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구 안 보이는 ‘가자 전쟁’, 왜 카타르를 주목하나[이세형의 더 가까이 중동]
미국-탈레반 ‘아프간 미군 철수 협상’도 카타르 중재
미군기지, 하마스, 탈레반의 협상 창구 동시 유치하며 ‘중동 외교 중심지’로 도약
커지는 ‘중재 외교’ 부담은 극복해야할 과제
멀게 느껴지지만 우리와 뗄 수 없는 중동. 그 생생한 현장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정치, 경제, 자원, 종교, 역사, 문화가 얽혀 있는 갈등과 변화의 ‘핫스팟’ 중동의 모습을 쉽고, 재미있게 또 인사이트를 담아 알려 드리겠습니다. 카이로 특파원, 국제부 차장, 카타르의 싱크탱크 아랍조사정책연구원(ACRPS) 방문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중동을 취재했습니다. 단행본 <중동 라이벌리즘>과 <있는 그대로 카타르>를 펴냈습니다. |
이날 행사에선 이스라엘군을 공격하다 부상당한 팔레스타인 청소년을 도와 준 팔레스타인 여성 교사가 8년(약 3000일) 간 이스라엘 감옥에 수감된 이야기를 다룬 영화 ‘3000일의 밤’이 상영됐다. 행사를 주관한 카타르의 영화진흥기관 ‘도하 필름 인스티튜트’ 관계자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며 제작진과 배우들 모두 가자지구에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고 있는 것에 가슴 아파하고 있다”고 말했다.
같은 날 오후 11시 도하 도심의 전통시장인 수크 와키프의 베이커리 카페에는 작은 팔레스타인 깃발이 걸려 있었다. 카페 종업원은 어깨에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상징하는 흰색 바탕에 검은색 체크무늬가 들어간 ‘케피예’(keffiyeh · 중동 남성들의 전통 두건)를 두르고 있었다. 검은 체크무늬가 들어간 흰색 케피예는 전통적으로 팔레스타인 남성이 많이 두른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분쟁이 시작된 뒤부터는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나타내는 아이템으로 여겨진다.
가게 점원은 “나는 모로코 출신이지만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요즘 워낙 어려움에 처해 있기 때문에 그들을 기억하자는 취지에서 팔레스타인 스타일 케피예를 둘렀다”며 “팔레스타인 지역의 전통 디저트로 유명한 쿠나파(Kunafah·치즈가 들어 있는 단맛의 페스추리 형태의 구운 빵)도 평소보다 많이 팔린다”고 말했다.
도하 시내 건물과 전광판에서도 팔레스타인 깃발과 지지 메시지를 볼 수 있었다.
● 인질 석방과 휴전 협상의 무대
같은 아랍 국가로서 심정적으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모습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카타르에서 가자지구 전쟁의 긴박함과 불안감은 전혀 느낄 수 없다. 카타르의 화려한 마천루와 깨끗한 거리에서 가자 지구 전쟁의 참상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카타르에선 가자지구 전쟁과 관련된 움직임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전쟁 당사자인 이스라엘과 하마스, 각각 이들의 후원 세력으로 꼽히는 미국과 이란과는 또다른 이유로 국제사회는 카타르를 주목하고 있다. 바로 중재 외교다.
카타르에선 이번 가자지구 전쟁의 인질 석방과 휴전 관련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9일 무함마드 빈 압둘라흐만 알 사니 카타르 총리 겸 외교부 장관의 중재 아래 윌리엄 번스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과 다비드 바르니아 이스라엘 모사드(정보기관) 국장이 만나 추가 인질 석방과 휴전 가능성 등에 대해 논의했다.
지난달 12일에는 토니 블링컨 미 국무부 장관이 카타르를 방문해 타밈 빈 하마드 알 사니 국왕을 만나 이번 사태 해결을 논의했다.
작지만 성과도 있었다. 현재 하마스는 242명의 인질을 억류 중인데, 지난달 20일과 23일 각각 2명(총 4명)의 인질을 풀어줬다. 이들 모두 카타르의 중재를 통해 풀려났다. 당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관련 성명에 ‘카타르에 대한 감사’ 메시지도 담았다.
● 탈레반, 이란 관련 중재 경험도 풍부
가자지구에서 멀리 떨여져 있는 카타르는 어떻게 이번 사태의 중재자가 된 것일까.
일반인들 사이에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카타르는 그동안 중동의 외교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일단 가자지구 전쟁과 관련해 카타르는 이해 당사자인 하마스, 이스라엘, 미국, 이란과 모두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다.
무엇보다 도하에는 하마스의 정치사무소가 자리 잡고 있다. 2012년 문을 연 하마스 정치사무소는 하마스와의 대외창구 역할을 해 왔다. 쉽게 말해, 하마스와 가장 공식적이면서도 체계적인 협상을 진행할 수 있는 곳이 카타르인 것. 하마스 최고지도자 이스마엘 하니예가 카타르에 자주 머물렀던 이유이기도 하다. 하마스 정치사무소는 하마스와의 소통 채널이 필요한 미국과 서방, 중동의 외교 중심지가 되고 싶은 카타르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면서 문을 열게 됐다.
카타르에는 아프가니스탄을 통치 중인 무장정파 탈레반의 정치사무소도 자리 잡고 있다. 2013년 문을 연 탈레반 정치사무소 역시 탈레반과의 협상 창구 구축을 위해 설립됐다. 하마스 정치사무소처럼 미국과 서방도 탈레반 정치사무소가 도하에 문을 여는 것에 동의했다.
실제로 미국의 아프간 철수를 위한 탈레반과의 협상도 도하에서 주로 진행됐다. 특히 2019년 2월25일부터 3월12일까지 2주 넘게 진행된 미국과 탈레반 간 초기 협상이 도하에서 진행됐다. 2021년 8월 미국과 서방 인력들이 아프간에서 철수할 때는 카타르 정부의 도움을 받았고, 대거 도하를 경유했다. 카타르가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한 것.
