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이 된 독일 언론…“지역언론=민주주의”
KBS창원방송총국은 한국언론진흥재단과 함께 지방 소멸 위기 속 지역 언론의 미래를 고민하는 기획 취재를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콘텐츠가 쏟아지면서 지역방송, 지역신문을 보는 시청자와 독자가 줄어들고 있는 위기를 독일 언론은 어떻게 극복하고 있을까요?
취재기자가 직접 독일의 지역 언론사들을 방문해 그 해법을 찾아봤습니다.
■ 모금으로 온라인 언론사 창립, “지역 뉴스 다양성 필수”
독일 뒤셀도르프에 있는 흰 벽돌 건물.
겉보기에는 가정집처럼 평범하게 생긴 이 건물에 지역 온라인 언론사 ‘피어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피어눌’은 2년 전, 뒤셀도르프에 유일하게 남은 신문사 출신 기자 등 4명이 만들었습니다.
‘피어눌’은 독일어로 숫자 ‘40’이라는 뜻으로, 언론사의 우편번호 앞 2자리에서 따왔는데요.
이들이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모금을 통해 소규모 온라인 언론사를 만든 이유, 바로 뉴스의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이들은 아침에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을 소개하는 생활 속 기사뿐만 아니라 지역의 대중교통 체계와 뒤셀도르프 공항을 더 좋게 바꾸는 방법 등 지역 밀착형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
‘피어눌’을 만든 한스 옹켈바흐 대표는 “매일 기계적으로 기사를 보도해야 하는 일간지의 경우 기사가 심층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지만, 피어눌의 보도는 늦더라도 더 많은 정보를 담아 기사를 보도한다”고 말했습니다.
옹켈바흐 대표는 실제로 심층적인 기사를 본 독자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일간지보다 더 자세한 내용을 전달한다며 자부심을 드러냈습니다.
■ ‘이웃’이 된 언론…“지역민이 원하는 뉴스 만들어야”
이들이 기사를 보도하기 위한 과정이 굉장히 독특합니다.
바로 독자이자 후원자인 지역민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한다는 건데요.
‘피어눌’ 소속 기자들은 주민과 정기적인 대담이나 음악회를 열고, ‘범죄 팟캐스트’를 듣는 청취자들과 범죄 현장을 함께 방문하는 등 지역민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합니다.
‘피어눌’은 창립 당시 유료 독자가 3백여 명에 불과했는데요.
옹켈바흐 대표는 기자들의 적극적인 소통 덕분에 최근 유료 독자가 만 명을 넘어섰다고 밝혔습니다.
옹켈바흐 대표는 “지역민들이 뒤셀도르프 지역에서 발생한 범죄 현장을 청취자들과 함께 돌아보는 행사를 가장 좋아한다”며, “1930년대 활동했던 연쇄살인범을 주제로 오픈 팟캐스트를 열었더니, 3백여 석이 모두 팔렸다”고 말했습니다.
피어눌 소속 기자들은 지역 언론의 경우, 지역민과 더 적극적으로 소통해 지역민들이 어떤 뉴스를 만들어주길 원하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요.
이렇게 지역민들과 소통을 중요시하는 이유, 기사에 지역민들의 입장을 충실히 반영하는 게 지역 언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한 걸음 더 나아가 해결책까지”
독일 지역 언론은 단순히 지역 문제점에 대해 보도하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해결책까지 제시하는 보도를 중요시하는데요.
이를 ‘컨스트럭티브 저널리즘(Constructive Journalism), 건설적 저널리즘’이라고도 부릅니다.
독일에는 공영 국제방송 ‘도이치벨레’와 민영방송 ‘RTL’, 지역 신문사 ‘라이니쉬 포스트’, 덴마크의 ‘컨스트럭티브 인스티튜트’ 등이 함께 설립한 솔루션 저닐리즘 연구소 ‘본 인스티튜트’가 있습니다.
지난해 만들어진 ‘본 인스티튜트’는 지역 언론사들과 협업해 지역의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본 인스티튜트’는 독일 뒤셀도르프에 있는 신문사 ‘라이니쉬 포스트’와 지난해 6월부터 반년 동안 묀헨글라트바흐 구도심의 재개발에 관한 기사 20여 편을 보도했는데요.
두 기관은 해당 보도에 ‘컨스트럭티브 저널리즘’을 적용해 봤습니다.
기사를 쓰기 위해 두 기관이 무엇보다 먼저 했던 건 지역민들로부터 구도심 재개발에 대한 의견을 듣는 것이었는데요.
이들은 심야 버스 운행처럼 교통 체계를 더 편하게 만들어달라거나 지역에 공공 편의시설을 더 늘려야 한다는 등 다양한 의견을 기사에 담았습니다.
의견을 받는 수준을 넘어 지역민들과 토론회도 열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지역민들로부터 받은 의견에 대해 전문가의 분석도 거쳐 함께 보도했는데요.
그 결과, ‘본 인스티튜트’와 함께 이 보도를 진행했던 ‘라이니쉬 포스트’ 홈페이지의 방문자 수는 이전보다 3배나 늘었습니다.
지역 언론이 지역의 문제점에 대해 지역민들과 소통을 통해 해결책까지 보도하는 방식이 지역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는 뜻인데요.
