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 밑 가시일까, 방종일까... 다시 불 붙은 온라인 주류 판매 자유화
“한국은 주류 산업에 제약이 많아
혁신의 바람이 불지 못하고 수출 기회가 축소되고 있다.
소비자와 업계 모두를 위해 전자상거래 확대를 권고한다.”
프란츠 호튼 주한유럽상공회의소(ECCK) 주류 위원회 위원장
손톱 밑 가시일까, 그저 방종일까.
온라인 주류(酒類) 판매는 오랜 주류 업계 염원이다.
와인에 이어 위스키 인기가 크게 높아졌지만, 이들 술을 인터넷으로 살 수는 없다. 정부가 일부 품목을 제외한 거의 모든 주류를 온라인에서 팔지 못하게 법으로 막고 있다.
‘청소년들이 온라인을 통해 술을 구입하는 것을 막고, 국민 건강을 저해하는 것과 같은 부작용을 줄이겠다’는 이유다.
반면 미국·영국·일본·프랑스 같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국가는 대체로 주종(酒種)과 무관하게 온라인 주문이 가능하다.
정부와 주류업계는 최근 10여년간 이 주제로 수차례 만났지만, 서로 거리를 좁히진 못했다.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정부와 주류업계가 또 한번 주류통신판매 활성화를 주제로 만났다. 이번 논의는 최승재 국민의힘 의원실이 주최하고 아시아-태평양국제주류연합(APISWA)이 주관했다. 국회에서 온라인 주류 판매를 주제로 열린 첫 글로벌 포럼이다.
포럼에 참석한 주류업계 관계자들은 ‘유명무실하고 효용성 없는 규제 탓에 주류업계 뿐 아니라 소비자가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반면 온라인 주류 판매에 보수적인 입장은 미성년자 음주 문제 뿐 아니라 주류 도소매업체 생존권 이슈를 이유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을 고수했다.
◇“유명무실 규제” vs “한국 규제 오히려 느슨”
정부는 국가무형문화재 혹은 시도무형문화재 보유자가 제조한 주류, 식품명인이 제조한 주류, 양조장 소재지 관할 자치도 혹은 자치구에서 생산된 농산물로 만든 주류 가운데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제조면허 추천을 받은 주류에 한해 인터넷 판매를 허용한다.
우리나라 주류 고시에 따르면 배달 애플리케이션(앱)을 이용할 때, 음식에 곁들이는 술을 함께 주문할 수도 있다.
조성현 한국온라인쇼핑협회 사무총장은 전면적인 통신 판매 금지가 아니라, 이런저런 예외 사항이 갈수록 늘어나는 현상을 꼬집었다.
조 사무총장은 “일부 전통주와 배달 앱, 주류 스마트 오더, 온라인 면세점 같은 예외 사항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며 “1인 가구가 급증하고 오프라인 시장에서 온라인으로 유통 구조가 재편이 되는 가운데 현행 법령 제한이 소비자 요구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우리나라의 주류 규제가 다른 나라보다 느슨한 만큼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OECD는 2020년 펴낸 ‘한국 공중보건 리뷰’에서 우리나라가 다른 OECD 국가들보다 알코올 제품 판매나 소비 규제 방안이 약한 편이라고 평가했다.
이완희 국세청 소비세과 서기관은 “해외 사례를 따져보면 주류 판매 시간이나 연령, 장소 제한 같은 다양한 주류 접근성 제한 정책이 시행되는 데 반해 한국은 주류 통신 판매 제한 외에 별다른 규제가 없다”고 말했다.
다른 OECD 소속 국가들은 주류 광고 금지는 물론, 연간 주류 판매 일수 혹은 판매 시간까지 지정하는 방식으로 강도 높은 주류 접근 제한 정책을 시행한다.
온라인 주류 판매를 전면 허용한 OECD 국가들도 뜯어보면 상당히 강도높은 보완책을 병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캐나다는 온라인 주류 판매가 가능한 온타리오, 퀘벡, 브리티시컬럼비아 세개 주(州) 모두 주정부가 직영으로 주류 유통 관리 기관을 각각 운영한다.
