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하는 젠더, 폭발하는 몸, 나만이 속삭이는 사랑···동시대 日여성 작가들
내달 10일까지, 일본 현대미술 이끄는 여성 작가 7인 그룹전
일본 에도시대에 유행했던 우키요에(목판화) 미인화에 나올 듯한 여린 선으로 그린 가느다란 인물이 누워 있다. 일본 현대미술가 가시키 도모코의 그림은 일본 전통 회화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림 속 인물은 소녀인지 소년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인물들의 팔다리는 길고 흐르는 듯하며 흘러내리는 듯한 곡선의 몸은 주변 환경과 사물과의 경계가 흐릿해 녹아드는 인상을 풍긴다. 일본 기담을 연상시키는 그림은 젠더의 경계, 인간과 사물의 경계를 흐릿하게 지워 모호하며 유동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가시키 도모코의 그림이 흐려진 경계 사이를 유영하는 신체성을 보여준다면, 가와우치 리카코가 그려내는 신체성은 강렬하다 못해 보는 이를 압도할 것 같다. 가와우치 리카코는 몸에 대해 느끼는 위화감을 음식을 매개로 그려낸다. ‘자몽(Grapefruit)’에 등장하는 몸은 자몽의 과육에 점령당한 듯하며, 폭발할 듯한 역동성을 띤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바디, 러브, 젠더(Body, Love, Gender)’에서는 일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현대미술가인 아오키 료코, 가시키 도모코, 가와우치 리카코, 모리 유코, 무라세 교코, 쇼지 아사미, 요코야마 나미 등 작가 7명의 작품을 통해 동시대 일본 여성 작가들이 인식하고 표현하는 세계를 엿볼 수 있다. 가나아트센터와 일본 도쿄의 모리미술관의 큐레이터 레이코 쓰바키의 협업으로 기획됐다. 지난 10일 가나아트센터에서 작가와 큐레이터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무라세 교코의 작품들은 일러스트를 보는 듯 섬세한 디테일을 표현한 그림과 묽은 색감으로 표현한 연한 색채의 그라데이션이 돋보인다. 무라세 교코는 자신을 투영한 듯한 소녀의 모습과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자연을 경험한 순간을 그려낸다. 신작 ‘발코니’엔 식물을 돌보는 소녀의 모습이 주변의 자연 풍경과 어우러져 섬세하게 그려졌다. 연보라색 톤의 그림은 식물과 자연과 하나가 된 소녀의 모습을 시적인 필치로 그려낸다.
아오키 료코는 다양한 소재의 이미지를 수집하고 재구성해 드로잉, 자수, 설치 등 다양한 매체의 작업을 선보여왔는데, 이번 전시에 눈에 띠는 것은 딸의 옷을 작품으로 재구성한 ‘Heavy Rotation Item’이다. 딸이 어린 시절 입었던 옷의 색채와 패턴을 해체하고 재구성해 작품으로 재창조했다. 아오키 료코는 “못 입게 된 옷을 버리려다 딸 아이의 신체성과 기억을 재구성해 작품으로 만들었다. 추억이 작품을 통해 재탄생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아기자기한 드로잉, 잡지에서 오려낸 문구, 소품들을 스크랩하듯 모아놓은 작품들도 인상적이다.
요코야마 나미는 ‘Love’라는 활자를 회화로 그렸다. 주변 사람들이 직접 손글씨로 쓴 ‘Love’를 네온사인으로 제작한 뒤 이를 다시 사실적 회화로 캔버스에 옮겼다. 요코야마 나미는 “‘러브’는 영어지만 지금 세계의 4분의 1이 영어를 사용한다.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가 쓰는 사람만큼 다양할 것이라 생각하고 그 사람만이 갖고 있는 유일한 언어로서 ‘러브’를 그림에 담아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가족과 친구, 인도에서 만난 택시기사의 손글씨를 바탕으로 만든 회화들은 얼핏 보면 닮았지만 모두 다른 필치로 그려졌다.
신체에 대한 위화감을 음식을 통해 표현한 가와구치 리카코에 이어 쇼지 아사미의 작품은 어둡고 강렬하다. 쇼지 아사미는 아크릴판에 밑그림 없이 즉흥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기법으로 어둠과 질병, 죽음과 부패, 영혼과 빛 등 양면적 주제를 다룬다.
2층 전시장에선 낮은 음조의 기묘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과일의 내부에서 나는 소리다. 모리 유코는 과일에 전극을 삽입해 내부의 수분량에 의해 생성되는 소리를 스피커를 통해 들을 수 있게 했다. 시간이 가며 과일 내 수분이 줄어들면서 소리도 달라진다. 소리를 통해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작품이다.
모리미술관 레이코 쓰바키 큐레이터는 “여성 작가들의 대상이 아닌 주체로서의 신체 표현, 날것 그대로 솔직한 감정의 표출, 젠더에 대한 유연한 정의를 볼 수 있는 전시”라고 말했다. 12월10일까지, 무료.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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