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평화의 세계로 이끈 도자예술의 뒤안길에서

2023. 11. 13.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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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하다] 염농재를 닫으며

[신금호 전 서울지방노동위원장]
'불로 짓는 농사' 염농(焰農). 정확하게는 불로 짓는 '그릇 농사'라는 의미다. 현장 활동가로, 노동잡지 편집장으로, 서울·경기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노동의 세계에 근 30년을 몸담았던 신금호 선생이 은퇴 후 도예가의 길을 걸으며 사용하는 아호다.

1944년 생인 신 선생은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 엘리트의 영예를 좇지 않고 '조국 근대화'가 빚어낸 불의에 몸과 머리로 맞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길로 향했다.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그릇빚음'을 잠시 멈춘 시간에 골프장 미화원으로 일하는 노동자다.

최근 주변의 권유로, 손자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서전에 꾹꾹 눌러 담았다. 젊은날 정면으로 마주했던 군사정권 시대상, 사회에 나와 겪었던 척박한 노동 현장의 기억을 농사짓듯 기록했다. 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한 어느 '백발 노동자'가 견뎌 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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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8년을 손만으로 빚어낸 생활그릇을 빚으며, 불가마와 짝하여 낮밤을 지새웠다. 작업장을 나서면 곧바로 마당과 텃밭이었고, 틈틈이 밭 모퉁이에 소나무, 산복숭아, 조팝나무, 자작나무를 옮겨 심었다.

도자는 노동이다. 도자는 예술이다. 도자는 자기 탁마의 길이다. 도자는 한 순간 놀라움과 환희와 평화의 세계이다. 도자는 만년(晩年) 다스림의 길, 천도(千度)의 세계로 가는 안내자이다. 나는 도자를 통해 우주로도 간다. 별의 생멸(生滅), 우주의 심연(深淵)의 세계로. 시간과 함께 영원무궁(永遠無窮) 공간의 세계로 나는 간다. 시간 안에 공간이 변하는 무한 우주의 세계로. 밤새워 그릇을 빚다가, 별 보고 잠들어 있다가, 안개 짙은 샛새벽에 일어나, 울타리 없는 마당으로 나와, 맑고 찬 새벽 공기 앞에 서본 사람만이 이 신비의 순간을 본다.

밤 12시에 정리하고 작업장을 나와 별들이 총총한 밤하늘을 보았다. 언제나 화실 위 북녘 하늘에는 북두칠성과 북극성이 또렷했다. '도자예도(陶瓷藝道)'가 밤하늘 북극성처럼 내가 걸어 갈 길의 방향잡이였다. 나는 도자를 통해 나도 빚고 있는 것이다. 흙그릇 구워내기라는 나만의 할 일과 더불어 나름대로의 꿈의 불꽃이 식지 않았다. 산과 들과 밭과 논이 늘 나의 친구 되어 줬다.

물론 도자는 잠깐이나마 입에 풀칠하기에는 도움이 되었으나 생활에는 보탬이 되지 못했다. 전시회 경영에 쓰이는 푼돈이 마련될 뿐이었다. 그래도 김 화백은 나의 길을 지켜 주었고, 나의 길을 열어주려 했고, 전시회 마련에 힘썼다. 김 화백은 때마다 그랬다.

그런 노력으로 서울의 예술거리 인사동 중심에 있는 도자기 전문 전통매장 '통인가게'에서 두 차례 치른 전시회를 포함하여 모두 일곱 차례 전시회를 치렀다. 한번은 제주도로 건너가 한림읍에 있는 화가 이명복의 '갤러리 노리'에서도 초대 전시회를 가졌다. 더욱이 김 화백은 그 바쁜 생활 속에서도 초벌된 나의 그릇에 색과 그림을 그려 넣었다. 전시회의 안내 카드도 언제나 김 화백 혼자서 만들어 냈다.

그렇게 김 화백이 자기 일처럼 도왔어도 시장에 대한 기대가 줄어들어 결국은 공방 염농재 문을 닫아야 했다. 김 화백이 결론을 내렸고, 나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나는 공장장이었지만 여성으로서 김 화백의 총괄 사장의 역할은 무리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소모적이었던가? 아니다. 자본 제일주의 시장의 쓰디 쓴 경험이었다.

조용히 나를 본다. 1944년생인 나는 서울에서 스물일곱에 학부생활을 마치고 사회로 나와 쉰다섯까지 28년 간 노동자 세계의 문제를 다루는 사회인으로서 살았다. 한때는 현장 노동자로, 한때는 대기업 노동조합의 활동가로, 한때는 월간 노동잡지 편집장으로, 노동문제를 다루는 국회와 지방노동위원회의 고급 정책관료로 살았다.

사회생활을 마치고 서울을 떠나 경기도 안성시의 농촌마을에 집을 짓고 자연에 묻혀 반(半) 농군이 되어 살았다. 62살부터는 10년 가량 도예공방 염농재를 세우고 손빚음으로 그릇농사를 지었다. 그 후 살림을 위해 집 가까운 골프장에 나가 일흔일곱까지 4년 10개월 동안 골프 클럽의 미화원 신분으로 다시 노동자가 되어 일했다. 백발의 청소 노동자! 어두움에 집을 나서 어두움에 집에 들어섰다. 그렇지만 마음은 늘 푸르렀다. 백발의 청년 노동자였다.

쉬는 시간이면 그릇 빚는 땀과 가스 가마 불빚음의 이치를 벗 삼아 골프장 곁 외진 숲길을 걸으며 하늘을 보았고 비와 바람과 안개와 눈을 맞았다. 뒷동산 등줄기 따라 소나무, 갈나무 아래로 숲길도 냈다. 곧게 뻗은 숲길을 나와 김 화백이 편온한 마음으로 함께 걷는다. 이 숲길에서도 나는 하늘과 자연과 내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이제 나는 삶과 이상과 꿈의 길 끝에 서 있다. 80년 가까이 살아오는 동안 나를 스쳐간 모든 분들을 위해, 모든 영혼의 평화를 위해 두 손 모으고 머리를 숙인다.

▲ 2010년 생활자기전시회에서 도예품들을 설명하는 신금호 선생 ⓒ손호철

<끝>

[신금호 전 서울지방노동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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