온타리오 LCBO(Liquor Control Board of Ontario), 퀘벡 SAQ(Société des alcools du Québec), 브리티시컬럼비아 LCRB(Liquor and Cannabis Regulation Branch)는 온라인 주류 유통 현황을 직접 관리하고, 판매 업체와 면허를 감독한다.
온라인 주류 판매를 허용한다고 해서 누구든 인터넷 페이지를 열고 원하는 만큼 술을 팔 수 없다는 의미다.
◇미성년자 음주 부작용 놓고 이견...“보호 장치 마련해야”
‘미성년자 보호’는 주류 온라인 판매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제시하는 가장 주된 명분이다.
주류업계는 미성년자 보호와 주류 온라인 판매가 전혀 무관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오프라인 주류 판매점에서도 술을 건네줄 때 신원 확인은 반드시 필요하다. 온라인에서도 최종 수취인이 성인인지 여부를 파악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면 된다고 주류업계 관계자들은 주장했다.
주류판매 앱 데일리샷을 이끄는 김민욱 대표는 “소비자가 앱에서 상품을 결제하고, 배달 주문을 받은 배달자가 대면(對面) 배달을 하면 기존 우려를 해소할 수 있다”며 “소비자가 배달 물품을 수령할 때 페이스 아이디 인증 같은 성인 인증을 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고 말했다.
마크 켄트 스카치위스키협회(SWA) 회장은 ‘주류통신판매 해외 성공사례’라는 발표에서 “영국은 배송 시스템에서 미성년자 뿐 아니라 이미 만취한 소비자, 주류 주문이 금지된 소비자까지 파악해 주문 제한을 걸 수 있는 체계를 마련했다”며 “잠재적으로 유해한 구매 패턴 혹은 특정 지역 관련 정보가 쌓이면서 지난 10년 동안 영국 11~15세 미성년자 음주 경험 비율은 50% 후반에서 40% 초반 대로 줄었다”고 말했다.
황성필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주류산업 진흥과 소비자 편익 증대를 위해 바로 규제를 완화하기에는 청소년 음주 같은 여러 부작용이 우려되는 실정”이라며 “규제 완화 정책을 추진하되 그 과정에서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조치가 반드시 수반돼야 한다”고 말했다.
◇소상공인 피해·음주 공화국 오명 여전...“신중한 접근 필요”
온라인 주류 판매를 허용하면 현행 주류 유통 질서가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주류는 유통 면허를 가진 소수 도매상을 거쳐 소매점으로 들어간다. 온라인으로 종합주류기업이 바로 소비자에게 주류를 팔면 도매상과 소매점은 모두 설 자리를 잃는다.
중소 골목상권 소상공인도 온라인 주류 판매는 반갑지 않다. 식당들은 보통 요즘 같은 물가 상승기에 음식 가격을 올리기 보다 부대 메뉴에 해당하는 주류 가격을 높여 수익을 극대화한다. 식당에서 술을 마시던 수요가 사라지면 그만큼 소득도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이충환 경기도상인연합회 회장은 “온라인 주류 판매를 허용하면 나가서 술을 사 먹겠다는 수요가 줄면서 도소매 소상공인이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라며 “결국 오프라인에서 술을 파는 많은 상인이 업종 변경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는 점을 충분히 인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류업계가 책임있는 음주를 강조하지만, 음주 폐해는 여전히 심각하다.
통계청의 ‘2022년 사망 원인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알코올 관련 사망자는 5033명으로 2021년(4928명)보다 105명 늘었다. 알코올 관련 사망률(인구 10만명당 사망자 수)도 9.8명으로 1년 전보다 2.3% 증가했다.
알코올 관련 사망은 알코올성 간 질환이나 알코올성 위염 등 술이 죽음에 이르는 주요 경로가 된 경우를 모아 집계한다.
이완희 서기관은 “주류통신판매는 국민 보건과 산업화 같은 다양한 쟁점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문제”라며 “국세청은 중립적인 입장으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협의하고 국민적 공감대에 따라 신중히 논의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OECD 역시 한국 공중보건 리뷰에서 ‘한국이 음주로 쓰는 질병 비용이 4조6000억원(2017년)에 달하며 과음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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