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향녀라 손가락질? 남자들이나 잘하세요”…병자호란 여인들의 절규[이기환의 Hi-story]

이기환 기자 2023. 11. 13.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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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향녀, 화냥년….’ 왜 다짜고짜 욕지거리로 시작하냐고 하시겠네요. 그러나 단순한 욕이 아닙니다.

요즘 장안에 화제를 뿌리고 있는 MBC 드라마 ‘연인’을 보면 금방 이해할 겁니다.

병자호란 후 청나라로 끌려간 여주인공(길채)이 온갖 고초를 겪고 고향으로 돌아왔죠. 그러나 남편은 다른 여인을 부인으로 삼고 임신까지 시킨 뒤였습니다. 돌아온 부인과 맞딱드린 남편의 말이 기막힙니다.

“부인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없었겠죠?”하고 묻습니다. 동네 사람들도 길채를 보고 “오랑캐에게 더럽혀진 몸. 뻔뻔스럽게…낯도 참 두껍다”고 손가락질합니다. 드라마이다 보니까 좀 과장이 섞이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외려 드라마에서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기막힌 사연들이 역사서에 나와있어요.

사실 ‘환향녀’도, ‘화냥년’도 역사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용어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환향녀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인을 ‘환향녀’로 지칭했고, ‘환향녀=정절을 잃어버린 여인’이라는 뜻으로 ‘화냥년’으로 일컬었다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돌았습니다.

소설 <강도몽유록>의 무대인 강화도 연미정. 병자호란 당시 연미정 남쪽 초막에서 꿈을 꾼 소설 속 청허선사가 강화도 함락 당시 목숨을 잃은 여인 15명의 대화를 엿듣는다. 여인들은 “나라의 수치에 충신으로 의(義)에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고, 매서운 정조를 보인 것은 부녀자 뿐이니 이 죽음은 영광된 것인데 어찌 슬퍼하느냐”고 강화도 수비를 맡은 관리들을 질타한다. |경향신문 자료사진·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하루에 올라온 정반대의 상소문

다른 역사자료를 들춰볼 필요도 없습니다. 1638년(인조 16) 3월11일자 <인조실록>만 봐도 됩니다.

이날 대사헌 및 예조·이조판서와 우의정을 역임한 장유(1587~1638)가 기막힌 상소문을 올립니다.

“제 외아들(장선징·1614~1478)의 처(며느리)가 청나라 군에 잡혀갔다가 몸값을 주고 돌아왔습니다. 더이상 아들의 배필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없습니다. 이혼하고 새장가를 들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그런데 같은 날 전 승지 한이겸(1581~?)은 정반대의 호소문을 올립니다.

“제 딸이 청나라군에 사로잡혀 있다가 몸값을 주고 귀국했는데, 사위가 다시 장가들려 합니다. 원통해서 못살겠습니다.‘

이 무슨 딱한 일입니까. 어떤 이는 ‘환향녀’ 며느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진정서를 올리고, 또 다른 이는 사위가 귀국한 자기 딸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재혼하겠다고 고집한다는 호소문을 제출하고….

난감한 처지에 빠진 예조가 이 문제를 공론에 부쳤습니다.

<병자록>은 “바위나 숲에 숨었다가 적에게 핍박을 당해 물에 떨어져 죽은 자들이 얼마나 되는 지 알 수 없다”면서 “(빠져죽은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마치 연못위의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 같았다”고 묘사했다.|국립중앙도서관 소장·경향신문 자료사진

■‘임진왜란 때도 내치지 않았습니다’

좌의정 최명길(1586~1647)은 단호한 어조로 ‘환향녀’ 편을 듭니다.

“전쟁 중에서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도 진실을 밝히지 못한 여인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리고 사로잡힌 부녀자들이 모두 몸을 더럽혔다고 볼 수 있습니까.”

이날 조정에 공론을 붙였음에도 오로지 최명길의 주장 만이 실록에 실려있는데요.

그만큼 최명길의 주장에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는 거죠. 왜냐면 임진왜란 때도 똑같은 논쟁이 벌어졌는데, 선조가 “이혼 및 재혼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은 적이 있었거든요. 당시 선조는 “적진에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경우와 음탕한 행동으로 절개를 잃은 여인을 견줄 수는 없다”(<조야첨재>)는 ‘단칼 판결’을 내렸거든요.

강화도는 예부터 천혜의 요충지다. 물살이 빠르고 갯벌로 둘러싸인데다 겨울철엔 유빙까지 둥둥 떠다닌다.

