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수의 꼼수의 꼼수[김지현의 정치언락]

김지현 기자 2023. 11. 13.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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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이 9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에서 눈을 감은 채 앉아있다. 더불어민주당이 이날 본회의에 이 위원장 등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당론으로 채택해 올리자, 국민의힘은 탄핵안 표결을 막기 위해 준비했던 ‘필리버스터’를 기습 철회하고 퇴장했다. 국민의힘 불참 속에 노란봉투법과 방송3법을 이날 강행 처리한 민주당은 이 위원장 등에 대한 탄핵안을 11월 30일 본회의에 다시 올리겠다고 밝혔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이럴 때 보면 국회의원들이 머리가 좋은 것 같긴 합니다. 본회의가 한창이던 지난 9일 오후 3시경 “국민의힘이 필리버스터(무제한토론)를 안 한다는 것 같습니다”라는 막내 기자의 보고에 저는 순간 머리가 하얗게 되더군요. 국회를 출입한 지 5년째이건만, 몇 수씩 앞서가는 양당의 잔머리 대결은 솔직히 쫓아가기도 버겁습니다. 시간 순서대로 잔머리 천재들의 수 싸움을 한번 보시죠.
9일 오후 3시경 본회의장을 취재 중이던 후배 권구용 기자가 보내온 카카오톡 메시지. 이 때만 해도 기자들은 물론 현장에 있던 의원들도 국민의힘의 필리버스터 철회 계획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권구용 기자 제공

① 9일 오전까지 상황

애초 국민의힘은 민주당의 노란봉투법과 방송3법 강행 처리에 맞서 필리버스터를 벌이기로 했던 상황입니다. 국회선진화법에 보장된 필리버스터는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이 요구할 경우 본회의 안건에 대해 1건당 최소 24시간 무제한 토론을 할 수 있도록 한 제도입니다. 다수당의 일방적인 법안 및 안건 처리를 막기 위한 소수정당의 마지막 입법 저지 전략으로 많이 쓰여 왔죠.

국민의힘은 노란봉투법과 방송법, 방송문화진흥법, 한국교육방송공사법 등 총 4개 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 신청을 미리 받아 60명 의원 명단도 짜놨습니다. ‘검수완박’ 이후 18개월 만의 필리버스터인데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열리는 21대 국회 마지막 필리버스터이다 보니 ‘제2의 윤희숙’ 같은 타이틀을 노리고 나름 열심히 준비한 의원들도 적지 않았다고 하죠. 해당 의원실 보좌진마다 필리버스터에 대비한다고 여념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9일 본회의에서 열릴 필리버스터에 참여하기로 했던 국민의힘 의원 명단 및 순서. 노란봉투법과 방송3법 등 총 4개 법안에 대해 60명의 의원이 필리버스터를 신청했다.
민주당 원내지도부도 일찌감치 정의당, 기본소득당 등을 대상으로 표 단속을 해왔습니다. 필리버스터가 시작된 지 24시간이 지나면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100명) 서명을 받아 종결 동의요구서를 제출할 수 있고, 무기명 표결에서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179명)이 찬성하면 토론을 강제 종료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는 지난 5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24시간마다 필리버스터를 종료시키고 법안을 하나씩 처리하겠다. 현재까지 우리 당 의원 전원(168명)과 정의당(6명) 진보당(1명) 기본소득당(1명) 등 비교섭단체, 그리고 (야권 성향) 무소속 의원(6명)까지 함께 하기로 했다”고 자신감을 내비쳤습니다. 민주당은 국민의힘 필리버스터에 대항하는 찬성토론도 벌여 ‘맞불’을 놓기로 했죠. 이 밖에도 여야 지도부는 24시간마다 이어질 표결을 위해 소속 의원들에게 ‘비상 대기령’을 내리고 상임위별로 당번을 정해 본회의장을 지키라고도 했습니다.

② 9일 오후 2시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가 9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고 있다. 윤 원내대표는 이날 애초 예정돼 있던 당 차원의 필리버스터를 긴급 철회하고 퇴장해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 등에 대한 더불어민주당의 탄핵안 표결을 막았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그렇게 야심 차게 준비했던 필리버스터를 국민의힘이 당일 오후 본회의가 시작된 직후 갑자기 철회한 겁니다. 윤 원내대표는 전날 오전 철회를 결심하고도 보안 유지를 위해 본회의 직전 열린 의원총회에서도 함구했다죠. 윤 원내대표는 이날 본회의장 앞에서 기자들과 만나 “필리버스터라는 소수당의 반대토론 기회마저 국무위원 탄핵에 활용하겠다는 정치적 악의적 의도를 묵과할 수 없었다”고 철회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그는 이후 기자들과 따로 만난 자리에선 “김기현 대표에게만 의총 전에 말했고, 나머지 의원들에겐 본회의장에서 말했다”며 “혼자 고민하고 혼자 정리해서 머리가 좀 아프긴 했다”고 덧붙였습니다.
민주당이 이날 오후 1시 40분쯤 의원총회 중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과 손준성·이정섭 검사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접수했다는 사실을 인지한 뒤 ‘결단’을 내렸다는 겁니다.
더불어민주당 고민정 최고위원이 9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본회의 도중 SNS에 올릴 문구를 적고 있다. “방통위원장 이동관 탄핵 /민주당 당론 결정!” 이라고 적는 모습. 뉴스1
더불어민주당 박찬대 최고위원도 9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자신의 SNS에 올릴 글을 쓰는 모습이 언론 카메라에 포착됐다. “이동관 방통위원장, 손준성·이정섭 검사 탄핵소추안 당론발의.. 노조법, 방송법 개정(안 상정)”이라고 적고 있는 모습. 뉴스1
국회법상 탄핵소추안은 본회의에 보고된 때부터 24시간 이후 72시간 이내에 무기명투표 표결을 거치지 않으면 자동 폐기됩니다. 9일 이후로 여야 합의에 따라 예정된 11월 본회의는 23일과 30일뿐인 상황. 국민의힘이 필리버스터를 하면 10일로 이어지는 본회의에서 민주당은 계획대로 노란봉투법을 처리하고 탄핵안도 표결에 부칠 수 있었지만, 필리버스터가 취소되고 본회의가 산회 되면서 탄핵안이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이 돼버린 셈입니다. (물론 그 덕에 노란봉투법과 방송3법은 민주당 예상보다 4박 5일 빠르게 처리됐습니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9일 본회의 도중 필리버스터를 철회하며 일제히 퇴장하자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뒷줄 왼쪽에서 두번째) 등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③ 9일 오후 4시

