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서울 흔든 클래식 ‘월드시리즈’···직관한 청중이 ‘승자’

허진무 기자 2023. 11. 13. 15:4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정상 오케스트라 RCO·베를린필 잇단 공연
RCO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에 일부 관객 ‘눈물’
베를린필 100명 넘는 단원이 하나의 악기처럼 연주
네덜란드 오케스트라 로열콘세르트헤바우(RCO)가 지난 11일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공연을 마치고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롯데문화재단 제공

지난 주말 서울에선 세계 최정상 오케스트라 로열콘세르트헤바우(RCO)와 베를린 필하모닉이 잇달아 한국 관객을 만났다. RCO는 지난 11일 롯데콘서트홀에서, 베를린필은 11~12일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했다. 세계에는 수천개 오케스트라가 존재하지만 RCO와 베를린필은 1위를 다투는 최고 명문이다. 두 오케스트라의 티켓을 모두 구한 클래식 팬은 귀가 호강하는 행복에 더해 ‘누가 더 잘하나’ 승자를 가려보는 재미도 즐겼을 것이다.

‘벨벳의 현, 황금의 관’ 증명한 RCO

11일 RCO 공연은 베버의 오페라 ‘오베론’ 서곡으로 1부의 문을 열었다. 요정의 왕 오베론과 왕비 티타니아가 인간 연인의 사랑을 시험하는 내용이다. 마술 뿔피리로 변한 호른의 촉촉한 음색은 호른이라는 악기가 낯설게 느껴질 만큼 아름다웠다. 힘찬 관현악 연주가 요정 세계의 신비와 인간 세계의 활기를 그림처럼 생생하게 그렸다. 이때부터 이날 공연이 범상치 않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었다.

이어 러시아 피아니스트 예핌 브론프만이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협연했다. 부드럽다가도 사납게 변하면서 계속 오르락내리락하는 천변만화(千變萬化)의 곡이다. 브론프만의 피아노는 RCO와 대결해도 밀리지 않는 분명한 존재감이 있었다. 아기의 옹알이처럼 여린 표현부터 강철 망치처럼 육중한 표현까지 자유자재의 타건을 보여줬다. 브론프만은 이틀 전부터 두 대의 피아노를 두고 음색을 비교하다 공연 당일 연주할 피아노를 결정했다고 한다. 이날 앙코르 연주로 슈만 ‘아라베스크’와 쇼팽 에튀드 12번 ‘혁명’을 골라 관객의 박수에 답했다.

로열콘세르트헤바우(RCO)와 피아니스트 예핌 브론프만이 지난 11일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협연하고 있다. 롯데문화재단 제공
지휘자 파비오 루이지가 지난 11일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 공연에서 로열콘세르트헤바우(RCO)를 지휘하고 있다. 롯데문화재단 제공

RCO가 2부에서 선보인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은 이 오케스트라에 ‘벨벳의 현, 황금의 관’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를 똑똑히 증명하는 명연이었다. RCO는 1악장에서 관객을 압도하는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며 서서히, 깊숙이 밀고 들어왔다. 캄캄한 고요 속 호른의 우울하고 달콤한 멜로디 뒤에 관현악의 율동감을 뽐내는 2악장이 뒤따랐다. RCO는 3악장의 우아한 왈츠를 거쳐 4악장에서 비로소 어둠을 몰아내면서 찬란한 승리의 환희로 위풍당당 나아갔다. RCO가 4악장에서 들려준 수려하면서도 대담한 드라마는 관객의 가슴 벅찬 함성과 박수갈채로 마무리됐다. 몇몇 관객은 울먹이면서 연신 ‘브라보’를 외쳤다. RCO는 앙코르 연주로 차이콥스키 ‘예프게니 오네긴’ 중 폴로네즈를 들려줬다.