최명길은 그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합니다.

“어떤 종친이 적진(왜)에서 돌아온 부인과의 이혼을 청하자 선조께서 불허했습니다. 또 적진으로 끌려간 부인을 두고 다시 장가를 든 관리에게 특명을 내렸습니다. ‘나중에 들어온 부인을 첩으로 삼으라’고요. 이 관리는 본처가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격하된 첩을 정실부인으로 삼았습니다.”

최명길은 “임진왜란 때 고관대작들이 잡혀 갔다가 돌아온 처와 그대로 살면서 자식·손자를 낳아 명문거족이 된 사람도 왕왕 있다”고 매조지합니다. 최명길은 자신이 듣고, 직접 목격한 조선 여인들의 끔찍한 사연을 소개합니다.

“끌려가던 처녀가 청나라 사람들의 갖은 협박과 유혹를 끝내 들어주지 않고 굶어죽었습니다. 또 한 여인은 몸값이 너무 높게 책정되어 귀국할 수 없게 되자 비관자결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처럼 정결한 지조가 있더라도 누가 다시 알아주겠습니까.”

이 정도였으니 공론장에서는 다른 ‘찍소리’가 나올 수 없었던 겁니다. 인조도 최명길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강화도 사수의 명을 받은 검찰사 김경징은 매일 술판만 벌이며 주정을 부렸다. 주변의 충고도 아랑곳없이 아무런 방비책을 세우지 않았다.|경향신문 자료사진
강화도의 관문인 갑곶돈대. 청나라군이 이 돈대를 통해 강화섬에 쳐들어오자 강화도 검찰사 김경징 등은 가족들까지 팽개치고 달아났다. |경향신문 자료사진·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자료

■“여인들의 본심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환향녀와 이혼하고 다른 여인과 재혼하겠다’는 따위의 이야기가 쑥 들어갔겠네요.

불행히도 아니었습니다. 이 날짜 <인조실록>의 결론이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이 뒤로 사대부집 자제는 모두 다시 장가를 들고, 다시 (환향녀와) 합하는 자가 없었다”는 겁니다. 이 날짜 실록의 기록자인 사관의 평론도 기가 찹니다.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거늘~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었다고 할 수 있다.”

사관은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도 의리가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없다”고 목청을 높이며 최명길을 맹비난합니다.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조선을 오랑캐로 만든 자는 최명길”이라고요.

이렇게 당대의 여인들은 못난 임금, 못난 아비, 못난 남편을 만나 붙잡혀 간 것도 모자라 ‘화냥년’ 소리를 들으며 버림받는 수모를 겪었던 겁니다. 여인들의 수난은 1637년 1월22일 강화도가 함락되던 날 시작됩니다.

1638년 3월 신풍부원군 장유가 “며느리가 청국에 잡혀갔다가 돌아왔는데, 더이상 아들의 배필로 인정할 수 없으니 이혼하고 새장가를 들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진정서를 올린다. 같은날 전 승지 한이겸은 “사위가 청나라에서 돌아온 제 딸과 이혼하고 새 장가를 들려고 한다”고는 호소문을 올렸다.

■“경징아 경징아 네가 이럴 수가…”

강화도는 몽골과의 항쟁기에도 그랬듯 ‘금성탕지’, 즉 천혜의 요새로 꼽혔습니다.

인조는 청나라군이 침략하자 영의정 김류(1571~1648)의 아들인 판윤 감경징(1589~1637)을 강화 검찰사로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이게 결정적인 ‘미스캐스팅’이었습니다. 김경징은 무능한데다가 자기만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자신의 가솔과 절친한 친구들을 강화도로 먼저 건너가게 하려고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습니다. 피란민들이 수십리나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는 데도요. 심지어 소현세자빈(강빈·1611~1646)마저 이틀 동안이나 밤낮을 굶주리며 기다려야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세자빈이 “경징아 경징아,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외쳤겠습니까.

게다가 김경징은 적군이 천혜의 요충지인 강화도에 건너올 수 없을 것이라고 큰소리쳤습니다. 매일 술만 퍼마시며 주사를 부렸답니다. 심지어 봉림대군(효종·1619~1659, 재위 1649~1659)이 “술만 마실 때가 아니다”라고 충고해도 “대군이 어찌 말을 하느냐”고 반문하면서 듣지 않았답니다. 그러나 청나라군이 예상과 달리 강화해협을 건너자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강화도는 아비규환이 됐습니다.

