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천재일우'에서 알아보는 숫자의 크기
“서울시 편입은 구리시에 주어진 천재일우의 기회다.” 국민의힘이 불 지핀 ‘서울 확장론’에 경기 김포시에 이어 구리시도 서울 편입을 적극 추진하고 나섰다. 문장 안 ‘구리시’ 자리에는 하남·광명 등 다른 도시 서너 곳을 바꿔 넣어도 될 정도로 이 문제는 단숨에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서울 메가시티’가 키워드로 부상한 가운데 바늘 가는 데 실 가듯 따라붙는 말이 ‘천재일우’다. 이 말에서는 지난 호 ‘아토초’를 통해 살펴본 극미세 차원과는 다른, 우리말 초거대 수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천재일우-천추의 한’ 공통점은 ‘천 년’
우리말 수의 단위는 ‘경’ 위로 ‘해, 자, 양, 구, 간, 정, 재, 극, 항하사, 아승기, 나유타, 불가사의, 무량수’가 있다. 범어(梵語)의 수 단위가 한자로 번역돼 불교를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든 수 중에 가장 큰 것은 ‘무량수’이고, 이보다 더 큰 수는 현재 우리말에는 없다(<표준국어대사전> 기준). 수학에서 쓰는 ‘무한대’는 실생활에서 많이 쓰긴 하지만, 우리말 수의 체계에는 없는 말이다.
‘불가사의(不可思議)’와 ‘무량수(無量數)’는 그나마 일상에서 비교적 익숙하게 들어봤을 것이다. ‘극(極)’도 우리가 꽤 자주 접하는 말이다. 하나가 더 있다. ‘재(載)’다. 낯선 것 같지만 의외로 가까이 있다. 우리말 ‘천재일우(千載一遇)’에 쓰인 ‘재’가 바로 그것이다. ‘재’는 ‘경’ 위로도 일곱 번째 있으니, 각 단계가 ‘만 배’씩 차이 나는 것을 생각하면 무려 10의 44제곱에 이른다. 게다가 ‘천재(千載)’이니 10의 47제곱인 까마득한 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이때 ‘재(載)’를 ‘해 재’로 푼다. 재(載)는 주로 ‘싣다’는 뜻으로 알려져 있지만 여기서는 ‘지난 해, 올해’ 할 때의 ‘해 년(年)’으로 쓰였다. ‘일천 천(千), 해 재(載), 하나 일(一), 만날 우(遇)’다. 천 년 동안 단 한 번 만난다는 뜻이니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좋은 기회’를 이르는 말이다. 중국에서 온 사자성어지만, 옛사람들의 과장법도 간단치 않았음이 느껴진다. ‘천재일우의 기회다’라는 표현이 관용구처럼 굳어져 널리 쓰인다.
말의 정체 알고 써야 쓰임새 정확해
“이번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면 천추의 한이 될 것이다.” 천재일우와 천추에는 ‘천 년’이란 공통점이 있다. ‘천추(千秋)’는 오래되고 긴 세월을 나타내는 말이다, 가을(秋)이 천 개이니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다. 그 오랜 세월을 뼈에 사무치는 한으로 남는 게 ‘천추의 한’이다.
‘일각이 여삼추’도 흔한 표현이다. 하지만 말의 정체를 모르면 어떤 상황에서 써야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일각(一刻)’은 지난 시절의 시간 단위로 대략 한 시간의 4분의 1, 즉 15분을 이른다. 여기서 ‘아주 짧은 시간’이라는 쓰임새가 나왔다. ‘여삼추(如三秋)’란 3개의 가을, 즉 3년과 같이 길게 느껴진다는 뜻이다. 일각이 여삼추이니 순간순간 얼마나 속이 타들어갈까. 그래서 ‘몹시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을 이를 때 쓰는 말이다. 그저 시간이 길게 느껴질 때 쓰는 게 아니다. 말의 정체를 알고 써야 쓰임새도 정확하고 말의 깊이와 말맛을 느낄 수 있다.
“천문학적이다”라는 말이 있다. 의미 생성과 변화 관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천문학’은 우주 천체의 온갖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그런데 ‘천문학적’이라고 하면 ‘수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뜻한다. 애초 ‘천문학’은 수의 개념과 관련 없는 말인데, 접미사 ‘-적(的)’이 붙으면서 의미가 바뀌었다. 왜 이런 변화가 생겼을까? 천문학이란 게 인간의 능력으론 가늠할 수 없이 광대하고 무한정한 우주 공간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런 점에서 ‘-적’이 붙으면서 일반인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뜻하는 말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적’은 어떤 명사 뒤에 붙어 ‘그 성격을 띠는’ ‘그에 관계된’ ‘그 상태로 된’의 뜻을 더하는 뒷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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