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정부 콧줄 꿰던 양여금 폐지, 청와대 특활비도 축소
SOC 투자 중 도로가 60% 차지
항만·철도 홀대…토건국가형 예산
예산 과다신청 현상 해마다 반복
청와대 일반 업무추진비 33억인데
베일 싸인 특수활동비는 100억원
노 대통령 “바로잡아야” 강한 의지
‘도로 분야 양여금, 교부세 전환’
김두관 장관, 대승적 결단해 수용
도로 과잉투자 감소 등 효과 불구
행자부 조직 논리에 저항 지속돼
“지방 자율 위해 재원 포괄이전해야”
노 대통령, 행자부 공무원들 만나 설득
2003년 3월5일(수) 오후 3시 기획예산처의 내년 예산편성 지침 회의에 배석했다(집현실). 박봉흠 장관, 변양균 차관, 임상규, 정해방, 최경수 실장이 참석해 각 부처의 예산 자율성 제고와 성과관리 강화 방안을 토론했다. 사회간접자본(SOC) 투자 중 도로가 60%를 차지해 명백히 과다했고, 대신 항만은 중요한데도 투자의 9%밖에 안 되고, 철도 역시 과소 투자되고 있다. 국고에서 30%를 지원하는 지하철 건설에도 낭비적 요소가 많다. 지방에 가는 예산이 지방양여금, 국고보조금, 교부세로 구분되는데 구태여 구분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었다(참여정부에서 양여금을 폐지했다).
한국 예산구조의 가장 큰 특징은 선진국에서 5%밖에 안 되는 경제개발 예산이 30%나 된다는 점이다. 박정희 이후 성장지상주의가 빚어낸 기형적 예산구조다. 토건국가적 현상인 데다, 지방 토호세력과 연결된 부패의 온상이라는 문제도 있다. 지역이기주의와 ‘밑져봐야 본전’이니 일단 신청하고 보자는 확보주의가 만연해 해마다 예산 과다 신청 현상이 일어난다. 기획예산처는 이런 이유로 문제 사업은 청와대 정책실에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했다. 이날 토론으로 한국 예산의 기형적 특징과 문제점이 드러났다. 참여정부 앞에 커다란 개혁과제가 놓여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 실제로 참여정부는 여러 분야에서 획기적 예산개혁을 해냈다.
4월14일(월) 오후 5시 기획예산처의 대통령 보고가 있었다(집현실). 청와대에서는 권오규, 조윤제와 내가 참석했다. 경기 대책용 추경을 두고 권오규 정책수석은 지지했고 조윤제 경제보좌관은 유보적 태도를 보였다. 공무원 보수 인상은 박봉흠 장관도, 나도 반대했다.
셋째 주제는 업무추진비. 청와대의 일반 업무추진비 33억원은 별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특수활동비가 100억원이라니, 배보다 배꼽이 큰 셈이었다. 내가 내용을 공개하고 투명화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더니 대통령도 동의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단호하게 말했다. “대통령 안 하면 안 했지, 이런 거는 바로잡아야 한다”며 강력한 개혁의지를 표명했다.(공교롭게도 바로 그날 ‘한겨레’에 실린 투명한 회계, 예산을 강조하는 박원순 변호사의 칼럼을 노 대통령이 읽고 아침 수석회의에서 언급했다) 실제로 베일에 가려져 있던 특수활동비는 노대통령이 집행, 사용을 극도로 자제, 기피하여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애를 먹었다.
넷째 주제는 연구개발(R&D) 예산을 국민소득(GDP)의 7% 이상, 교육예산을 6% 이상으로 높이겠다는 대선 공약이었다. 공약을 파기하면 국민에게 면목 없지만 나라 경제를 위해 포기하는 게 옳겠다고 내가 주장해서 그렇게 정해졌다. 워낙 중요한 사안들이라 40분 예정이던 토의는 2시간 넘게 진행됐다. 서갑원, 여택수 비서가 말하길 권양숙 여사가 저녁약속이 생겨 대통령 혼자 저녁식사를 하셔야 한다고 하니, 노 대통령이 웃으며 “라면이나 한그릇 끓여 달라고 해야겠다”고 말했다.
