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수의 꼼수의 꼼수[김지현의 정치언락]
① 9일 오전까지 상황
애초 국민의힘은 민주당의 노란봉투법과 방송3법 강행 처리에 맞서 필리버스터를 벌이기로 했던 상황입니다. 국회선진화법에 보장된 필리버스터는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이 요구할 경우 본회의 안건에 대해 1건당 최소 24시간 무제한 토론을 할 수 있도록 한 제도입니다. 다수당의 일방적인 법안 및 안건 처리를 막기 위한 소수정당의 마지막 입법 저지 전략으로 많이 쓰여 왔죠.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는 지난 5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24시간마다 필리버스터를 종료시키고 법안을 하나씩 처리하겠다. 현재까지 우리 당 의원 전원(168명)과 정의당(6명) 진보당(1명) 기본소득당(1명) 등 비교섭단체, 그리고 (야권 성향) 무소속 의원(6명)까지 함께 하기로 했다”고 자신감을 내비쳤습니다. 민주당은 국민의힘 필리버스터에 대항하는 찬성토론도 벌여 ‘맞불’을 놓기로 했죠. 이 밖에도 여야 지도부는 24시간마다 이어질 표결을 위해 소속 의원들에게 ‘비상 대기령’을 내리고 상임위별로 당번을 정해 본회의장을 지키라고도 했습니다.
② 9일 오후 2시
③ 9일 오후 4시
허를 찔린 민주당은 즉각 ‘꼼수’라고 반발했죠.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는 본회의장 밖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동관 위원장을 지키기 위해 (국회의원들이) 스스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내팽개친 건 매우 유감스럽다”고 비판했습니다. 탄핵안을 무력화하려고 국회의원들이 국회법상 보장된 필리버스터를 포기했다는 거죠. 당황한 티가 역력하던 민주당은 국민의힘 대신 24시간 필리버스터를 여는 방안도 검토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다만 이를 접은 이유에 대해 홍 원내대표는 “찬반이 엇갈리는 사안에 대해 (국민의힘이) 반대 입장을 철회한 상황에서 우리도 그렇다고 꼼수를 쓰는 것이, 정당하지 않은 원칙 기준 벗어난 방식으로 법안을 처리하는 것이 운영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다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솔직히 지켜보는 입장에선 꼼수든 아니든, 21대 국회 내내 의석수에서 민주당에 밀려 질질 끌려만 다니던 국민의힘이 ‘거야(巨野)의 폭주’를 처음으로 멈춰 세웠다는 점에선 통쾌하더군요. 다만 그게 여야 간 협상이 아닌 국회법을 역이용한 잔머리 덕이었다는 점은 아쉬웠습니다. 더군다나 국민의힘이 노란봉투법과 방송3법을 그동안 그토록 목 놓아 반대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그렇게 쉽게 표결을 포기하고 나가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가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소수정당으로서 마지막 반발과 항거를 필리버스터라는 역사의 기록으로라도 남겼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④ 10일부터 현재까지
그 다음날부터 여야는 서로를 향해 ‘꼼수’라고 비난하며 ‘꼼수 2라운드’에 돌입했습니다. 국회법 90조 2항에 따르면 본회의에서 의제가 된 의안은 본회의 동의를 받아야 철회할 수 있는데, 이를 놓고 또 아전인수식 해석 싸움을 시작한 겁니다.
국민의힘은 탄핵안이 이미 본회의에 의제로 보고됐기 때문에, 해당 탄핵안을 재추진하는 것이 법적으로 무효라고 했습니다. 반면 민주당은 ‘꼼수 원조정당’ 답게 전날 본회의에 올렸던 탄핵소추안을 부랴부랴 철회했죠. 국회에 보고만 됐다고 해서 바로 안건이나 의제가 됐다고 볼 수 없고, 일사부재의(부결된 안건은 같은 회기 중 다시 발의하거나 제출할 수 없다)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민주당 박주민 원내수석부대표는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어제 제출한 탄핵안과 관련해 당이 이날 오전 철회서를 제출했고, 철회서가 접수 완료됐다. 이번엔 철회했지만, 이달 30일과 다음 달 1일 연이어 잡혀 있는 본회의 등을 시점으로 탄핵안 추진을 이어 나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대로라면 이 위원장과 검사 2명에 대한 탄핵안 처리 시점은 11월 10일에서 12월 1일로 약 20일 정도 미뤄지게 됩니다. 그 20일 새 무슨 일이 있겠냐 했는데, 머리 좋은 의원님들은 역시 이미 또 한 단계를 앞서 내다보고 계시더군요.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방통위 업무를 최대한 빨리 마비시켜 내년 총선에 유리한 여론을 형성하려 한다고 보고있죠. 박정하 수석대변인은 “왜 유독 탄핵안은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가. 지금껏 민주당이 손에 쥐고 장악했던 방송을 내려놓을 수 없고, 방송 정상화를 늦추기 위해 방송통신위원장의 직무를 정지시켜야 하는 목적이라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민주당에선 이에 대항하는 더 신박한 논리가 나왔습니다. 국민의힘이 9일 기어이 필리버스터를 철회까지 한 배경엔 이 위원장보다도 이재명 대표 수사 팀장인 이정섭 차장검사의 탄핵을 막겠다는 목표가 있었다는 거죠. 한 민주당 의원은 “이동관도 이동관인데, 이정섭 때문에 (국민의힘이) 저러는 것 같다. 이정섭은 12월까지 뭐든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다. 이재명 대표에 대해 영장을 다시 치겠다는 의지가 강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민주당 지도부 내에서도 올해 12월이나 내년 초에 검찰이 이 대표에 대해 한 번 더 구속영장을 청구할 가능성을 보고 있다고 하니 완전히 뜬금 없는 소리는 아닐 듯 합니다.
예산안 심사가 본격 시작되는 이번 주에도 여야의 피 튀기는 수싸움이 이어질 전망입니다. 의원님들께서 그 좋은 머리를 민생을 위한 예산안과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에도 좀 더 많이 써주시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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