파울라 뢰슬러 ‘본 인스티튜트’ 소속 기자는 지역 언론이 지역 현안에 대해 중앙 언론보다 더 심층적으로 보도할 수 있어서 가능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앞서 나온 독일 지역 언론들의 사례를 보면, 여러 사람이 특정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의논하는 과정인 ‘숙의 민주주의’가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것을 엿볼 수 있는데요.
빕케 뫼링 도르트문트 공대 저널리즘학과 교수는 지역 언론이 지역 현안을 심층적으로 보도하면,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빕케 교수는 “한 연구에 따르면, 지역 언론이 부족한 지역은 세금이 방만하게 쓰이거나 선거 투표율이 낮게 나타나는 현상이 두드러졌던 게 확인됐다”고 지적했습니다.
■ ‘인공 지능·전문가 대담 공개’…독일도 ‘디지털 전환’ 사활
이처럼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독일 지역 언론도 디지털 시대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독일신문발행인협회 등에 등록된 신문사는 340개 가운데 지역 신문은 306개로 90%에 달하는데요.
이 신문사들 가운데 뒤셀도르프 지역 유일한 일간지인 ‘라이니쉬 포스트’는 매일 신문 20여만 부를 발행합니다.
월 구독료는 60유로로, 한화로 8만 원이 넘는데요.
독일 지역 신문사 가운데 구독자 수가 많은 편에 속하지만, ‘라이니쉬 포스트’도 인터넷에 콘텐츠가 넘쳐나는 디지털 시대에 디지털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라이니쉬 포스트’는 7년 뒤인 2030년까지 유료 구독자의 절반 가량을 디지털 구독자로 채우는 게 목표입니다.
이전엔 신문에 먼저 나온 기사를 신문사 홈페이지에 올렸지만, 지금은 인터넷에 먼저 올린 기사 가운데 일부만 신문에 담고 있을 정도로 디지털 전환에 진심입니다.
이 신문사는 특히, ‘인공 지능’ 기술을 이용한 디지털 전략을 짜고 있는데요.
소속 기자 10여 명이 직접 목소리를 녹음해, ‘인공 지능’을 통해 기자의 목소리로 기사를 읽어주는 ‘오디오 아바타’를 실험하고 올해 말 출시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중국인과 일본인 등을 포함한 지역민들이 조금이라도 더 쉽게 지역 현안을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리츠 되블러 라이니쉬 포스트 편집장은 “디지털 전환에 힘을 쏟으면서도 지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고,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지역 언론의 정체성을 잃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 “디지털 시대가 기회”…지역 언론만의 역할 찾아야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있는 민영 방송사 ‘TV.베를린’도 디지털 콘텐츠 제작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TV.베를린’의 주요 디지털 전략은 바로 유튜브에 전문가들의 인터뷰 영상을 올리는 건데요.
이 방송사는 지역 현안은 물론 난민과 기후 변화, 전쟁 등에 대한 전문가들의 인터뷰를 편집 없이 유튜브에 올립니다.
하루 평균 시청자 수가 7만 명에 달하는 이 방송사는 왜 유튜브에 인터뷰 영상을 집중적으로 올릴까요?
시청자들이 방송을 통해서 전체 영상을 접할 수 없으니, 유튜브에 편집하지 않은 영상을 올려 왜곡 없이 전문가의 의견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한 겁니다.
단순히 영상 조회수를 노린 게 아니라 지역 시청자들이 꾸준히 지역 현안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게 목적입니다.
그런데 두르슨 이기트 ‘TV.베를린’ 편집장은 디지털 퍼스트 시대가 방송사들에게 큰 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기회라고 말했습니다.
두르슨 편집장은 “지역의 소식을 지역민들이 만족할 만큼 전달할 수 있는 건 지역 방송사뿐”이라고 말합니다.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자신의 실생활에 밀접한 지역 현안에 대한 전문가 의견을 접한 지역민들이 다시 TV를 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데요.
지역 현안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는 것처럼 중앙 언론이나 넷플릭스와 같은 OTT 등이 하지 않는 일을 지역 언론만이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 “지역 언론 작동 = 민주주의 강화”
시민들의 정치와 민주주의 교육을 위해 독일 본에 설립된 연방정치교육원(bpb)은 지역 언론이 제대로 작동해야 민주주의도 작동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연방정치교육원은 독일의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기자들을 대상으로 현안에 대한 교육과 포럼을 제공하는 등 지역 언론의 역량 강화에 힘을 쏟는데요.
연방정치교육원의 소통 책임자인 다니엘 크래프트는 나치 시대 이후 독일의 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지역 언론의 쇠퇴를 막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다니엘 책임자는 “가짜 뉴스가 SNS 등을 통해 퍼지는 가운데 지역 언론이 믿을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해야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지역 언론이 줄어 지역 현안에 대한 보도가 없어지는 ‘뉴스 사막화’ 현상과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 ‘뉴스 회피’가 심화 되고 있는 상황인데요.
이런 가운데 독일 지역 언론은 주민들의 이웃이 돼 지역 소식을 전하며 존재 가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관련 기사]
1. ‘40번가의 기적’…핵심은 ‘이웃처럼’
2. ‘인공지능·전문가 대담’…디지털로 돌파구
〈본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주최 ‘KPF 디플로마 로컬저널리즘’ 교육 과정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최진석 기자 (cj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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