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말의 세계를 건설하는 망치, 은유
은유가 뭔지 자신 있게 답하는 사람은 드물지만, 국어 시간에 배웠던 은유의 예를 떠올려보라 하면 틀림없이 ‘내 마음은 호수’라고 말합니다. 한결같습니다. 수십 년 동안 오직 이 시구절만 떠올립니다. 국어 교육이 굳건히 잘됐다고 해야 할지, 변한 게 하나도 없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저는 국어 교육, 특히 글쓰기 교육에서 놓친 것 중 하나가 은유를 협소하게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장을 멋지게 꾸미는 수사법 중 하나라고 말이죠. 은유를 글을 쓰는 기교나 장식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은유가 장식품이라면,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일 겁니다. 하지만 은유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은유는 그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우리는 은유와 함께 생각하고 함께 삽니다.(언어 자체가 은유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그러면 니체 얘기를 해야 하니 참습니다.)
없는 곳이 없더라
은유는 A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게 아니라 B라는 다른 대상에 빗대어 말하는 방식입니다. 원래 A와 B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기에 같은 자리에 앉을 일이 없었습니다. ‘마음’과 ‘호수’는 전혀 다른 영역의 낱말인데, 이 둘을 강제로 접속시킴으로써 갑자기 둘 사이에 닮은 점을 찾게 됩니다. 이전에 상상해보지 않았던 유사성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은유는 글이 가닿을 수 있는 상상과 창조의 최전선입니다.
흔히 은유는 ‘A는 B다’ 형식을 갖는다고 하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단어나 구절 속에도 은유가 숨어 있습니다.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은유가 들어 있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너무 흔해 느끼지 못할 뿐, 은유가 넘쳐납니다.
예컨대, ‘눈사람’이란 말도 은유입니다. 이 말이 은유라고요? 은유입니다. 눈이 사람일 수는 없잖아요. 눈덩이 두 개를 붙여놓는다고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걸 ‘눈덩이두개붙인것’이라 하면 마음이 삭막해질 것 같네요. 사람도 아닌 것을 ‘사람!’이라 부르며 좋아합니다. 눈덩이 두 개 붙인 것과 사람은 전혀 다른 물성을 갖지만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진짜 ‘사람’이라 생각하지는 않죠. 은유적 표현에 등장하는 두 요소는 닮음(유사성)과 다름(이질성)이 동시에 작용합니다.
‘꽃’이 들어간 말도 그렇습니다. ‘벚꽃’이야 식물 이름(벚나무) 뒤에 ‘꽃’을 붙여 만든 말이지만, ‘접시꽃, 제비꽃, 달맞이꽃’은 꽃 모양을 보면서 다른 영역의 말을 끌어들여 이름을 붙였습니다. ‘눈꽃, 불꽃’은 진짜 ‘꽃’도 아니네요. 누군가 가지에 쌓인 눈을 보며 ‘꽃을 닮았군’ 하면서 눈꽃이란 이름을 붙였을 겁니다. 그렇다고 눈꽃을 진짜 꽃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웃음꽃’을 피우거나 ‘이야기꽃’을 피운다고 할 때도 ‘웃음’과 ‘이야기’를 ‘꽃’이라는 전혀 다른 영역과 연결해 붙인 말입니다. 땀에 젖은 옷이 마르면 허옇게 생기는 얼룩을 ‘소금꽃’이라 부릅니다. 꽃이 아닌데 꽃이라 부릅니다. 어떤 대상을 좀더 친숙한 다른 무엇과 함께 씀으로써 그 대상이 달리 보입니다. ‘땀얼룩’과 ‘소금꽃’의 거리만큼 대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책’에도 ‘책등’이나 ‘책날개’가 있죠. 책에 동물의 등이나 날개가 달렸을 리 없는데도 그렇게 부릅니다. 모두 그 속에 은유가 도사리고 있군요.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하려는 욕망
낱말의 뜻은 계속 변하는데, 그 변화의 원동력이 은유입니다. 애초에 쓰이던 영역과 전혀 다른 영역에 그 낱말을 쓰다보면 뜻이 바뀌고 확대됩니다. ‘먹다’의 뜻이 뭔가요? ‘밥’을 비롯한 음식물을 섭취한다는 뜻이겠죠. ‘먹다’는 음식물과 결합할 때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어떤 괴짜 하나가 재미 삼아 이 말을 다른 데 써봅니다. ‘욕을 먹었다!’ ‘욕을 들었다’라고 해도 충분할 텐데, 그 괴짜는 이렇게만 쓰는 게 따분했나봅니다. 이야기 영역에 속하는 ‘욕’을 ‘먹다’라는 음식 섭취 행위와 결합했습니다. 재미있군요. 은유입니다. ‘나이를 먹다, 돈을 먹다, 겁을 먹다, 더위를 먹다’, 모두 은유입니다.