최의정 최명길은 “전쟁 중에서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도 진실을 밝히지 못한 여인이 얼마나 많으며, 사로잡힌 부녀자들이 모두 몸을 더렵혔다고 볼 수 있느냐”고 환향녀 편을 든다.

■가족들은 다 죽게하고 도망간 부자

강화 함락의 장본인인 김경징은 가족들은 팽개친채 혼자 몸을 피해 달아났습니다.

어머니(류씨·김류의 부인)과 부인(박씨), 며느리, 그리고 다른 일가의 여인들이 모두 자진했습니다. 김경징의 아내 박씨는 평소 남편에게 “제발 좀 정신을 차리라”고 바른 말을 했답니다. 하지만 김경징은 “여자가 무엇을 아느냐”며 힐책했다죠. 그때 박씨는 “나라가 깨지고 집이 망하면 여자라 해서 모면하겠나”하며 탄식했답니다.

김경징의 아들인 김진표(1614~1671)도 만만치 않습니다. 어머니 박씨를 비롯한 일가 여인들을 다그쳐 자진하게 했습니다.

“적병이 강화도 갑곶진을 건너자 김경징은 늙은 어미를 버리고 배를 타고 달아났다…김경징의 아들 김진표는 제 할미와 어미를 협박하여 스스로 죽게 하였다.”(<인조실록> 1637년 9월21일)

강화 유수 장신(?~1637)의 어머니도 죽었습니다. 강을 건널 때 내관이 봉림대군(효종)에게 “장신의 어머니가 있는데 어찌 하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봉림대군은 “(도주한)아들이 어머니를 모시지 않았는데 난들 어떻게 하냐”고 했다네요.

결국 장신의 어머니는 결국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강변에서 죽고 말았는데요. 아들(장신)도 한심하지만 훗날 임금(효종)이 된 봉림대군의 몰인정도 딱하기만 하죠. 상황이 급박해지면 인간에게 짐승의 본성이 나오나봅니다.

인조는 환향녀와의 이혼을 불허했지만 당대 사대부들은 모두 이혼하고 새장가를 들었다. 실록을 쓴 사관은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었다고 할 수 있다”고 비난했다.

■부인에게 “빨리 죽으라” 겁박한 남편

정선흥이라는 인물의 아내는 청나라 군사가 접근하자 왕족인 회은군 이덕인(?~1644)에게 달려갔답니다. “영감(회은군)은 우리 아버지와 절친하니 저 좀 살려달라”고요. 그러나 회은군이 “내가 어쩌겠느냐”고 난감해했는데요. 그러자 남편인 정선흥이 부인에게 눈을 부릅뜨고 “빨리 죽는게 낫다”고 꾸짖었답니다. 아내가 칼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는데요. 회은군이 남편(정선홍)에게 “빨리 가보라”고 했구요. 가봤더니 아내는 이미 죽어 있었답니다. 청군에게 짓밟힐까 두려워 살려달라는 아내에게 “빨리 죽으라”고 겁박하고, 급기야 죽게 만드는…. 정말 피가 거꾸로 솟을 이야기입니다.

강화도 검찰사가 된 김경징은 자신의 가솔과 절친한 친구들을 강화도로 먼저 건너가게 하려고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물 위에 둥둥 뜬 여인들의 머리수건

그뿐이 아닙니다. 배를 탔던 헌납 홍명일의 부인과 어머니, 친척여인 3명은 적병이 엄습하자 어린 자식과 함께 서로 껴안고 물에 빠졌습니다. 어떤 선비의 아내는 “청나라군이 죽은 사람의 옷을 모두 벗긴다니 내가 죽으면 서둘러 화장하라”고 당부한 뒤 자진했습니다. 토굴에 숨어있던 여인은 적병이 불을 질렀는 데도 나오지 않고 그대로 타 죽고 말았고요. 어떤 여인은 청나라군이 총을 난사해 몸의 살이 다 뜯겨나갔지만 꼿꼿하게 선채 넘어지지 않았답니다.

<병자록>과 <비어고> 등은 “바위나 숲에 숨었다가 적에게 핍박을 당해 물에 떨어져 죽은 자들이 얼마나 되는 지 알 수 없다”면서 “(빠져죽은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마치 연못위의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 같았다”고 묘사했습니다. 머릿수건이 연못위 낙엽처럼 바람을 따라 둥둥 떠있었다니 참….

