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줌인/임현석]아무리 외로워도 귀신과 어울리지 말 것
왜 금기를 넘는가? 인간은 어리석기 때문이다. 왜 어리석은가? 인간은 욕망하기 때문이다. 무슨 욕망? 좋은 공포물이라면 몇 단계를 거쳐 마지막엔 이 질문 앞에 도착한다. 여기 지금의 욕망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공포물 ‘톡 투 미’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린 너무 외롭다고. 그래서 우린 가끔 너무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된다고.
영화 톡 투 미는 90초짜리 쇼트폼 동영상 챌린지에 몰두하는 젊은이들을 비춘다. 이들은 소통을 즉각적인 동영상 소비로 대신한다. 이 시대에 소통이란 ‘관종’으로서 소비되거나, 감정을 유발하는 도구로서 대상을 호출하는 것을 의미할 뿐, 여기 누군가를 이해하거나 누군가에게서 이해받고자 하는 마음은 해소되지 못한 채 깊은 갈증만을 남긴다. 목마른 자, 기꺼이 플랫폼 시대의 관종이 된다.
영화 속 엄마를 잃은 17세 소녀 미아는 심한 우울증으로 인해 수시로 손톱을 만지작거리는 아이다. 미아는 외로움 속에 아버지를 떠나 친구 제이드 집에서 살다시피 한다.
어느 날 미아는 제이드와 참석한 한 파티에서 또래 사이에서 유행하는 90초 빙의 챌린지 톡 투 미 의식을 치른다. 미아가 또래들과 어울리려는 마음으로 자진해서 의식에 참여한 것. 기꺼이 스스로 온라인 동영상 속 소비 대상이 된다.
미아는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박제 손을 잡고 귀신을 부르는 주문(“톡 투 미”)과 귀신을 몸으로 불러들이는 주문을 외고 빙의 체험에 돌입한다. 친구들은 스마트폰 동영상으로 미아의 신비 체험을 촬영하다가 그 이상을 지나면 귀신이 붙는다는 90초를 지나서 가까스로 미아와 박제의 손을 떼어낸다.
미아는 그날 의식 이후 이상한 환영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번엔 제이드의 집에서 치러진 심령 파티. 제이드의 동생 라일리가 빙의 체험을 하던 중 미아의 엄마가 몸에 붙은 것처럼 행동한 뒤 발작을 일으키고 자해하는 모습을 본다. 미아는 엄마가 죽은 이유를 찾고, 귀신에 붙들린 라일리의 영혼을 구해내겠다는 마음을 품지만 곳곳에서 함정과 마주친다.
영화는 플랫폼 소비의 취약성과 현대적 욕망을 정확히 들여다보았다는 반응을 이끌어냈다. 우울감 속에서 호러를 발견했다는 호평 속에 세계 최대 영화 비평·리뷰 사이트인 ‘로튼 토마토’에서 토마토 미터(신선도 지수·긍정적 평가를 내린 사람의 비율)는 94%(12일 기준)에 이른다.
영화 내용만 들여다보면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지 말고, 위험한 장난은 하지 말라는 어른들의 경고를 오컬트적으로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엔 그러한 금기도 새롭게 해석된다. 여기서 친구들은 돌아가면서 영상을 촬영하고, 온라인에 업로드하면서 놀이 문화에 심취하는 이들로 그려진다. 타인에게 주체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대상으로서 소비하는 놀이는 결코 서로를 이어주지 못한다. 라일리가 자해 소동을 벌이고 경찰이 집에 찾아오자 책임 피하기에 급급하다.
빙의 의식에 참여한 이들이 이상 행동을 벌이고, 촬영본에 대해 지워 달라고 친구들에게 사정하는 모습을 통해 영화는 스스로 주체가 되지 못하는 이들이 결국 돌고 돌아 공포에 사로잡힌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타인을 대상으로서 소비하지 말고, 주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소비되지도 말라는 것. 이 영화의 메시지다. 타인과 연결되고 싶더라도 그 주체의 자리는 항상 나여야 하며, 타인의 욕망 역시도 주체의 자리 위에 놓아주어야 한다. 누군가와 어울리더라도(그게 귀신이라고 해도), 자신을 내어주는 방식이어선 곤란하다.
그러니 오해하지 말 것. 외로움과 이에 대한 해소라는 욕망 자체는 죄가 없다. 인간이 존엄하다면 욕망도 마찬가지일 터. 영화를 보면서 올해 일본 아쿠타가와상을 받고 최근 한국에 번역된 소설 ‘헌치백’이 절묘하게 떠올랐다. 중증 장애인인 소설 속 주인공은 자기 욕망이 얼마나 엄연한지 받아들이면서 자신을 대상이 아닌, 주체의 자리에 놓는다. 욕망을 바라보는 영화와 소설 두 시선을 교차하며 살피는 것도 흥미롭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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