그러면서 진영을 넘나드는 협력과 경쟁도 병행되고 있다. 국제사회는 적대관계가 항존하지 않고 선택과 배제가 동시에 작동하지 않는 복합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축복의 기회일 수도 있다. 특히 주변 4강의 협력을 바탕으로 분단 문제를 풀어야 하는 대한민국으로서는 더더욱 그렇다. 복합 시대는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데 참여하는 주체로 나설 공간을 확보하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체가 관리의 대상에 머무르면 여백을 만들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1945년 8월 전후의 경험도 그중 하나였다.

■ 임정 승인, 미국과의 확인되는 간극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일본군이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연합국의 전투 단위로 자신을 위치 지으며 일본과의 전쟁을 즉각 선포했다. 이때부터 임정은 한국광복군이 참전하고 임시정부를 승인받는 데 초점을 모았다.

임정은 1942년 1월 중국 정부에 승인을 요청했다. 쑨원의 아들로 입법원 원장인 쑨커(孫科) 등도 이를 지지했다. 중국도 ‘지체 없이’ 임정을 승인하기로 했다고 주중 미국대사에게 통보했다.

하지만 중국은 이를 공식 발표하지 못했다. 소·일전쟁 직전에 승인하는 쪽이 소련을 견제하는 데 적절하다는 내부 의견이 있는 데다 미국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동향을 보고받은 미 국무부는 1942년 4월 주중대사에게 한국인의 어떤 단체도 승인할 의사가 없으며, 한국 독립을 유보할 방침이라고 명확히 전달했다. 왜냐하면 임정을 승인하는 순간 소련은 자신과 이념적으로 가까운 어떤 한인단체를 지원할 가능성이 있고, 그리하면 대일연합전선 구축과 전후 안전보장 계획에 지장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미국의 입장은 경성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던 윌리엄 랭던의 1942년 2월 의견 이래 확고했다. 그는 어떤 한인단체도 임시정부로 승인하지 말아야 하며, 자치능력을 결여한 한국을 “적어도 한 세대 동안” 원조하고 보호·지도해야 한다고 보았다. 미국 정부는 그해 여름 연합국의 국제공동관리를 최종 결정했다. 미국 입장에서 국제공동관리론은 임정 등 한인단체의 승인 문제를 비껴가고 독립을 유보함으로써 중·소를 견제하면서 우월한 발언권을 확보하는 방안이었다.

국제공동관리 방안이 언론에 보도되자 임정은 긴장했다. 임정은 그 방침이 무엇을 함의하는지 알아보려 노력했고, 1943년 7월 장제스와의 면담 때 한국 독립을 지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장제스는 김구 등 면담자에게 지지 의사를 표하며, 독립운동계의 단결통일과 공작 방면에서 “뭔가 내세울 만한 성과”를 요구했다. 이후 중국의 고위인사도 비슷한 요구, 곧 1944년 말 또는 1945년 초에 전쟁이 끝날 것 같은데 “전세 변화에 맞추어 한국 혁명운동도 속도를 더해야” 한다면서 한국에서 단계적이고 구체적이며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방안을 제출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상상력을 동반해야 가능한 방안은 끝내 마련되지 못했다.

미국의 방안은 미·영·중 정상이 합의한 카이로선언(1943년 11월27일)으로 드러났다. 직후 열린 테헤란회담에서도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한국인이 자치능력을 습득할 때까지 40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하자고 확인했다.

카이로회담 내용이 알려지면서 임정의 관심은 “ ‘적절한 시기에(in due course)’의 해석”에 모아졌다. 김구는 이 표현이 매우 불합리하다면서 일본이 붕괴하는 순간 독립을 이루지 못하면 민족자결 원칙에 따라 “역사적인 투쟁을 계속”하겠다며 회담을 비판했다. 그의 발언은 임정에 예속된 가운데 “각 시정기관의 자주 운영”을 내세운 1945년 12월31일자 ‘국자(國字) 제1호’로 구체화했다. 이처럼 전후 한국이 즉각 독립해야 한다는 입장은 국제공동관리의 구체적 실체와 국제정치적 함의를 제대로 짚어볼 여지를 막았을 수도 있다.

■ 좁히지 못해 확대된 간극들, 그것의 현재

그래서일까. 비록 전황에 따라 새 이유를 추가했지만, 임정은 여전히 외교로 승인을 획득하려 했다. 임정은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와 소련이 후원하는 국내 단체, 곧 1944년 7월 사회주의자로 구성된 루블린민족해방위원회처럼 서로 대립된 기구가 병존하지 못하도록 미리 충분한 원조를 받아 국내외 조직역량을 강화할 수 있게 해달라고 중국 정부에 요구했다. 또 소련군 소속 한인 10만명이 먼저 한국에 가면 문제가 복잡해진다고도 했다.

