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를 찢은 이정현, 허재의 향수가 느껴진다
최근 리그에서 가장 핫한 토종 선수를 꼽으라면 고양 소노 스카이거너스 이정현(24‧187cm)을 빠트릴 수 없다. 지난 시즌 전신 캐롯 시절 소노는 약체 평가에도 불구하고 4강까지 진출하는 미라클 행보를 선보였다. 플레이오프에서 간판스타 전성현(32‧188.6cm)이 부상 후유증으로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지만 외국인선수 디드릭 로슨(26‧201cm)에 더해 한단계 진화한 이정현이 그 선봉장이었다.
놀라운 퍼포먼스를 선보인 이정현에 대해 많은 이들은 올시즌 한단계 더 올라설 것으로 예상했는데 그 기대에 걸맞게 시즌 초부터 펄펄 날고 있다. 소노는 전성현의 컨디션이 지난 시즌만 못한데다 로슨의 공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습이다. 설상가상으로 수비와 허슬에서 팀에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었던 허슬 대장 김진유마저 부상으로 빠져있는 상태다.
연패가 길어졌고 그대로 하위권으로 추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았다. 하지만 최근들어 소노는 다시금 특유의 양궁 농구를 선보이며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정현이 확실한 토종 에이스 역할을 해주는 덕이 크다.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에서의 존재감을 올 시즌 정규시즌에서도 이어가고 있다는 평가다.
이를 입증하듯 9경기를 치른 현재 평균 20.89득점(전체 7위, 토종 1위), 3.44리바운드, 7.22어시스트(전체 2위), 1.44스틸, 0.22블록슛으로 리그 에이스급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소노의 지난 시즌 같은 돌풍은 쉽지 않을 것이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얇은 선수층 등 객관적인 전력도 떨어졌지만 무엇보다 로슨의 빈자리를 채우기가 어려워 보였기 때문이다.
소노는 골밑에서 활약을 해줄 주전급 빅맨 자원이 없다. 이에 있는 한도 내에서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것에 능한 김승기 감독은 양궁 농구를 택했고 전성현, 이정현 쌍포가 중심에 섰다. 하지만 가장 영향력 있는 키플레이어는 사실 로슨이었다. 로슨은 외롭게 골밑을 지키면서도 묵묵하게 상대팀 장신 외국인선수를 나름 잘 막아줬고 공격시에는 내외곽을 넘나들며 제몫을 톡톡히해줬다.
무엇보다 워낙 BQ가 좋고 넓은 시야까지 갖추고 있는지라 리딩까지 상당 부분 맡아줬는데 이는 소노 농구에서 컨트롤타워같은 역할로 작용했다. 이정현과 전성현의 앞선은 공격력은 위력적이지만 패싱게임에서 강점이 높은 조합은 아니다. 전성현은 전형적인 전문 슈터이며 이정현 또한 본래는 슈팅가드를 봤으며 1번으로 전향한지 얼마되지 않았다. 더욱이 리딩, 패스보다는 공격 위주의 듀얼가드다.
상대적으로 볼 흐름이 빡빡해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로슨이 제2의 포인트가드 역할을 잘 해줬기에 소노는 안정적인 팀플레이를 경기 내내 가져가는게 가능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인해 로슨을 잡지 못했고 이는 지난 시즌까지 만들어놓은 김승기 농구의 한축이 무너져버리는 악재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로슨의 위력은 그를 영입한 다음 승승장구하고 있는 DB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팀을 승리로 이끄는게 에이스다. 김감독은 시종일간 ‘이정현은 더 잘할 수 있는 선수다’며 독려를 멈추지 않았고 이정현 또한 결과로서 감독의 믿음에 보답하고 있다. 단순히 개인기록만 좋은게 아닌 흔들리는 소노의 중심을 꽉 잡고 승리의 선봉장으로서 맨 앞에서 달리는 중이다.
12일 고양 소노아레나에서 있었던 KCC와의 일전은 이정현이 얼마나 높은 레벨의 선수로 발전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던 한판이었다. KCC는 시즌 전부터 '골리앗'으로 불릴 만큼 엄청난 전력을 자랑하는 슈퍼팀이다. 기존 허웅, 이승현, 정창영에 최준용, 이호현까지 새로 영입됐다. 군복무 중인 송교창도 돌아올 예정이다.
