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죄 없이 ‘전세지옥’에 빠졌다”

심윤지 기자 2023. 11. 13.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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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했던 청년의 삶을 앗아간 ‘전세사기’ 생생한 기록
전세사기 피해당사자의 시각으로 전세제도의 문제점을 다룬 <전세지옥> 저자 최지수씨가 8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여다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centing@kyunghyang.com
녹물·바퀴벌레…기숙사를 탈출
사람답게 살고 싶었던 최지수씨
‘천국’에 들어섰다는 기쁨은 잠시
‘지옥’의 서막을 알린 경매통지서

정부는 전세사기 피해자 최지수씨(32)를 이렇게 기록할 것이다. “선순위 근저당이 있는 천안의 한 다가구주택에 보증금 5800만원짜리 전세로 들어갔다. 근저당 설정 당시 최우선 변제금 기준보다 800만원이 많았다. 세입자에게 우선매수권을 부여한 전세사기특별법이 통과되기 두 달 전 경매가 끝나버린 탓에 최씨는 ‘안타깝게도’ 보증금 한 푼도 건지지 못한 채 그 집에서 쫓겨났다. ‘다행히’ 전세피해확인서를 발급받아 3개월간 긴급생계지원금을 수령했다.”

최씨는 자신이 쓴 책 <전세지옥>을 통해 자신의 서사를 바로잡는다. “바퀴벌레 소굴인 회사 기숙사를 탈출해 ‘사람답게 살고 싶어’ 그 집에 들어갔다. 오래 준비한 해외취업 면접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그날, 현관 앞에 붙은 경매통지서를 보고 ‘전세지옥’이 시작됐음을 알았다. 결국 1년 만에 헝가리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돌아와 주 6일 하루 12시간씩 알바를 했다. 매달 대출금만 300만원씩 갚았다. 신라면 하나 사 먹기 어려울 정도로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다.”

<전세지옥>은 전세사기라는 사회적 재난이 평범한 32세 청년이었던 최씨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생생하게 기록한 책이다. 집이 경매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날부터 시청, 법원, 경찰서,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주거복지재단을 오갔지만 정부가 발표한 지원책들은 번번이 그를 비껴갔다. 절망은 깊어졌고 인류애는 사라졌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삶에 대한 기대를, 사람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내 삶이 전세사기 피해자로 끝나도록 방치하지 않겠다”며 악착같이 살아남겠노라 다짐한다. 파일럿 훈련비를 벌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다음달 원양상선을 탈 예정이라는 그를 8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 그 집에 들어갔다

지난 2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전세사기 전국 특별단속 ‘무기한 연장’을 발표하는 합동브리핑 자리에 <전세지옥>을 들고나왔다. “전세사기 피해자의 현실을 느낄 수 있었다”며 “정책의 기초로 삼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고 묻자 최씨는 한참 동안 말을 골랐다. “솔직히 처음 든 생각은 ‘일단 나한테 사기 친 놈은 죽었겠다’였어요. 바로 다음날 경찰 담당 수사관으로부터 ‘엄중 처벌될 테니 걱정 말라’는 전화도 왔고요. 하지만 정부에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솔직히 접었어요. 더는 저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작은 일렁임’이라도 낼 수 있다면 만족해요.”

전세사기를 다룬 책이지만, 책 전반부에서는 야근과 인격모독·과로로 얼룩졌던 회사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오래 서술한다. “제 전세금 5800만원이 그냥 5800만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제 집주인이나 부동산 중개인에겐 껌값일지 몰라도, 저에겐 정말 힘들게 번 돈이었거든요.”

서울에 살았던 최씨가 천안공단에 있는 일본계 회사에 취직한 건 파일럿 훈련비용 1억원을 벌기 위해서였다. 회사 기숙사가 제공되니 주거비를 아낄 수 있을 거라 봤다. 하지만 퇴근을 해도 회사 사람과 방을 함께 쓰다 보니 퇴근을 한 것 같지가 않았다. 녹물이 나오는 수도꼭지, 집주인 행세를 하는 바퀴벌레를 보며 생각했다. 사람답게 살려면 이 집에서 나가야겠다고. 이건 아니다 싶어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30만원의 월세가 부담 됐던 최씨도 많은 청년이 그러듯 전세로 눈을 돌렸다. 당시 ‘리젠트빌라 1004호’를 소개한 중개인은 “이곳에 사는 매일이 천국 같을 것”이라고 했다. 최씨 역시 위험이 아예 없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엔 ‘사람답게 살 만한 집’이 부족한 현실이 있다. “20곳 정도 집을 봤고 그중 5곳이 마음에 들었는데 그런 집은 금방 나가더라고요. 몇곳은 공인중개사였던 큰아버지께도 등기부를 보여드렸는데, 위험하다고 계약을 만류하셨죠. 하지만 당시 천안에선 선순위 근저당이 없는 집을 찾기가 힘들었어요. 환경이 좋지 않아 빨리 나와야 했다 보니 전세사기 위험에 더 노출됐던 것 같아 아쉬워요.”