추상적 개념은 은유의 도움 없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대표적으로 ‘시간’을 들 수 있습니다.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시간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말로 표현하나요? 흔히 ‘시간이 간다, 온다, 흐른다’고 하지요. 사람도 아닌 시간이 어떻게 오거나 갈 수 있죠? 시간을 마치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선 위를 ‘움직이는 사물’로 생각하니 이런 표현을 쓰는 거겠죠. 그러니 시간을 ‘맞이하기’도 하고 ‘보내기’도 합니다. 만질 수 있는 사물로 생각해 ‘시간이 많다, 적다, 있다, 없다, 남다, 모자라다’라는 표현도 씁니다. ‘귀한 물건’으로도 생각해 ‘시간을 아끼고, 벌고, 절약하거나, 낭비한다’고 말합니다. 은유를 통하지 않고는 시간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일상언어에 깊이 박힌 은유이죠.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도 은유가 넘쳐납니다. “또 하루 멀어져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 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발이 달린 것도 아닌 ‘하루’가 어떻게 멀어져갈 수 있죠? 기억이나 가슴은 그릇도 아닌데 어떻게 채우거나 비울 수 있겠어요. 사람도 아닌 청춘이 어떻게 어딘가에 머물러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어렵지 않게 이해되죠. 우리는 ‘은유로 생각하기’의 달인입니다.
‘비난의 화살, 돈의 노예, 열광의 도가니, 절망의 구렁텅이, 침체의 늪, 상상의 날개’ 같은 말도 은유입니다. ‘비난’을 ‘화살’로 바꿔 생각하는 놀라운 신통력! ‘새까만 후배, 새빨간 거짓말, 눈먼 돈, 무거운 침묵, 뜨거운 박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새까만 후배’는 얼굴이 까만 후배가 아니라, 나이 차가 꽤 나는 시간의 영역을 색채 영역으로 전환해 표현한 거죠. 일상언어 속에 은유가 많다는 건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담겨 있다는 뜻이겠죠.
현실에 대한 이해 달라져
은유는 단어나 문장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좋은 글은 추상적 주제를 은유로 손에 잡힐 듯이 구체화해 이해하게 만듭니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인간 사회를 온도의 차이로 은유화해 ‘차가운 사회’와 ‘뜨거운 사회’로 나눕니다. ‘차가운 사회’는 놀이를 없애면서 제의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정체된 사회이고, ‘뜨거운 사회’는 제의를 없애면서 놀이의 영역을 넓히려는 역동적 사회라는 것입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란 학자는 근대를 ‘정원사의 사회’로, 현대를 ‘사냥꾼의 사회’로 은유해 책 한 권을 썼습니다.
지금까지 은유가 도처에 널렸다고 했는데, 이게 왜 글쓰기에서 중요할까요? 우리가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이유는 인간과 세계에 대해 이전과 다른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남들과 똑같은 글을 다시 쓸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앞에 열거한 일상언어의 예는 모두 기성품입니다. 신상품이 없습니다. 신상품은 눈길을 끌고 발길을 멈추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내 글에 새로운 은유를 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저도 글을 쓸 때 은유적 표현을 쓰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은유를 써왔더군요. ‘말은 세계를 베어내는 칼이다’ ‘의미는 팔랑귀다’ ‘가끔 말은 선을 넘는다’ ‘말에도 말썽꾼이 있다’ ‘말은 입에 사는 도깨비다’ ‘말은 일렁이는 불꽃이다’ ‘된소리의 반격이 시작됐다’ ‘말소리는 의리가 없다, 바람둥이다’ ‘어떤 말엔 감정의 손가락이 달려 울음의 문고리를 잡아당긴다’. 짧게 인용하느라 문장만 나열했지만, 저 문장이 씨앗이 되어 한 편의 글이 됩니다. 은유는 한 편의 글을 관통하는 관점과 주제가 될 수 있습니다.
언어(말과 글)는 세계를 고스란히 비추는 거울이 아닙니다. 언어는 세계를 객관적으로 반영하지 않습니다.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언어는 세계를 일정한 시선으로 이해하는 틀을 제공합니다. 세계를 형성하는 힘이 있습니다. 세계를 형성하는 힘을 가졌기에 내 글을 통해 세계가 어떻게 새롭게 재구성되는지 의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언어가 달라지면 현실에 대한 이해도 달라집니다. 은유를 써보면, 언어란 것이 고착되지 않고 순간순간 생성과 해체가 거듭되는 역동적 성격임을 몸소 느낄 수 있습니다.
