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포럼] 비닐봉투에 흔들리는 國格
"구체적인 감축기준 만들자"
빈국들도 불만 껴안고 규제
한국은 일회용품 규제 연기
韓 선진국 책임 피할수없어
13일 아프리카 케냐에서 전 세계 플라스틱 오염을 종식시키기 위한 국제회의가 개막했다. 유엔 플라스틱협약 총회다. 유엔의 거의 모든 회원국들이 참가할 정도로 규모가 큰 회의다. 각국은 플라스틱 재앙을 해결하기 위해 지난해 처음으로 유엔 협약을 맺고, 내년까지 구체적인 강제조항을 만들기로 한 바 있다.
이번 회의에선 최종 합의로 나아가는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할 전망이다. 각국 정부는 물론 국제기구와 학회, 환경단체들이 주목하는 행사를 며칠 앞두고 한국에서 찬물을 끼얹는 소식이 들려왔다. 일회용품 사용 규제를 연기하거나 없앤 것이다.
환경부는 음식점 내 일회용 종이컵 사용을 금지하지 않고, 편의점과 커피전문점 등에서의 비닐봉투, 플라스틱 빨대 사용도 당분간 단속하지 않기로 했다고 지난 7일 발표했다. 환경부는 아직 규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자영업자에게 부담을 줄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하지만 식당 내 종이컵 사용 금지 등의 방침이 처음 정해진 게 벌써 4년 전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소상공인·자영업자 표심을 살피느라 정부와 여당이 일회용품 사용량 감축 정책을 후퇴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소상공인·자영업자 핑계를 댄다 해도 군색한 건 마찬가지다. 이미 많은 나라들이 정치적 부담에도 일회용품 규제를 도입해 국민 불편을 감수해가며 시행 중이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유럽 국가들뿐만 아니라 우리보다 훨씬 못사는 나라들도 지구의 미래를 위해 인기 없는 규제를 시행하고 있다. 케냐는 2017년부터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비닐봉투 규제를 시작했다. 생산과 유통 소비 전 단계에 강력한 벌금을 매겨 비닐봉투 없는 사회를 만들고 있다. 최빈국 중 하나인 방글라데시도 이미 2002년부터 비닐봉투 규제를 시작했고, 환경오염의 대명사 격인 중국과 인도조차 상하이, 델리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비닐봉투 등 일회용품을 규제하고 있다. 중남미도 마찬가지다. 2018년부터 비닐봉투를 전면 금지한 칠레를 비롯해 20여 개국이 일회용 플라스틱 제품 규제에 관한 입법을 완료하고 시행 중이다.
세계 각국이 플라스틱 일회용품을 규제하는 것은 잘 썩지 않아 토양을 오염시킬 뿐만 아니라 제조 과정에서 다량의 온실가스가 배출되기 때문이다. 환경 이슈면서 동시에 기후변화 이슈인 것이다. 그런데 국민소득 3만달러가 넘는 선진국인 한국이 국민적 합의가 안 됐다, 자영업자에게 부담을 지울 수 없다는 식으로 둘러대며 발을 뺀다면 국제사회가 수긍할 수 있겠나. 집중포화를 맞고 본보기가 되기 십상이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플라스틱 등 석유화학 제품을 4번째로 많이 생산하고, 온실가스를 7번째로 많이 배출하는 나라다. 여러 가지 불편과 불만이 있음에도 선진국으로서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국민을 설득하는 게 정공법이다. 국내 매립지가 수용 한계에 이르고, 개발도상국들은 플라스틱 쓰레기 수입을 속속 금지하고 있어 지금처럼 일회용품 생산·소비 구조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상공인·자영업자에 대해선 규제와 함께 보조금 정책으로 접근할 수 있다. 구매 보조금을 통해 전기차 경쟁력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처럼, 일회용품을 대체하는 생산·유통 기업들에 보조금을 지급한다면 머지않아 자생력을 가진 생태계가 조성될 수 있다.
유엔 플라스틱협약 총회를 앞두고 60여 개국은 이번에 플라스틱 소비와 생산을 억제하기 위한 '구속력 있는 조항'을 만들 것을 촉구했다. 곧이어 이달 말에는 두바이에서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가 열린다. 개도국들 틈에 섞여 슬쩍 지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박만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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