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전쟁은 중동서 끝나지 않는다…미국이 아시아에 관심 끌 수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전쟁으로 세계 안보 지형도 요동치고 있다. 중동과 지리적으로 떨어진 동남아시아도 예외는 아니다.
40년 넘게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및 국제 관계를 연구한 전문가 카위 총키타완(69) 태국 출라롱꼰대 국제안보연구원(ISIS) 선임연구원은 8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한국일보와 만나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갈등이 도미노처럼 아시아에도 파급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며 “특히 미국의 아세안 경시와 지역 내 극단주의 발현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흔들리는 ‘피벗 투 아시아’
카위 연구원이 꼽은 가장 큰 우려는 미국의 ‘아세안 패싱’이다. 그는 “중동 전쟁 여파로 미국의 아세안 정책에 힘이 빠지고, 미국을 바라보는 동남아 각국의 시각도 변할 것”이라고 말했다.
2021년 1월 출범한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시절 표방했던 ‘피벗 투 아시아(Pivot to asia·아시아 중시 정책)’를 강조하며 외교 안보 중심축을 아시아 지역으로 옮기겠다고 밝혔다. 한국, 일본은 물론, 중국의 입김이 커진 아세안 지역 역시 주요 협력 대상으로 꼽았다.
이후 미국은 아세안과의 관계를 최고 수준인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로 격상하고, 1억200만 달러 규모 지원을 약속했다. 5년간 공석이었던 아세안 주재 미국 대사도 임명했다.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문제가 ‘발등의 불’이 되면서 아세안은 외교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바이든 대통령이 올해 9월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역내 최대 행사인 아세안 정상회의는 건너뛰고 회원국 중 하나인 베트남만 방문한 게 대표적이다. 미국이 비동맹주의를 고수하는 아세안 대신 중국 견제에 필요한 국가만 취사 선택하는 외교 전략을 선택하자 “아세안에 대한 모욕”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카위 연구원은 “미국이 더 시급하다고 여기는 다른 문제로 눈을 돌릴 때 동남아에 관심을 두지 않은 전례가 있다”며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라는 두 개의 전쟁 앞에 놓이면서 백악관의 초점이 아시아에서 더욱 후퇴할 가능성이 커졌다”고 내다봤다.
카위 연구원은 “오는 15~1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미국이 아시아에서 멀어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여 줄 풍향계가 될 것”이라며 “이번 회담에서 미국의 (아세안에 대한) 구애가 쇼맨십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난다면 아세안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약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극단주의 가능성 배제 어려워”
전 세계 여론이 '친(親)이스라엘 대 반(反)이스라엘'로 분열되는 양상 역시 역내 갈등을 부추길 수 있다고 카위 연구원은 짚었다. 그는 ‘동남아에 극단주의가 나타날 것이라고 보느냐’는 질문에 “개인적 추측일 뿐”이라는 조건을 달면서도 “가능성을 배제하긴 어렵다”고 답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이스라엘 또는 하마스를 지지하는 세력이 똘똘 뭉치고, 혼란과 혐오 정서 확산을 틈타 극단적인 위협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아세안 10개 회원국은 서로 다른 정치 체제와 인종, 종교에도 ‘아세안’이라는 이름 아래 반세기 넘게 한목소리를 내왔다. 그러나 중동 전쟁으로 ‘종교’가 갈등 전면에 등장하면서 사분오열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군사적으로 긴밀한 관계인 싱가포르는 하마스의 기습 공격을 규탄했고, 무슬림 인구가 다수인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이슬람 형제국’ 팔레스타인을 공개적으로 지지한다.
지난달 7일 전쟁이 시작된 후 아세안 지역에서 극단주의 조짐이 고개를 들고 있다는 분석은 이뿐만이 아니다. 로렌스 웡 싱가포르 부총리는 6일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 적대 행위가 시작된 후 싱가포르 내 극단주의 사이트 트래픽이 3배 이상 늘었다”고 발표했다. 같은 기간 유대인 또는 무슬림 공동체를 겨냥한 극단적 발언이나 위협으로 경찰에 신고된 사례도 8건이다. 지난해 1년간 같은 이유로 신고된 건수와 동일하다. 동남아 전문 매체 베나르뉴스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지상 공격 같은 상황은 동남아 내 지하디스트(이슬람 성전주의자)가 집결할 명분을 제공하는 촉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다만 카위 연구원은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아세안 갈등과 분열로 이어질 것이라는 일각의 주장에는 “그렇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아세안은 중동 화약고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발칸반도 화약고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갈등에서 모두 ‘두 국가 해법(각각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방안)’을 지지한다. 현 상황을 바라보는 각국의 입장은 다르지만 해결책은 같기 때문에 분열 양상은 깊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자카르타= 허경주 특파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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