이탈리아 지휘자 파비오 루이지는 향수를 만드는 조향사이기도 하다. 이날 루이지는 향(香·향기)이 아닌 향(響·울림)을 조합해 절묘한 균형을 만들어냈다. 지휘봉 없이 두 팔을 적극 사용해 큰 동작으로 정확하게 지시했다. 루이지는 공연을 앞두고 e메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포디움(단상) 위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말하는 것은 늘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나도 모르기 때문이죠. 아마 공연을 통해 제 음악적 아이디어와 해석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악의 원초적 재미와 쾌감 만끽하게 해준 베를린필
베를린 필하모닉이 지난 11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연주를 마치고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C)Monika Rittershaus. 베를린필 페이스북

베를린필의 12일 공연은 한국의 ‘스타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협연자로 나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들려줬다. 조성진이 이 곡을 골라 베를린필에 제안했다. 관현악 연주 없이 피아노 독주로 시작하는 파격에 독특한 형식을 갖춰 베토벤의 음악적 원숙미가 느껴지는 곡이다. 조성진은 귓속말처럼 가볍고 조용한 터치로 1악장을 시작해 감정이 고양될 때도 특유의 절제감으로 선을 지켰다. 특히 1악장 말미 카덴차에서 피아노의 영롱한 서정미가 감탄을 자아냈다. 독주자와 오케스트라가 주거니 받거니 대화하는 2악장에서 베를린필은 조성진을 누르려 하지 않고 넉넉한 반주로 받쳐줬다. 장중한 관현악과 섬세한 피아노가 예리한 대비를 이뤘다. 조성진의 깔끔하고 정확한 기교가 투명하게 드러났다.

베를린필은 3악장에서 에너지를 폭발적으로 발산하며 화려한 행진을 시작했다. 명차가 몇초 만에 초고속으로 가속하듯이 베를린필도 단숨에 연주의 온도를 뜨겁게 끌어올렸다. 상임지휘자 키릴 페트렌코는 연주 막바지에 지휘봉을 내려놓기 전부터 조성진과 눈을 맞추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조성진은 리스트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104번을 앙코르곡으로 골랐다.

조성진은 내년부터 베를린필 상주음악가로 활동한다. 한국 음악가로선 최초다. 2017년 중국 피아니스트 랑랑의 ‘대타’로 처음 협연 기회를 얻었지만 이제 베를린필이 직접 초청하는 음악가로 성장했다. 조성진은 지난 10일 기자간담회에서 “베를린필은 세계에서 가장 잘하는, 그리고 특별한 사운드를 가진 오케스트라라고 생각한다”며 “많은 연주자가 베를린필과 협연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베를린필은 2부에서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영웅의 생애’를 연주하며 야수처럼 포효했다. 다소 얌전했던 1부의 한을 풀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베를린필의 모든 단원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독주자로서 홀로 무대를 채울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가졌다. 페트렌코는 단원들이 가진 가지각색의 소리를 정밀하게 세공해 마치 하나의 악기처럼 통제했다. 100명이 넘는 단원들이 뿜는 무시무시한 박력보다도, 아무도 탈선하지 않고 완전한 합일을 이루는 것이 놀라웠다.

12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조성진이 베를린필과 함께 연주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피아니스트 조성진(왼쪽)과 베를린 필하모닉 상임지휘자 키릴 페트렌코가 지난 10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오페라 지휘로 명성과 경험을 쌓은 페트렌코에게는 영웅의 장대한 드라마가 잘 어울렸다. 일본인 악장 다이신 가시모토의 열정적인 바이올린 독주는 숨죽여 경건한 자세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음악의 원초적인 재미와 쾌감을 만끽할 수 있는 연주였다. 베를린필은 앙코르곡을 연주하지 않아 여운을 그대로 집까지 가져갈 수 있었다. 베를린필이 페이스북에 “이렇게 긴 줄은 거의 본 적이 없다”고 적을 정도로 이틀간 공연은 사인을 받으려는 관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티켓을 구하지 못한 관객들이 로비에 모여 스크린을 통해 연주를 감상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페트렌코는 2019년 사이먼 래틀의 후임으로 베를린필의 수장 자리에 올랐다. 베를린필은 한국을 떠나 14일부터 26일까지 일본 공연을 이어간다. 페트렌코는 지난 10일 기자간담회에서 “베를린필과의 관계가 시작된 직후 코로나19가 터져서 오랫동안 연주를 많이 하지 못했다”며 “지난해는 미국을 순회했고, 올해는 아시아 투어를 한다. 우리가 이제부터 진정한 여행을 시작한다는 느낌이 든다. 함께 실현하고 싶은 꿈이 많다”고 말했다.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