강화도 검찰사가 된 김경징은 자신의 가솔과 절친한 친구들을 강화도로 먼저 건너가게 하려고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못생겼다’ 타박받은 여인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삼전도의 굴욕(1637년 1월30일) 후 청나라로 끌려간 이가 60만명이 넘는다는 기록(<비어고>)이 있습니다. 그중 상당수가 여인들이었죠. <병자록>은 “철수하는 청군 각 진영에 여자들이 무수했다. 이들이 발버둥치며 울부짖으니 청나라군이 채찍을 휘두르며 몰아갔다.”고 했습니다. <비어고>는 “사대부의 아내나 첩, 처녀들은 차마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고 사람을 보면 더러 옷으로 머리를 덮었다”고 했습니다.

‘굴욕 스토리’, 또 하나…. 삼전도의 굴욕 당시 작성된 항복문서에는 기막힌 내용이 들어있었습니다.

“(청과 조선의)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혼인관계를 맺어 사이좋게 지낸다”(<인조실록> 1637년 1월28일)는 내용이었습니다. 1637년 9월6일 청나라는 “그때의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했습니다.(<심양장계>)

조선은 차일피일 결정을 미뤘습니다. 하지만 청의 재촉이 극심해지자 조선은 관기·관비 등에서 선발한 여인 10명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청나라 장군 용골대는 조선사신 백대규를 꾸짖었습니다.

정선흥의 아내인 권씨는 친정아버지의 지인인 왕족에게 “살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본 남편은 권씨에게 “빨리 죽으라”고 다그쳤고, 부인은 자진하고 말았다. 배를 탔던 헌납 홍명일의 부인과 어머니, 친척여인 3명은 적병이 엄습하자 어린 자식과 함께 서로 껴안고 물에 빠졌다. 어떤 선비의 아내는 “청나라군이 죽은 사람의 옷을 모두 벗긴다니 내가 죽으면 서둘러 화장하라”고 당부한 뒤 자진했다.

“예전 (조선이) 명나라에는 극히 예쁜 여자들만 뽑아 보냈는데, 지금은 저렇게 못생긴 여자들만 보냈는가?”

이게 무슨 소립니까. 당시 청 태종은 조선이 보낸 10명의 여자들을 직접 간택하면서 평양의 장옥, 용강의 영이, 삼화의 업생. 청주의 영춘 등 4명만 황궁에 두었습니다. 나머지는 여러 제후들의 집에 보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못생겼다”고 투덜댄 모양입니다. 그래서 용골대가 “왜 못생긴 여자들만 보냈냐”고 불같이 화낸 거죠.(<심양일기> 1638년 8월21·9월18일) 이게 무슨 수모입니까. 강제로 이역만리 먼 곳으로 떠난 것도 억울한데 ‘못생겼다’는 타박까지 들어야 했으니 말입니다.

토굴에 숨어있던 여인은 적병이 불을 질렀는 데도 나오지 않고 그대로 타 죽었다.어떤 여인은 청나라군이 총을 난사해 몸의 살이 다 뜯겨나갔지만 꼿꼿하게 선채 넘어지지 않았다.

■천양지차 인질 몸값

수모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청나라는 인질들을 성문밖에 모아두고 ‘인간시장’을 열었습니다.

“청인들이 남녀 인질들을 모아놓으니 수만명이 됐다. 모자가 상봉하고 형제가 서로 만나 부여잡고 울부짖으니 곡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심양일기> 1637년 5월17일)

인질 1인당 몸값은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원래 양국간 교섭에 따른 1인당 몸값은 은(銀) 10~30냥 정도였는데요.(<인조실록> 1637년 4월21일·1638년 5월11일) 실제로는 1인당 100~250냥에 이르렀고, 심지어 1000~1500냥을 호가하기도 했답니다.

1637년 2월초 영의정 김류가 ‘첩의 딸’을 빼오려고 용골대에게 1000냥을 부른 적이 있었는데요. 용골대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구요. 그러자 김류는 조선 출신의 청나라 통역관(정명수·?~1653)을 껴앉고 “이제 (조선과 청이) 한 집안 되었으니 잘 좀 봐달라”고 애원했는데요. 그러나 정명수가 손을 뿌리치고 일어났구요. 김류는 망신만 당했는데요.

그래서 “김류가 인질의 몸값만 잔뜩 올렸다”는 비판을 받았답니다.

<병자록> 등 문헌자료는 “철수하는 청군 각 진영에 여자들이 무수했다. 이들이 발버둥치며 울부짖으니 청나라군이 채찍을 휘두르며 몰아갔다.”고 전했다. <비어고>는 “사대부의 아내나 첩, 처녀들은 차마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고 사람을 보면 더러 옷으로 머리를 덮었다”고 했다.|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제공

■결국 이혼을 허락받은 장유의 외아들

그렇게 돌아온 여인들에게 사람들은 ‘오랑캐군에 끌려갔다가 정절을 잃고 귀환한 여인들’로 낙인 찍은 겁니다.

