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트레킹 | 일본 산단쿄三段峽] 休(휴) 소리나는, 산단쿄에선 걷는 것이 쉬는 것

신준범 2023. 11. 13.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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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특별명승으로 지정된 일본 최고의 원시계곡 6.7km 트레킹
어떤 이는 산단쿄를 감각이 녹아내리는 계곡이라 했다. 아름다움 탓도 있지만 편안하여 긴장과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때문이다.

기대 없이 간 곳이었다. 풍경에 대한 기대도, 사람에 대한 기대도 없이, 먼 산만 바라보기 일쑤였다. 용량이 다 찬 메모리처럼, 어떤 화려한 경치도 눈에 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산단쿄三段峽는 화려하지 않지만 편안했고, 유명하지만 겸손했다. 그냥 산단쿄를 걷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걷는 내내 휴休 하는 소리가 따라오고 있었다.

산단쿄는 아무도 없었다. 평일이긴 하지만 유명한 곳인데, 고요했다. 주차장에서 몇 개의 건물을 지나자 곧장 녹음이었다. 처음 본 순간 훅하고 빨려들었다. 거대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데, 계곡 그 자체의 계곡이었다. 모든 계곡의 어머니 같은 편안함이 있어 자연스런 흡입력으로 사람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붉은 철난간이 있는 다리를 지나자, 산단쿄라는 딴 세상에 들어선 것이 실감났다. 원시림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밀도 높은 초록색 세상에 들어와 있었다. 계곡을 따라 사면을 걷는 산단쿄 트레킹의 시작이었다.

산단쿄는 히로시마현의 대표적인 절경이다. 산세가 복잡해 예부터 사람이 들어가면 길을 잃고 나오지 못하는 무서운 산이란 이야기가 전하는 히로시마 최고봉 오소라칸산恐羅漢山(1,346m)의 계곡이다. 산단쿄 입구에서 히지리호수까지 13km에 이르는 계곡으로 비경으로 손꼽히는 폭포와 협곡을 품고 있다. 입구에서 호수까지의 표고차는 400m로 전반적으로 완만한 곳이 많다.

서중국 산지국정공원 내에 있는 산단쿄계곡은 1925년 명승으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있다. 1953년 국가특별명승으로 승격되었다. 일본에는 국가특별명승지로 지정된 협곡 6곳이 있는데 서중국과 규슈, 시코쿠까지 포함해도 유일할 정도로 희소가치를 지닌 곳이다. '중국 지방'은 일본에서 가장 큰 섬인 혼슈의 왼쪽 부분에 밀집한 현을 말하며, 서중국은 그중에서도 서쪽 끝에 자리한 야마구치, 히로시마, 시마네현을 뜻한다.

산단쿄에서 가장 유명한 볼거리는 산단다키三段滝, 니단다키二段滝, 사루토비猿飛, 쿠로부치黑淵, 나가부치長淵, 시마이다키姉妹滝, 메오토부치女夫淵, 이시도이石樋, 다츠노구치竜ノ口 등의 협곡과 폭포 풍경이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 계곡을 두고 트레킹이 시작된다. 곧게 뻗은 아름드리 삼나무가 맞아준다. 숲다운 숲과 계곡다운 계곡에 몸과 마음이 천천히 녹아든다. 깨끗함의 극치를 이룬 숲과 계곡을 걷는 것만으로 심신의 위로가 된다.

겨우 두 명이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좁은 길, 관광 인파도, 현란한 식당가도 없다. 이 길에 들어서면 오직 자연만 만날 수 있을 뿐이다. 계곡에서 멀어지나 싶다가도 금세 물소리가 콸콸 들릴 정도로 길은 계곡에 다가서기도 한다. 맞은편 사면에서 떨어지는 폭포가 장관이다. 한국이라면 조망이 좋은 곳마다 안내판과 전망대를 설치했을 텐데, 경치 안내판 같은 인위적인 설명이 거의 없어, 어떤 내력의 명소인지 알기 어렵다.

오히려 그것이 장점이기도 하다. 장황한 설명이 없어 선입견 없이 순수한 자연을 순수한 걸음으로 보고 느낄 수 있다. 위로는 밝은 초록 신록이, 정면에는 협곡의 회색 바위가, 아래는 맑은 파랑의 물결이 흘러간다. 한국 산에서 들어보지 못했던 예쁜 울음의 새소리가 울리고, 피톤치드가 잔뜩 섞였는지 숨 쉬는 것만으로 치유되는 기분이다.

산단쿄의 이름은 산단폭포三段滝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풍경이 중국의 삼협三峽과 닮았다고 하여 이렇게 불렸다는 설이 있다. 부드러운 물결이 어느새 거칠게 변한다. 용의 입을 닮았다는 바위협곡이 용암처럼 폭발적인 박력의 물살을 만들어냈다.

