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이코노미스트] 전기요금과 '텍사스 명사수의 오류'
총알자국에 과녁 그리듯이
결과에 이유 끼워맞춘 해석
전력단가 올라도 요금 그대로
근본 원인은 에너지가격 상승
인상필요성 국민에 이해시켜야
심리학에 '텍사스 명사수의 오류'란 용어가 있다. 과녁의 한가운데만 정확하게 맞히는 명사수로 유명해진 한 카우보이가 텍사스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사격 시 총과 함께 페인트도 가지고 갔다. 알고 보니 나무 벽을 향해 임의로 총을 쏜 이후에 과녁을 총알 자국 주위에 그렸던 것이다. 이것이 명사수의 진실이었다.
어떤 사안의 원인과 결과를 합리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에 이유를 끼워 맞춰 해석할 때, 즉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해석할 때 우리는 텍사스 명사수의 오류를 범한다고 얘기한다. 요즘 전기요금을 둘러싼 정치권의 논의를 보면 텍사스 명사수가 자꾸 떠오른다. 한전 대규모 적자의 근본 원인을 한전의 방만경영으로만 몰아가니 말이다. 2018년 한전의 전력 구매단가 kWh당 90.1원은 2020년 팬데믹으로 인해 80.4원으로 하락했다. 팬데믹이 엔데믹으로 전환되면서 전력 수요 및 가격이 높아져 2021년의 전력 구매단가는 95.0원으로 올랐다. 하지만 2021년 초 정부는 전기요금을 오히려 3원 인하했다.
2022년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영향으로 전력 구매단가가 153.0원으로 대폭 상승해 2020년 대비 거의 2배가 됐다. 하지만 정부는 2022년 4월부터 전기요금을 6.9원만 인상했다. 2021년 1월의 인하액 3원을 고려하면 실질적인 인상액은 3.9원이었다. 2022년 5월에 출범한 윤석열 정부는 그해 10월 전기요금을 4.9원만 인상했다.
결국 한전은 2022년 말까지 32조6000억원의 누적적자를 기록했다. 올해 상반기에는 누적적자가 14조4000억원 늘어 47조원에 달했고, 부채는 201조원을 넘었다. 일반 기업이라면 벌써 파산했겠지만, 공기업인 한전은 너무나 고맙게도 불사조처럼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있다. 하지만 점점 좀비가 돼가는 느낌이다.
혈세가 투입된다는 세간의 오해와 달리, 전기를 발전사에서 구매해 소비자에게 공급하는 소매상인 한전에 세금 투입은 없다. 따라서 심각한 재무위기에 직면한 한전은 회사채 발행을 통해 마련한 자금으로 전기를 힘겹게 구매하고 있다. 정치권은 한전의 방만경영을 지적하며 강도 높은 자구책 마련을 촉구했다. 이에 한전은 지난 8일 자산 매각 및 희망퇴직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정부는 주택용, 일반용, 농사용은 놔두고 산업용 전기요금만 6.9% 인상하겠다고 밝혔다.
한전의 작년 인건비는 2조원을 넘지 않기에 이를 0원으로 줄여도 부채 및 적자 문제 해소는 어렵다. 우량 자산을 일시에 팔면 제값을 받기 어렵고 미래의 캐시카우을 버리는 셈이라 오히려 손해일 수 있다. 아울러 매일 100억원씩 내고 있는 이자가 1년이면 3조원 이상이기에, 이번 요금 인상은 한전의 적자 및 부채 감축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현재 한전이 겪고 있는 재무위기의 근본 원인은 국제 에너지 가격 및 환율의 상승이다. 하지만 정치권은 한전의 방만경영에 '과녁'을 그리는 텍사스 명사수의 모습이다. 물론 한전도 고칠 것은 고쳐야 한다. 하지만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단편적인 사실을 마치 근본적인 원인이라 호도하는 것은 문제 해결을 더욱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국민들에게 정전을 막기 위해서는 요금 인상이 불가피함을 이해시키고 에너지 절약을 위한 행동 변화를 부탁해야 한다. 국민들은 요금 인상을 받아들이고 올겨울 난방 설정 온도를 2~3도 낮추고 옷을 하나 더 껴입으면서 버티는 것으로 화답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보다 부자인 유럽 국가들의 현재 모습이기도 하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창의융합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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