허를 찔린 민주당은 즉각 ‘꼼수’라고 반발했죠.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는 본회의장 밖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동관 위원장을 지키기 위해 (국회의원들이) 스스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내팽개친 건 매우 유감스럽”고 비판했습니다. 탄핵안을 무력화하려고 국회의원들이 국회법상 보장된 필리버스터를 포기했다는 거죠. 당황한 티가 역력하던 민주당은 국민의힘 대신 24시간 필리버스터를 여는 방안도 검토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다만 이를 접은 이유에 대해 홍 원내대표는 “찬반이 엇갈리는 사안에 대해 (국민의힘이) 반대 입장을 철회한 상황에서 우리도 그렇다고 꼼수를 쓰는 것이, 정당하지 않은 원칙 기준 벗어난 방식으로 법안을 처리하는 것이 운영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다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솔직히 지켜보는 입장에선 꼼수든 아니든, 21대 국회 내내 의석수에서 민주당에 밀려 질질 끌려만 다니던 국민의힘이 ‘거야(巨野)의 폭주’를 처음으로 멈춰 세웠다는 점에선 통쾌하더군요. 다만 그게 여야 간 협상이 아닌 국회법을 역이용한 잔머리 덕이었다는 점은 아쉬웠습니다. 더군다나 국민의힘이 노란봉투법과 방송3법을 그동안 그토록 목 놓아 반대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그렇게 쉽게 표결을 포기하고 나가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가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소수정당으로서 마지막 반발과 항거를 필리버스터라는 역사의 기록으로라도 남겼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당 지도부 결정에 따라 9일 본회의장에서 한꺼번에 퇴장하고 있다. 사진상 위쪽이 비어버린 국민의힘 의석.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 의원들만 남아 노란봉투법과 방송3법을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뉴스1

④ 10일부터 현재까지

그 다음날부터 여야는 서로를 향해 ‘꼼수’라고 비난하며 ‘꼼수 2라운드’에 돌입했습니다. 국회법 90조 2항에 따르면 본회의에서 의제가 된 의안은 본회의 동의를 받아야 철회할 수 있는데, 이를 놓고 또 아전인수식 해석 싸움을 시작한 겁니다.

국민의힘은 탄핵안이 이미 본회의에 의제로 보고됐기 때문에, 해당 탄핵안을 재추진하는 것이 법적으로 무효라고 했습니다. 반면 민주당은 ‘꼼수 원조정당’ 답게 전날 본회의에 올렸던 탄핵소추안을 부랴부랴 철회했죠. 국회에 보고만 됐다고 해서 바로 안건이나 의제가 됐다고 볼 수 없고, 일사부재의(부결된 안건은 같은 회기 중 다시 발의하거나 제출할 수 없다)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민주당 박주민 원내수석부대표는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어제 제출한 탄핵안과 관련해 당이 이날 오전 철회서를 제출했고, 철회서가 접수 완료됐다. 이번엔 철회했지만, 이달 30일과 다음 달 1일 연이어 잡혀 있는 본회의 등을 시점으로 탄핵안 추진을 이어 나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대로라면 이 위원장과 검사 2명에 대한 탄핵안 처리 시점은 11월 10일에서 12월 1일로 약 20일 정도 미뤄지게 됩니다. 그 20일 새 무슨 일이 있겠냐 했는데, 머리 좋은 의원님들은 역시 이미 또 한 단계를 앞서 내다보고 계시더군요.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방통위 업무를 최대한 빨리 마비시켜 내년 총선에 유리한 여론을 형성하려 한다고 보고있죠. 박정하 수석대변인은 “왜 유독 탄핵안은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가. 지금껏 민주당이 손에 쥐고 장악했던 방송을 내려놓을 수 없고, 방송 정상화를 늦추기 위해 방송통신위원장의 직무를 정지시켜야 하는 목적이라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민주당에선 이에 대항하는 더 신박한 논리가 나왔습니다. 국민의힘이 9일 기어이 필리버스터를 철회까지 한 배경엔 이 위원장보다도 이재명 대표 수사 팀장인 이정섭 차장검사의 탄핵을 막겠다는 목표가 있었다는 거죠. 한 민주당 의원은 “이동관도 이동관인데, 이정섭 때문에 (국민의힘이) 저러는 것 같다. 이정섭은 12월까지 뭐든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다. 이재명 대표에 대해 영장을 다시 치겠다는 의지가 강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민주당 지도부 내에서도 올해 12월이나 내년 초에 검찰이 이 대표에 대해 한 번 더 구속영장을 청구할 가능성을 보고 있다고 하니 완전히 뜬금 없는 소리는 아닐 듯 합니다.

예산안 심사가 본격 시작되는 이번 주에도 여야의 피 튀기는 수싸움이 이어질 전망입니다. 의원님들께서 그 좋은 머리를 민생을 위한 예산안과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에도 좀 더 많이 써주시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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