7월22일(화) 오후 3시 재정분권 회의가 청와대 서별관에서 열렸다. 김진표 경제부총리,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 박봉흠 장관, 김병준 정부혁신위원장, 성경륭 균형발전위원장, 조윤제 보좌관이 참석했고 내가 사회를 보았다. 기획예산처 박인철 국장이 쟁점을 요약 발제한 뒤 토론에 들어갔다. 기획예산처와 행자부 김동기 지방재정국장이 양여금 존폐 여부를 놓고 팽팽한 논쟁을 벌였다. 박인철 국장이 5개(지역개발, 도로정비, 농어촌지역 개발, 청소년 육성, 수질오염 방지) 양여금 사업 중 큰 부분인 도로 분야를 교부세로 바꿔 도로 과잉투자를 막도록 하자고 제안하자 김병준 위원장과 김두관 장관이 동의해 일사천리로 합의됐다. 특정 목적 사업에 충당하도록 국세의 일부를 지방에 양여하는 양여금은 사업목적이 특정돼 지자체로서는 자율적 사업 추진에 제약을 받고 지방재정이 경직적으로 운영되는 요인이기도 했다. 참여정부는 양여금 제도를 폐지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지방으로 가는 재원 중 지방이 자유재량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교부세는 일반교부세(10/11)와 특별교부세(1/11, 그중 1/2은 재해예비비, 나머지는 재량)로 나뉜다. 특별교부세는 대통령과 행자부 장관이 지자체장에게 선심성으로 나눠주는 게 오랜 관행이었는데 노 대통령이 스스로의 권력을 내려놓고 과감히 줄이자고 주장해 종래 1/11에서 5%로 낮아졌다(일본은 6%). 이것도 하나의 개혁이다. 교부세 재원도 종래 내국세 28%에서 3대 주요 세목(소득세, 법인세, 부가가치세)의 40%로 바꾸기로 전격 합의했다. 이 안은 특히 김진표 부총리가 강력 주장했다. 교부세가 내국세의 28%로 돼 있어 지방에 돈을 적게 주려고 내국세 대신 각종 목적세를 신설하는 부작용이 나타난다고 한다. 내국세라는 개념 자체가 모호하다는 문제도 있다.(그러나 3대 세목의 40% 안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이날 회의에서 부처이기주의를 넘어 나라 경제를 위해 통 큰 합의를 이루어냈는데, 이는 관가에서 보기 드문 사례다. 이 합의는 장군 체격에 성격도 호방한 김두관 장관이 대폭 양보했기에 가능했다. 다만 김 장관이 행자부에 돌아가 밥그릇 못 챙겼다고 원성을 들을까 걱정됐다. 그러나 모두가 자기 밥그릇 챙기기만 한다면 나라는 어떻게 되겠는가. 김 장관의 대국적 태도는 칭찬할만 했다.
8월11일(월) 오전 10시반 기획예산처의 내년 예산안 보고에 배석했다(집무실). 김진표 경제부총리, 박봉흠 장관, 임상규 예산실장, 김영용 국방부 차관보(재경부 출신), 권오규, 조윤제와 내가 참석했다. 예산처에서 내년 예산 사정이 어렵다고 보고하자 노 대통령이 “나는 국방비를 임기 말까지 GDP 3.2% 수준을 달성하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다. 3% 정도면 어떤가?”라고 물었다. 아무도 답을 하지 않기에 내가 얼른 동의하고 나섰다. “국방비 인상은 참여정부 철학과 맞지 않고 나라경제를 압박한다. 국방비는 증액이 꼭 필요하다는 근거가 없는 한 가급적 억제함이 옳고 그보다 사회안전망 확충이 우선”이라고 역설했다. 국방예산은 군 내무반 시설 개선에 2.6조원, 그리고 사병 월급을 2만4000원에서 8만원(이스라엘 수준)으로 올리기로 결정했다. 회의는 도시락을 먹으며 3시간 넘게 진행됐다.
이날 오후 2시반 노 대통령이 행자부 공무원들과 대화를 했다(외교부 3층 대회의실), 최양식 기획관리실장의 보고에 이어 노 대통령이 상시적, 지속적 정부혁신을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인사 등 행자부의 기존 업무를 내려놓는 대신 전자정부 같은 새 업무를 찾아서 하라고 요구했다. 중간 휴식시간에 옆방으로 옮겨 노 대통령, 문희상, 김두관, 김병준과 내가 차 한잔을 했다. 나는 노 대통령에게 김구 선생이 좋아했던 ‘낭떠러지에서 나뭇가지 잡은 손을 탁 놓아버리는 것이 대장부’(懸崖撤手丈夫兒)라는 시 구절이 오늘 연설에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말했다. 김병준 정부혁신위원장에게는 행자부가 맡을 새 일을 빨리 찾아주는 것이 행자부 공무원들의 불안을 해소할 지름길이니 서두르라고 권했다.
후반부 질의, 응답 시간에 행자부 공무원 여러명이 집요하게 인사 문제, 양여금 문제를 언급했다. 손을 탁 놓는 자세가 보이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지방의 자율성을 위해 재원의 포괄적 이전이 필요하다며 양여금 폐지의 당위성을 옹호했다. 대통령까지 나섰지만, 행자부 고위 공무원들 사이 양여금 폐지에 대한 항명 움직임은 상당 기간 지속됐다. 그러나 결국 참여정부에서 종래 지방을 콧줄 꿰던 양여금을 폐지했다. 이것은 예산의 불필요한 칸막이를 없애고 지방의 예산 자율성을 높인 개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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