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보는’ 명품 조연 임성재…단 한장면으로 시작된 존재감
‘우영우’ 이어 ‘최악의 악’으로 명품 조연 우뚝
“와… 아, 20년 세월 허무하네….”
지난달 25일 종영한 디즈니플러스(OTT) 오리지널 드라마 ‘최악의 악’ 7회. 조직폭력배 최정배(임성재)는 믿고 따랐던 형님 정기철(위하준)이 자신의 신의를 의심하자 울컥하며 이 한마디를 내뱉는다. 감정을 꾹꾹 누르다 풍선 바람 빠지듯 피식 토해낸다. 지난달 24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임성재(36)는 “대립이 아니라 형에 대한 서러움을 보여주고 싶었다. 화도 나고, 어이없고, 형이 여자 때문에 흔들리는 게 안타깝기도 한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한다. 조폭 드라마의 익숙한 클리셰 같은 장면은 임성재의 감정과 호흡으로 ‘최악의 악’ 명장면으로 거듭났다.
시청자들한테는 ‘명품 조연 임성재’를 깨우쳐준 순간이기도 했다. 이 장면이 방영된 뒤 누리꾼들은 임성재의 전작을 추천하며 그를 칭찬 감옥에 가두었다. “맞다, 이 배우 ‘타겟’에서 두 얼굴 연기 소오름이었어!” “‘변산’에선 정말 능청스러웠어!” “아재 개그 날리던 순박한 ‘우영우’ 털보 사장님!” 각자가 기억하는 장면 속에 모두 다른 얼굴의 임성재가 존재하고 있다. 대사 한마디, 동작 하나 오래 고민하며 진국 같은 장면을 빚어왔기 때문이다. “전 등장 장면이 많지 않아 한 장면이라도 잘해내지 않으면 만회할 기회가 없잖아요. 그런 생각으로 현장에 가기 전 준비를 많이 하려고 해요. 인물에 최대한 가깝게 접근해 시청자들을 납득시키는 데 공을 들입니다.” ‘최악의 악’에서는 최정배가 10회에서 ‘의외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에 시청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1회부터 감정 조절을 해왔다고 한다.
‘최악의 악’은 이신기, 차래형, 이정헌 등 수많은 조연들이 제 역할을 하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조연이 곧 주연이란 사실을 깨닫게 한 작품이다. 그 가운데에서 임성재는 출연작 중에서 가장 긴 호흡인 12부작 드라마를 거뜬하게 소화하며 배우로서 입지를 탄탄하게 했다.
임성재는 작품마다 존재감이 강렬했지만 ‘○○ 전문 배우’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지 않으며 극에 잘 스며들었다. 처절한 농민(‘자산어보’), 20대 인턴(‘허쉬’) 등 다양한 성격과 연령대로 연기 폭이 넓다. 특별히 외적으로 변화를 주지 않는데도 선인에서 순식간에 악인이 된다. 요즘 그를 눈여겨본다는 한 드라마업계 관계자는 10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눈빛에 날카로움과 부드러움이 모두 담겨 있다. 얼굴을 잘 쓸 줄 아는 배우”라고 했다. 임성재는 손사래를 쳤다. “이목구비가 작고 밋밋해서 가만있으면 어려 보이고 웃으면 주름이 드러나 나이 들어 보여서 여러 역할을 맡는 것 같아요. 원래 이렇게 생기면 장점이 많아요. 하하하.”
말은 그렇게 해도 이미 2018년 ‘변산’으로 데뷔할 때부터 오랜 연극 생활 덕에 기량이 올라와 있는 배우였다. 그와 ‘변산’ ‘자산어보’를 함께 작업한 이준익 감독은 9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당시 신인이었는데도 현장에서 두려움이 없었다. 카메라를 의식하거나 머뭇거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고향인 광주광역시에서 고등학교 때 배우를 꿈꾼 뒤 22살 때부터 ‘변산’에 출연하기 전까지 약 10년간 ‘광주 연극인’으로 살았다. 2014년 광주독립영화제가 선정한 ‘광주의 배우’였고, ‘금희의 오월’ 등 5·18 관련 작품에도 꾸준히 출연했다. “고등학교 때 단편영화를 함께 만들었던 감독이자 친한 형이 연기를 본격적으로 배워보면 좋겠다고 해서 극단에 들어갔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많은 것을 배웠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대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극단 생활을 한 거라 생각해요.”
배고픈 연극인 생활이 힘들 때도 있었지만, 그때 차곡차곡 쌓아뒀던 경험은 큰 자산이다. “마당극을 해야 해 판소리를 배웠고, 결혼식장에서 뮤지컬 이벤트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성악을 배우는” 등 보는 이들을 납득시키는 노력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변산’ 이후 작품이 계속 들어오며 주조연으로 우뚝 섰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로 대중적 인지도도 높였다. 마냥 들떠 있을 줄 알았는데 쉴 틈 없이 연기하느라 한때 번아웃도 왔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절 잘 모르는데 저만 힘들었던 거죠. 하하하.” 단순히 바빠서라기보다는 그만큼 연기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하지 못하는 것이 원인인 듯했다. 전 과정을 함께 만들던 연극인들이 조각조각 촬영해야 하는 매체에 발을 디딘 뒤 비슷한 갈증을 겪기도 한다. “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 또한 연기예요. ‘최악의 악’을 하면서 제 감정과 생각이 극을 완성하는 데 보탬이 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더 열심히 하자 다짐하게 됐어요.”
임성재는 그날 있었던 소소한 일들을 메모한다. “예전 집에는 메모지를 벽에 잔뜩 붙여놨어요. 생각날 때마다 바로바로 끄적거리게.” 토막 단상이 많다는데 요즘은 어떤 이야기가 메모지를 채우고 있을까. “가족 구성원 중 한명으로 나오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김운경 작가님의 ‘유나의 거리’ 같은 작품을 좋아해요. 가족 사이에선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잖아요. 여러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는 “한석규·손현주·성동일 선배님처럼 꾸준하게 최고의 기량을 유지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 임성재를 만난 후일담이다. 광주 연극인 시절 2016년 영화 ‘순정’에 단역으로 딱 한 장면 출연한 게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대사도 없고 그날 처음 만난 배우 박정민 옆에서 그저 밥만 잘 먹으면 됐다. 그 모습을 본 박정민이 그를 기억하고 있다가 ‘변산’에 추천했다. 임성재 연락처를 몰라 수소문했다는 이준익 감독은 “박정민이 한 장면 촬영했는데 그게 강렬했다고 하더라. 아니나 다를까, 만나보니 신을 장악하는 힘이 있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임성재는 “‘변산’ 연출부에서 연락이 왔을 때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인 줄 알고 끊었는데, 계속 연락을 주셨다”고 했다. 큰 기대 없이 주변의 권유에 오디션을 보고 촬영에 합류한 그는 5년이 지난 지금 화제작마다 등장해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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