1945년에 들어서도 폴란드 문제는 독립운동가들의 관심사였다. 2월에 창당한 신한민주당은 “런던에 있는 폴란드 망명정부에 닥친 사건은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일의 운명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라면서 뚜렷한 성과와 업적을 당장 거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정은 비판에 답하듯 4월17일 중국 주재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와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훈련 및 독수리작전에 관해 정식 협정을 체결했다. 미군은 첫 공동작전을 약속하기 이전인 4월1일부터 오키나와전투를 치열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이 협정은 오키나와 점령 이후 미군 진로와 연관된 준비였던 것이다.

이승만도 미 국무장관대리에게 연해주의 ‘조선해방위원회’가 소련군과 함께 한반도에 진주하면 문제가 어려워진다며 임정 승인을 서두르라고 편지를 보냈다. 이에 국무부 지시로 모스크바 주재 대사관에서 조사했지만 그런 조직은 없었다. 그런데 소련은 5월 들어 독일이 항복하자 동북항일연군 교도려 소속 조선인들로 새조선 건설을 준비한다는 조선공작단위원회를 결성했다. 몇달 뒤 이들은 북한에 들어와 권력을 장악해갔다. 아무튼 1944년 하반기 즈음부터 임정과 이승만은 반소(反蘇)의 논리를 임정 승인 이유로 제시하며 미국을 설득했다.

하지만 다른 흐름이 더 분명해졌다. 1944년 10월 소련은 대일전에 참전하며 작전 범위에 함경도 항구도 포함하기로 미국과 합의했다. 소련군이 한반도 일부에 진주해도 된다는 것이다. 이듬해 2월 얄타회담 때도 미·영·소는 소련군 참전을 합의했다. 이때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한반도에 외국군 없이 20~30년간 다국적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약속했다. 6월에도 국무부는 카이로선언에서 말하는 ‘적당한 시기’가 필요하며, 어떤 한인단체도 자격요건을 갖추지 않아 승인할 수 없고, 임정 승인이 장차 수립될 정부의 형태와 인적 구성에 참여할 주민의 선택권을 제약한다고 밝혔다. 이렇듯 미국은 1942년 이래 일관된 방향, 곧 소련과 협력해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고 전후 질서를 짜며 전략적 이익을 확보하려고 했다.

그럼 소련은 어땠을까. 6월 말까지도 침묵으로 일관한 냉담 그 자체였다. 임정 이념이 자신들과 다른 데다 서둘러 입장을 정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소련은 6월28일 대일전략을 확정할 때 한반도가 자신들을 공격하는 전초기지여서는 절대 안 된다며 반드시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임정 및 미국과의 접점이자 좁힐 수 없는 원칙이었다.

1945년 8월부터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연합국은 한반도 문제 처리를 결론 내지 못한 채 분할점령을 긴급히 잠정 합의했다. 이후 한반도 문제는 소련군이 일방적으로 점령한 폴란드와 다른 전후의 시작과 그 끝인 분단체제의 등장으로 귀결되었다.

해방 직전 독립운동 세력은 널리 분산·고립되었다. 각자 역량을 확장적으로 구체화하는 전략과 실천도 미약했지만 국제공동관리와 연계하려는 움직임도 매우 부족했다. 결국 독립운동 세력은 해방 직전까지 열강 간 합의와 협력에 미세한 균열도 내지 못했으며 그럴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에 비해 압도적 규정력을 가진 열강은 한반도 문제를 자기 이해관계에 맞게 풀어가기 위한 ‘관리’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자기 이해관계와 연관된 국제관계를 ‘관리’하는 차원에서 ‘해결’하려 했다.

주체와 열강의 구성 방식, 그리고 관리와 해결이라는 주체와 열강 사이 관계는 지금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자기 안의 모습과 한계를 짚어내려는 주체의 노력이 부족한 풍토는 그것의 다른 표현이다. 이리되면 우리는 당분간 계속 관리의 대상에 머물지 않을까?

■신주백



역사학자.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한국근현대사를 동아시아사에 접목하여 연구하며 현재를 고민하고 있다. 독립운동사 연구에서 출발하여 최근에는 <한국역사학의 전환> <일본군의 한반도 침략과 일본의 제국운영> 등을 간행했다. 저서 <역사화해와 동아시아형 미래만들기>, 이외에 공저로 <용산기지의 역사> <분단의 두 얼굴>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등이 있다.

신주백 역사학자·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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