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값 ‘잃어버린 30년’ 이전 수준 급락…한국, 경각심 가져야[전문기자 칼럼]
1980년대 ‘조지루쉬 코끼리 밥솥’은 일본을 방문한 한국 여행객들이 사오는 필수품이었다. 김포 공항에서 두 손에 일제 밥솥을 들고 귀국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코끼리밥솥이 인기를 끈 이유로는 품질과 함께 환율 영향도 컸다. 1980년대 100엔당 원화값은 300원대, 11월 현재 870원의 절반도 안됐다. 밥솥 가격이 일본에서 1만 엔이라면 한국 가격은 당시 3만원, 지금은 8만7000원이란 얘기다.
코끼리밥솥이 상징하는 것처럼 일본이 1980년대 세계 2위 경제대국이 될 수 있었던 데는 기술력도 있었지만 저평가된 엔화의 영향도 컸다. 당시 달러당 엔화 값은 250엔을 오르내렸다. 엔화의 저평가는 해외로 수출하는 일본 제품 값이 떨어지는 효과를 낸다. 이 덕에 일본 제품은 값싸고 질 좋다는 소문과 함께 전 세계를 휩쓸었다. 일본 경제력은 날로 커져 세계1위 미국을 넘봤다.
미국은 자신을 위협하는 일본의 성장을 두고 보지 않았다. 미국이 뺀 칼은 먼저 엔화를 겨냥했다. 미국은 1985년 9월 미국 뉴욕 플라자 호텔에 독일 일본 프랑스 영국 재무장관들을 불러들였다. 여기서 엔화를 비롯한 다른 나라 통화가치를 대폭 절상시킨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합의문을 채택했다. 1985년 8월 250엔대였던 달러당 엔화 값은 1987년 말에는 120엔대까지 치솟았다. 일본이 수출하던 물건 값은 2년 새 2배가 됐다. 값이 2배나 오른 물건이 쉽게 팔릴 리가 없다.
미국의 압박은 계속됐다. ‘미일 반도체 협정’을 통해 일본 반도체 기업의 미국 수출을 막았고 일본의 반도체 수입을 강제했다. 미국의 태도는 요즘 중국을 다루는 것보다 더 가혹했다. 일본은 미국의 요구를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받아들였고 이로 인해 1990년대 들어 일본경제는 ‘저성장 저물가’가 고착화되는 ‘잃어버린 30년’의 늪에 빠졌다. 역설적이지만 일본의 위기는 한국에게는 기회였다. 엔화와 비교한 원화값은 1980년대 후반 100%가량 저평가되며 한국의 수출경쟁력은 살아났다. 한국은 원화의 저평가와 함께 기업들의 기술개발이 성과를 거두며 고속 성장을 이뤘다. ‘코끼리밥솥’은 옛날 얘기가 됐다.
장기 불황을 탈피하려는 일본의 노력은 집요했다. 대표적인 것이 2012년부터 진행된 아베 정부의 ‘무제한 양적완화’ 정책이다. 돈을 무한정 찍어내 엔화 가치를 낮추겠다고 천명한 아베의 정책은 미국에 굴복한 플라자합의를 되돌리려는 노력처럼 보였다. 이 정책은 기시다 정부로 이어졌다. 그 결과 달러당 엔화 값이 11월 들어 150엔대까지 떨어지며 1990년대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엔화 값이 ‘잃어버린 30년’ 이전 수준으로 복귀한 것이다. 미국과의 금리 차가 벌어지고 엔화 값 하락에 따른 물가 부담은 커지고 있지만 일본 당국이 말로만 엄살을 떨 뿐 본격적인 정책변화에 나서지 않고 있는 것도 ‘플라자합의’로 왜곡된 일본경제가 다시 본 궤도에 들어설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반면 엔화와 비교한 원화값은 날로 치솟고 있다. 연초 970원이던 100엔당 원화값은 11월에는 870원으로 100원 이상 올랐다. 환율만 놓고 보면 대일본 수출경쟁력은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다. ‘코끼리 밥솥’이 재연될 정도는 아니더라도 경각심을 가져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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