피해자에게 다시 전세대출 정책
침몰 생존자에게 승선권 주는 격
‘이게 나라냐’ 분노만 더 커질 뿐
하지만, 꿈이 있기에…견뎌본다

“사각 많은 정부 대책, 번번이 날 비껴가”

정부 대책이 안 나왔던 것은 아니었다. 전세사기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온 지난해 말부터 정부는 ‘피해 지원’과 ‘엄중 처벌’을 거듭 약속했다. 하지만 “다른 사기 피해자와의 형평성”을 이유로 이런저런 조건이 붙었다. 최씨는 그 조건을 번번이 비껴갔다.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2·3번째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직후 정부는 전격적인 ‘경매 유예 조치’를 발표했다. 최씨가 살고 있는 리젠트빌라 입주민들도 일말의 희망을 품었고 금융감독원을 비롯한 각종 기관에 진정을 넣었다.

하지만 정부의 경매 유예 조치는 미추홀구에 한정됐다. 금감원은 “권리관계가 이미 확정돼 개입이 어렵다”면서 “안타까운 사정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음을 양해해달라”는 공문을 보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전세사기 피해자의 경매 우선매수권을 보장한 전세사기특별법이 통과됐지만 경매가 모두 끝난 최씨에겐 해당사항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전세사기를 당한 피해자에게 다시 전세대출을 해주는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침몰한 타이타닉호에서 생존한 이들에게 크루즈 여행권을 주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전세를 들어가느니 차라리 집을 사고 싶었지만 그것도 불가능했어요. 주택구입대출은 만 30세 이하만 가능하거든요. 저리대출을 제외하면 사실상 받을 수 있는 지원이 없었어요. 긴급주거는 너무 멀었고 월세 지원은 3분의 1만 가능해 의미가 없었어요. 제가 받은 정부 대책은 긴급생계지원금이 유일한데 소득 150만원 이하만 가능한 데다 이마저도 예산 부족으로 두 달 만에 마감됐고요.”

그는 정부 정책에 아쉬움을 드러내면서도 “중견기업만 돼도 새로 시작하는 업무에 대해 부서들끼리 손발이 안 맞잖아요. 전세사기라는 유례없는 사안에 대응하다 보면 당연히 부처 간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최대한 피해자들 목소리가 반영된 구제책을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지금은 그럴 통로가 없어요. 출간 이후 정부에도 연락이 왔으면 했지만 아직까진 없었고요.”

희망을 놓지 않았던 원동력, 꿈

최씨는 “내 삶이 전세사기 피해자로 끝나도록 방치하지 않겠다”며 악착같이 살아남겠노라 다짐한다. 그러면서 “내 인생 끝나는 날은 돈을 다 받은 날이 아니라 파일럿 훈련을 받는 첫날일 것”이라는 말로 책을 맺는다.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꿈’을 꼽았다.

“전세사기를 당하고 자살하려 옥상에 올라갔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 ‘죽기 전에 못 먹은 빵이 생각나겠냐, 꿈이 생각나겠냐’는 말이 떠오르더라고요. 파일럿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마지노선이 만 34세거든요. 저는 꿈을 위한 돈을 잃은 거지 꿈을 잃은 건 아니니까, 1% 확률이라도 있으면 도전하고 싶어요.”

다른 피해자들에게도 ‘절대 자책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다고 했다. “많은 분이 정신과 약 먹으면서 버티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죽음을 생각할 때도 있겠지만 잘못한 사람들은 따로 있으니 끝까지 참고 버티셨으면 좋겠어요. 언젠가는 봄이 올 테니까요.”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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