맨처음 인용한 장유의 외아들(장선징)의 경우를 볼까요. 처음에는 최명길의 서슬퍼런 ‘아니되옵니다’ 주장에 ‘이혼 및 재혼 불가 판정’을 받았는데요. 진정서를 제출한 장유는 6일만인 1638년 3월17일 타계했습니다.

그런데 2년 6개월 뒤인 이 문제가 재론됩니다. 참 끈질깁니다.

이번에는 장유의 부인(김씨)이 외아들(장선징)의 이혼을 허락해달라는 상소를 올린 겁니다. 김씨는 “(환향녀인) 며느리가 타고난 성정이 못되어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있다”는 ‘칠거지악(七去之惡)’의 조목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인조는 “공신의 외아들인만큼 이번만 예외로 이혼을 허용한다’는 명을 내린 뒤 “다만 관례로는 삼지 마라”고 신신당부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도 지키지 않는 법인데, 이런 예외를 두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청나라는 항복문서에 적힌 ‘결혼 맹약’ 건을 흘려보내지 않았다. 청나라는 7개월이 지난 1637년 9월들어 “청나라 황제에게 왜 조선 여인을 바치지 않느냐”면서 “명나라에 그런 전례가 있으니 빨리 보내라”고 재촉한다.

누더기법이 되는 거죠. 결국 1649년(효종 즉위년) 11월 21일 ‘환향녀와의 이혼 금지법’은 공식 폐기됩니다.

그 이후에도 ‘환향녀’ 논쟁은 끈질기게 이어지는데요. 심지어 강화도~개성 구간에서 청나라군에 붙잡혀있다가 돌아온 여인에게도 ‘환향녀’의 낙인을 찍었답니다. <현종실록>(1667년 9월20일)을 쓴 사관의 평가가 기가 막힙니다.

“청나라 사람에게 잡혀갔다가 구차하게 돌아왔으니 허물이 있다…그 아들도 어지러운 집안의 자식임을 면치 못한다….”

기가 막히죠. 청나라까지도 아닌, 강화도~개성 구간만 붙잡혔다 돌아온 여인에게까지 ‘환향녀’라는 주홍글씨를 새겼네요.

전쟁이 끝난지 30년이 지났는데요. 대체 어쩌라는 말입니까. 청나라에 잡힌 여인들은 모두 자결이라고 해야 했단 말입니까.

조선은 처녀 10명을 청나라 조정에 시집보냈지만 청나라는 “예전 (조선이) 명나라에는 극히 예쁜 여자들만 뽑아 보냈는데, 지금은 저렇게 못생긴 여자들만 보냈느냐”고 타박했다.|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정절’보다 ‘충의’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강도몽유록>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강화도에서 죽은 15명 여인들의 혼령이 연미정(강화도)에 모여 한많은 사연을 토로하는 꿈 이야기인데요. 무능한 아들(김경징)에게 강화 수비를 맡긴 것을 한탄한 어머니(류씨) 등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여인인 기생이 순절한 여인들을 찬양하는 구절이 심금을 울립니다.

“나라의 수치에 충신으로 의(義)에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고, 매서운 정조를 보인 것은 부녀자 뿐이니 이 죽음은 영광된 것인데 어찌 슬퍼하십니까.”

맞습니다. 이쯤에서 한번 묻고싶어요. 남성들이 여성들의 ‘정절’을 그다지도 따졌죠. 그럼 ‘충과 의’를 신줏단지 모시듯 지켜야할 남성들은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참고자료>

김남윤, <조선여인이 겪은 호란, 이역살이, 환향의 현실과 기억-소현세자빈 강씨를 중심으로>, ‘역사연구’ 제17호, 역사학연구소, 2007

소현세자 시강원, <심양장계(심양에서 온 편지)>, 정하영·박재금·김경미·조혜란·김수경·남은경 역주, 창비, 2008

이명현, ‘환향녀 서사의 존재 양상과 의미’, <동아시아고대학> 60권60호, 동아시아고고학회. 2020

정약용,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정해렴 역주, 현대실학사, 2001

조혜란, ‘강도몽유록 연구’, <고소설연구> 11권11호, 한국고소설학회, 2001

히스토리텔러 기자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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