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 벽보'를 떼는 행위에 대한 변명[워싱턴 현장]

워싱턴=CBS노컷뉴스 최철 특파원 2023. 11. 13.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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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보'에 대해 사전은 "벽이나 게시판에 붙여 널리 알리는 글"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가장 흔한 게 '잃어버린 고양이 찾습니다. 후사하겠음'이라는 글과 함께 고양이 사진을 넣어 길거리 가로등에 붙여놓는 것들이다. 

거리 미관을 해치기에 즉시 철거해야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상식선에선 벽보는 해당 건이 마무리됐을 때 게시자가 스스로 떼어내는 것이다. 

즉 고양이를 찾았거나, 아니면 더 이상 찾을 수 없다는 판단에 섰을 때 벽보를 붙인 이가 '결자해지'를 하는 것이다. 

태국 와칠라 국립병원 실종자 게시판에 올라있는 스웨덴과 포르투갈 아이들. 최철 기자


19년 전 태국 푸껫에서 대형 쓰나미가 발생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당시 태국 와칠라 국립병원 실종자 게시판에는 뒤늦게 소식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 "실종된 가족들을 찾아달라"며 애끓는 '벽보'를 붙이기도 했다. 

뉴욕 9·11 메모리얼 박물관에서도 비슷한 벽보를 찾아 볼 수 있었다.

어린 딸이 아빠와 찍은 사진과 함께 "우리 아빠를 본 적 있나요?"라고 고사리 손으로 쓴 '벽보'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뉴욕 9·11 메모리얼 박물관 벽보. 최철 기자


실은 하마스 공격 이후 미국은 물론 전세계 주요 도시에 나붙고 있는 '납치 벽보' 얘기를 하려다가 서론이 길어졌다.

해당 벽보는 지난 10월 7일 하마스에 인질로 잡힌 사람들의 사진 위에 'KIDNAPPED(납치됨)'라는 큰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벽보는 이스라엘 거리 예술가들이 만든 것으로, 이들은 12개 언어로 만들어진 디지털 파일을 무료로 배포했다.

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벽보를 인쇄해 거리에 붙이는 형식으로 확산됐다.

인터넷 연결이 가능한 곳에서는 어느 누구나 해당 벽보를 다운받아 인쇄할 수 있기 때문에 파급 속도는 빨랐다.

실제 미 버지니아주 비엔나의 한 고등학교 근처 전신주에서도 이같은 벽보가 붙어있다. 

'KIDNAPPED(납치됨)'이라고 표시된 벽보. 최철 기자


문제는 이같은 '납치 벽보'가 곧잘 떼어지고 있고 이것이 또다른 불화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벽보는 게시자가 사정 변화가 생겼을 경우 스스로 떼내는 것이 순리인데, '납치 벽보'에는 이 법칙이 통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벽보를 붙이는 행위는 하마스가 붙잡고 있는 인질을 대중이 모두 알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행동주의가 됐다. 

반면 벽보를 제거하는 행위도, 10월 7일 이전과 가자지구 폭격이 시작된 이후 이스라엘의 학대행위에 저항하는 또다른 행동주의가 된 것이다. 

벽보 게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벽보 게시는 유태인들이 과거 어두운 시기에 자신들의 두려움에 대처하는 방법이었다"며 "납치자들에 대한 우리의 걱정을 표현하는 방법은 벽을 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없도록 벽보를 붙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같은 벽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벽보 게시자들은 자신들의 잔혹 행위를 숨기고 납치자들만을 앞세우는 '전시 선전'"이라며 "해당 벽보에 팔레스타인 민간인 피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는 것이 이를 방증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벽보 훼손 행위는 곧잘 영상으로 찍혀 SNS에 올라와 누리꾼들의 '2차 싸움'에 소비된다. 

해당 영상을 보면 벽보를 떼는 사람들을 향해 지나가는 사람들이 "부끄러운 줄 알아라"고 소리치자, 벽보를 떼내던 사람들은 "이런 행위가 더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하마스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실제 벽보 훼손자 중 일부는 유태인이다. 뉴욕타임스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뉴욕에 사는 한 유태인은 "나도 가끔 벽보를 떼어낸다. 벽보를 붙이는 사람들이 지금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생명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벽보 훼손 행위가 SNS에 올라가 일자리를 잃은 사례도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뉴저지의 한 마을은 지금까지 유태인과 무슬림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는데, 이 벽보 때문에 예전에 없었던 팽팽한 긴장감이 형성됐다는 뉴스도 들린다. 

이곳에서는 납치 벽보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희생자의 벽보도 붙여지고 있다. 당국에서는 2가지 벽보 모두를 발견 즉시 제거하고 있지만, 그럴 때마다 각각으로부터 항의를 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벽보'가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정치화 도구가 됐을 때, 벽보 훼손과 같은 부작용은 부수적으로 반드시 뛰따르는 것이다.

앞서 잠깐 얘기했던 9·11 메모리얼 박물관의 벽보는 아예 디지털로 작성돼 있어, 박물관이 문을 닫지 않는 한 영구적으로 게시될 예정이다.

디지털 사진으로 전환된 9·11 메모리얼 박물관 벽보. 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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