산단쿄에 들어서면 정갈한 삼나무숲이 인사를 해온다.
거친 협곡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길은 내내 평온함을 유지한다(왼쪽). 산단쿄의 대표적인 비경인 흑연을 배를 타고 지나고 있다.

묵은 스트레스를 지워주는 묘한 계곡

강약을 조절하며 계곡을 따라 걷는 사이, 눈과 마음의 초점이 또렷해졌다. 살짝 땀나게 걷는 사이, 묵은 스트레스도 계류를 따라 저만치 떠내려가고 있었다. 화려하지 않지만 사람을 정화시키는 묘한 힘이 있는 계곡이다.

삼나무가 지나간 자리, 거대한 느티나무와 칠엽수, 전나무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고만고만한 서어나무와 동백나무, 물푸레나무와 철쭉이 싱싱함을 더해 산단쿄는 맑은 물과 공기로 빽빽했다.

계곡은 한 굽이 돌아들어갈수록 변화무쌍한 아름다움으로 속세의 끈을 잘라놓았다. 산단쿄에 한번 들어서면 도시의 묵은 것들은 머릿속에서 사라지게 마련이다. 길은 오래 전에 시멘트를 발라 1~2m 폭으로 만든 구간이 많았지만, 이끼가 난간을 이루었을 정도로 자연에 동화되어 있었다.

주차장에서 1시간, 3km를 걷자 흑연黑淵이 나타났다. 깎아지른 절벽이 협곡을 이루고 에메랄드그린의 물빛은 수심이 깊어보였다. 빈 배만 놓여 있는 것이 평소 배를 타고 지날 수 있지만, 뱃사공이 없다. 빛깔 고운 협곡을 바라보며 입맛만 다시고 길을 따라 걷는다. 모처럼 가파른 길, 협곡을 따라 길을 낸 탓에 한동안 물결치며 고도를 높였다가 내려선다.

트레킹 초반과 달리 다양한 활엽수들이 나타난다. 고로쇠나무, 가죽나무, 계수나무, 초피나무처럼 국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들이다. 길 한쪽 사면은, 며칠 전 내린 비 때문인지 예쁘장한 이끼 벽 폭포가 자주 나타난다. 한여름에 찾더라도 나름 걷는 맛이 있을 것 같다.

산단쿄의 대표적인 비경인 흑연 협곡을 지난다. 만리장성마냥 휘어진 길이 험한 산세에도 불구하고 안전하게 이끌어준다.
지계곡에서 산단쿄로 흘러내리는 폭포가 여럿 있어 길은 지루하지 않다.

협곡을 이루던 계곡은 다시 넓어지며 설악산 수렴동계곡 같은 풍모로 변신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유명 계곡 몇 개를 섞어 놓은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배를 타고 지나는 흑연 같은 협곡은 산단쿄만의 개성이다.

2개의 흔들다리가 나타나는데 사삼교(57m)와 남봉교(27m)다. 1988년의 기록적인 호우로 길이 유실되어 우회로로 다리가 만들어졌다. 사삼교는 뱀처럼 꽈리를 틀고 자란 오래된 삼나무가 있어서 유래한 이름이며, 남봉교는 산단쿄를 널리 알린 웅남봉이라는 사람을 기리기 위해 지은 이름이다.

난데없이 나타난 검은 굴. 왕성동문王城洞門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굴이다. 거대한 바위가 길을 막고 있어 우회할 방법이 없어 수작업으로 암벽을 뚫어 길을 연결했다고 한다. 10m의 동굴 속에 들어서자 온 몸이 서늘한 것이 여름 명소로 제격이다.

5km를 넘게 걷자 이제야 풍경이 비슷비슷해 보인다. 문득 서서 주변을 둘러본다. 고개를 들어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과 고운 물살을 바라본다.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계곡처럼 깨끗해졌다. 산단쿄에선 걷는 것이 쉬는 것이자, 치유 받는 것이었다.

트레킹 Tip

산단쿄 입구三段峽 正面口 주차장에서 도로를 만나는 지점(미즈나시구치水梨口)까지 걷는 6.7km 트레킹이 일반적이다. 3시간 정도 걸린다. 전반적으로 완만해 난이도는 쉬운 편이다. 외길이라 길찾기는 쉽다. 산단쿄는 대중교통편이 없고 원점회귀가 어려워 여행사를 이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월간<山>은 일본 현지 여행사인 'N TRAVEL TOKYO'와 협업해 '산단쿄·타이샤쿠교 休 트레킹' 여행상품을 운영 중이다.

문의 월간<山> 여행팀 010-4252-5328, 02-724-6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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