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보수, 때로는 ‘적의 칼’도 활용을
좌파의 ‘감성 전략’ 연구할 만
국민 마음 얻는 방법 알아야
좋은 정책·비전도 힘 받아
영국왕 찰스 3세가 여론 조사 기관 유고브의 3분기 ‘가장 인기 있는 왕실 인물’ 조사에서 6위에 그쳤다. 2분기엔 5위였는데 이번엔 동생 앤 공주의 딸에게도 밀렸다. 아들 윌리엄과 며느리 캐서린 미들턴 등 위 순위와 격차도 크다. 여론 조사 하면 매번 이런 식이다. 왕실 인물 중 인기 없는 축이라는 결과가 늘 나오는 건 왕으로서 여간 체면 구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외도·이혼 등으로 안 좋았던 그의 인상이 바뀐 적이 있다. 오래전부터 환경, 청소년 등 분야에서 큰 역할을 해왔다고 했다. 그가 대표 또는 후원을 맡는 자선·공익 단체가 800여 곳에 달했다. 그가 ‘잘 준비된 왕세자일 수 있다’고 봤다. 왕 즉위 후 호감이 퇴색했다. 서류에 사인하다 펜과 잉크병이 맘에 안 든다고 신경질 내고 치우라고 손을 휘젓는 모습에 옛 비호감이 살아났다. 업적으로 보는 찰스는 희미해졌다. 지도자는 정책·능력 이외 ‘플러스 알파’가 필수다.
행동경제학은 새로 주목을 받는 경제학 분야다. ‘인간은 합리적’이라는 주류 경제학 대명제를 거부한다. 인간은 감정·편견 등에 좌우돼 잘못된 판단과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본다. 행동경제학 창시자이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2002년) 대니얼 카너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신작 ‘노이즈:생각의 잡음’에서 체계적인 ‘편향’과 임의적인 ‘잡음’이 모든 인간 영역에서 작용하고 있다고 했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법조계에 “법관은 공정해야 할 뿐 아니라 공정하게 ‘보여야’ 한다”는 말이 있다. 정치에 적용하면 위정자는 “대의를 위해 양보·희생할 뿐 아니라 그렇게 보여야 하고, 국민의 아픔을 감싸주고 가려운 곳을 긁어줘야 할 뿐 아니라 그런 존재로 인식돼야 한다.” 이런 걸 잘 못 하는 게 보수 우파다. 자유와 성장, 공동체를 중시하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이성적이고, 감성과는 거리를 둔다. 과거엔 이걸로 충분했지만 21세기엔 다르다.
문재인 전 대통령 지지율은 보수엔 ‘불가사의’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으로 자영업자를 괴멸 상태로 몰아넣고, 울산시장 선거에 불법 개입해 친구를 당선시키고, 북한·중국에 굴욕적으로 머리 조아리고, 부동산·소득 통계 조작하고…. 이런데도 5년 평균 지지율이 역대 대통령 중 제일 높다. 이를 설명할 요소 중 하나가 좌파의 ‘감성·이미지’ 전략이다. 문 전 대통령의 낡은 구두 뒤축, 조국의 텀블러, 김상조의 낡은 가방 등이다. 한 여론 조사 기관 임원은 “착하게 보이는 문 대통령 이미지가 지지율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부분이 있다”고 했다.
좌파의 ‘감성 전략’은 뿌리가 깊고 노하우도 풍부하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NL(민족해방, 특히 주사파) 진영이 운동권을 장악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품성론’이다. 혁명 이론에 앞서 솔직, 겸손, 헌신 등을 앞세워 학생들 마음을 얻는 것이다. 실제로 집회 등이 끝나면 정리하고 청소하는 건 NL 쪽이었다. 이렇게 표를 얻어 학과, 단과대, 총학을 점령했다. 품성론은 주사파 대부 김영환이 ‘강철서신(1986년)’에서 제기했다. 90년대엔 ‘바보과대표’라는 시집이 NL 필독서였다. 품성론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이 세력이 정계에 대거 진출해 있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 이후 여권에 분석, 비판, 조언이 쏟아졌다. 정책은 “잘못된 게 없는데(인요한 혁신위원장)” 거칠고 오만·불통·독선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천안함 유족 윤청자씨는 정부 사람들이 최소한 “깍듯하게 구는 ‘연기’조차 못 한다”고 했다. 내 편에게조차 싸가지 없어 보인 것이다. 국민에게 주는 ‘울림’이 부족해 정책·비전이 빛을 못 본다면 불행한 일이다. 감성·이미지가 거짓·무능력을 숨기는 좌파의 가면이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 적의 칼로도 싸울 수 있을 때 진정한 고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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