외국인선수 알리제 존슨 또한 특급 테크니션으로 주목받고 있다. 가뜩이나 약한 선수층에 김진유에 이어 주포 전성현까지 부상으로 나서지 못하게 된 소노 입장에서는 답이 없어 보였다. 경기전부터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다는 얘기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소노에는 이정현이 있었다. 부산항이라는 새로운 무대를 쓰게 된 거대 함대 이지스함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워낙 장신 가드가 많은 상황에서 이정현의 사이즈는 아주 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드들은 이정현과 매치업되면 미스매치되어 버리기 일쑤다. 탄탄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을 바탕으로 몸싸움에서 압도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날도 그랬다. 비슷한 사이즈의 허웅이 붙었지만 몸으로 퉁퉁 치고나가며 어렵지 않게 포스트 인근 공간을 뚫어냈다.
이승현이 붙으면 빠른 발과 스텝으로 페이스업을 시도했는데 그 과정에서 힘좋은 4번 이승현과 몸이 부딪혀도 밸런스를 잃지 않는 모습이었다. 빠르게 골밑으로 치고 들어가다가 순간적으로 멈춰서서 쏘는 턴 어라운드 점퍼에 이승현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누가 붙어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보다 작거나 비슷하면 힘으로 눌렀고 한참 차이나게 큰 선수는 스피드로 농락해버렸다. 그 과정에서 빈틈이 생기면 망설이지 않고 3점슛을 던져댔는데 탑, 코너를 가리지 않는 것은 물론 딥3까지 적중시키며 KCC수비를 멘붕에 빠트렸다. 개인기로 제치고, 스크린을 이용하고 거기에 받아먹는 슛까지…, 이날 경기만 보면 돌파와 패싱능력을 갖춘 전성현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에 자신에게 수비가 붙으면 빈틈의 동료들에게 적절하게 패스를 잘 찔러주었으며 포스트에서 자리잡고 있는 외국인선수 제로드 존스에게 넣어주는 엔트리 패스도 안정적이었다. 결국 이정현은 북치고 장구치며 전방위로 활약하며 29득점(3점슛 6개), 2리바운드, 6어시스트 전방위 활약으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야말로 '에이스는 이런 것이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 한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 그리고 올 시즌 초반 맹활약을 펼치고 있는 이정현에 대해 ‘허재의 향수가 난다’는 이들도 적지 않다. 단순히 고르게 이것저것 잘하는 테크닉만을 말하는게 아니다. 때론 파워로, 때론 스피드로 미스매치를 만들어내여 붙는 족족 잡아먹는 것을 비롯 이른바 미친 활약을 통해 동료들까지 살려내며 승부의 만능키 역할을 펼치는 모습이 상당 부분 닮아있다.
허재는 현역 시절 승부의 화신으로 악명높았다. 한창 전성기가 지난 후에도 이겨야 한다고 마음먹은 경기에서만큼은 우직하게 밀어붙여 상대 수비진을 초토화시키고는 했다. 허재가 이를 악물고 나오면 대부분 팀들은 그 한명을 막지 못해 쩔쩔매고는 했는데 워낙 패싱 센스가 좋은지라 질 좋은 패스를 통해 동료들의 경기력까지 올려주기 일쑤였다. 신바람이 나거나, 화가 난 허재는 상대팀 입장에서 악몽 그자체였다.
현재의 이정현이 그렇다. 아직 갈 길이 멀기는 하지만 탄탄한 몸, 폭발적인 운동신경, 강한 승부 근성과 두둑한 뱃심 등 상당 부분에서 흡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신인 시절 다치기 전의 김민구가 허재 이후 최고의 가드가 될 재능을 보였지만 그는 허재같은 야생마보다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능글맞은 농구 도사 스타일에 가까웠다.
반면 이정현은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같은 느낌으로 그야말로 코트를 종횡무진 질주하고 있다. 올 시즌 내내 이정현이 지금처럼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소노의 선수 구성상 이정현에 대한 의존도가 크고 상대 팀에서도 집중견제와 더불어 계속해서 약점을 찾아내려 할 것이 분명하다. 그것을 이겨내고 계속해서 성장해나간다면 우리는 ‘21세기의 허재’를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문복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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