카타르는 하마스와 탈레반 뿐 아니라 미국을 포함한 서방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 카타르에 있는 미 공군의 알 우데이드 기지는 미군의 중동 내 핵심 자산으로 꼽힌다. 미국 본토 밖의 공군기지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유럽에서 천연가스 부족 현상이 발생하자 카타르는 유럽 국가들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에도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이스라엘과는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과 달리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진 않았다. 하지만 두 나라 관계는 원만한 편이다. 카타르는 1996년 이스라엘과 무역대표부를 개설하기도 했다. 비록 2008년 이스라엘의 대규모 가자지구 공습 뒤 무역대표부가 폐쇄됐지만 특별히 두 나라 관계가 악화되진 않았다. 2007년 1월에는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총리가 카타르를 방문하기도 했다.
한국과 관련된 중재 경험도 있다. 올해 8월 한국에 동결돼 있던 이란의 원유 수출 대금 60억 달러를 해제하던 때였다. 당초 해당 자금은 카타르의 금융기관을 거쳐 이란으로 전달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난달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배후에 이란이 있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이 자금은 카타르 금융기관에 계속 동결돼 있다.
● 중재 외교와 다양한 진영과의 우호 관계 형성에 ‘올인’
카타르가 다양한 진영과의 우호 관계 구축, 나아가 중재 외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지정학적 위치가 크게 작용했다.
카타르는 중동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며 이슬람 종파, 정치체제, 지역 패권을 놓고 경쟁 중인 사우디아라바이아와 이란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나라 크기는 한국의 경기도 정도다. 자국민도 2021년 기준 33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카타르 총 거주자 수는 약 260만 명).
천연가스와 석유 매장량에서 각각 세계 3위와 14위(영국 에너지기업 BP의 2020년 통계)에 오를 만큼 자원 강국이지만 안보적으로는 언제든지 불안한 상황에 놓일 수 있는 것.
이런 안보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카타르는 사실상 모든 진영과 원만한 관계를 구축하고,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진영 간의 중재를 적극 진행해 왔다.
사우디가 중심이 돼 구성한 아랍, 수니파, 왕정 산유국 정치경제 협력체인 걸프협력회의(GCC·회원국은 사우디, 카타르, UAE, 바레인, 쿠웨이트, 오만) 국가들이 시아파 종주국이며 왕정을 무너뜨리고 신정 공화정을 세운 이란과 거리를 둬 온 것과 달리 카타르는 이란과도 적극적으로 우호 관계를 구축해 왔다. 여기에는 세계 최대 해상 천연가스 유전(카타르령 노스돔, 이란령 사우스파)을 이란과 공유한다는 이유도 있다.
아랍 왕정에 부정적이며 근본주의 이슬람 사상을 전파해온 정치단체 ‘무슬림 형제단’의 활동을 사우디, UAE, 바레인 등은 금지해 왔다. 반면 카타르는 무슬림 형제단 구성원의 정치적 망명을 허용하는 등 중립적 자세를 취해왔다. 사우디가 잠재적 패권 경쟁자로 생각해 거리를 둬온 오스만제국의 후예 튀르키예와도 카타르는 가깝다.
이처럼 진영을 넘나드는 외교안보 전략으로 한때 카타르는 사우디, UAE, 바레인 등으로부터 외교와 무역 관계가 끊기고, 영해와 영공도 폐쇄되는 ‘카타르 단교 사태’를 겪기도 했다. 당시 단교 주도국들은 카타르가 이란, 튀르키예, 무슬림 형제단 등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단교 이유로 지적했다. 단교 사태는 2017년 6월부터 2021년 1월까지 이어졌다.
● ‘중재 외교’ 부담도 커져…하마스 관계 설정도 골칫거리
단교 사태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카타르는 천연가스와 석유 판매를 통해 얻은 막대한 오일머니로 비교적 위기를 안정적으로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가 숙원 사업이던 ‘2022 월드컵’도 잘 치렀다.
그리고 카타르는 가자지구 전쟁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안전한 인질 석방’과 ‘휴전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국제사회의 시선은 카타르에 집중될 것이다.
하지만 카타르의 진영을 넘나드는 외교 전략과 중재자 역할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중립을 지향하던 스웨덴, 핀란드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뒤 서둘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지금 같은 양극화 시대에 지속적으로 모든 진영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한다는 건 쉽지 않다.
중재국 역할과 관련해서도 성공했다고 결론짓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분석도 있다. 김은비 국방대 안보정책학과 교수는 “중재국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다는 건 협상뿐 아니라 협상 뒤 이행해야 할 사항을 관리하는 것도 포함된다”며 “카타르가 협상 뒤에도 이 같은 역할을 안정적으로 잘 해 낼 수 있는 지는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마스와의 관계 재설정도 카타르에게 내려진 숙제다. 지금까지 카타르는 하마스에 우호적이었고, 미국과 이스라엘도 이를 인정했다. 하지만 이번 가자지구 전쟁으로 미국과 이스라엘이 카타르가 지금까지 하마스에 보여온 우호적인 스탠스를 인정할지는 미지수다.
지난달 워싱턴포스트(WP)와 로이터는 카타르가 하마스에 납치돼 있는 인질 석방 문제가 해결되면 하마스와의 관계를 재검토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김 교수는 “카타르가 하마스와 지금 같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큰 압박이 따를 것”이라며 “다만 향후 가자지구 복구와 현지 거주 민간인 지원 등에는 적극 나설 수 있다”고 내다봤다.
도하=이세형 기자‧전 카이로 특파원 turt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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