글 안 써도 재밌는 시간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은유를 적절히 쓰려면 어떤 구체적인 사물이나 현상을 보면서 그걸 다른 영역에 적용해보는 겁니다. 은유의 소재는 널려 있습니다. 살면서 만나는 구체적인 사물과 온갖 경험이 은유의 소재입니다. 주변의 사물이나 현상을 보면서 그게 다른 무엇과 닮았는지, 무엇과 잇닿아 있는지 생각하는 습관을 들여보세요. ‘주변’이란 게 별것 아닙니다. 내가 직면한 모든 구체적인 겁니다. 씻고 밥하고 출근하고 걷고 일하고 만나고 먹고 놀고 얘기하는 모든 일상.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사물. 구두, 양말, 젓가락, 창문, 머리카락, 수세미, 컵라면, 리모컨, 파리채, 바퀴벌레…. 끝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경험이 은유의 소재입니다. 그걸 다른 영역에 적용해보는 겁니다.
인생에 대한 글을 쓴다고 해보죠. ‘내 인생은 고달팠다’고 하면서 고달팠던 이야기를 곧바로 나열하지 말고, ‘내 인생과 닮은 게 뭐가 있지?’라고 생각해보는 겁니다. 이런 식이죠. ‘인생은 냉장고다’ ‘삶은 물수제비다’ ‘자동차 바퀴를 보며 산다는 게 뭔지 알게 됐다’. 반대로도 생각해보는 겁니다. ‘저 옷걸이는 무엇과 닮았지?’ ‘이 삐걱거리는 대문을 무엇과 연결해볼까?’ 이런 생각을 거듭하다보면 새로운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글을 안 쓰더라도 혼자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물론 은유는 허구입니다. 현실 세계에서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허구인 은유로 현실을 새롭게 서술해왔습니다. 은유를 통해 현실을 다시 서술해온 겁니다. ‘내 마음은 호수’라는 말은 허구이지만 ‘마음’을 새롭게 해석해줍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내 마음은 선풍기야’ ‘내 마음은 만년필이야’ ‘내 마음은 길고양이야’라고 말한다면, 마음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올 겁니다.
문학에서 다시 찾아오자
우리가 문학 하는 사람들에게 넘겨버린 게 바로 ‘은유를 만드는 능력’입니다. 그걸 다시 찾아와야 합니다. 문학 하는 사람의 전유물이라 생각해온 은유를 우리도 능수능란하게 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다르게 세상을 볼 수 있음을 알려줘야 합니다. ‘언어가 세계를 건설한다’는 말이 가장 잘 적용되는 곳이 은유가 작동하는 공간입니다. 은유는 낡은 세계를 깨부수고 새로운 세계를 세웁니다. 은유 없는 글쓰기는 맨주먹으로 못을 박는 것과 같습니다. 은유는 새로운 말의 세계를 건설하는 망치입니다(이것도 은유네요).
김진해 경희대 교수·<말끝이 당신이다> 저자
[독자 글]
‘냄새’라는 글감으로 아홉 편의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보내주신 글을 보니 역시 냄새는 오감 중에서 가장 오래, 가장 깊이 기억에 남는 감각인가봅니다. 냄새는 냄새만으로 끝나지 않고, 냄새의 주인공과 연루된 이야기가 함께 묻어나오기 마련이죠.
가난에 찌들어 사는 할머니의 단칸방에서 맡은 여러 냄새(혜욱님), 아버지를 쓰러뜨렸던 담배 냄새(리아), 나를 안도하게 하는 부산의 바다 냄새(정선님), 가족을 떠받쳐온 엄마의 밥솥에서 나는 냄새(체스카), 할머니가 화롯불에 구워주시던 고구마 냄새(숙연), 어릴 적 냄새만으로 날씨를 알았던 감각의 퇴화(세현님), 중추성 후각장애로 썩은 냄새조차 맡을 수 없는 자신(호진님), 쓰러진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 어른들에 대한 역겨움(담이), 인간다움의 냄새(수진님).
글의 시작에 대해 한 말씀 드리고 싶네요(본격적으로는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글을 쓸 때 제일 어려운 게 글을 어떻게 시작할지 결정하는 거죠. 시작을 못해 한 글자도 못 쓰고 백지 앞에 멍하니 시간만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저는 며칠을 그럽니다). 실뭉치를 풀 때 실마리를 찾는 게 제일 어렵죠. 누구에게나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런데 어려운 건 어렵게 대해야 합니다. 어려운 걸 쉽게 대하면 일을 그르칩니다. 궁리해야 하죠.
어떤 이야기를 쓸 때, 그 이야기의 어떤 장면을 먼저 보여줄지 고민해야 합니다. 사건의 첫 장면으로 할지, 누군가가 했던 말로 할지, 시간이나 장소 소개로 할지, 잠언이나 경구로 할지, 전체 사건을 한마디로 정리하는 문장으로 할지, 의문문으로 할지 평서문으로 할지, 주어를 뭐로 할지 등등 궁리할 게 한둘이 아닙니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봐야 합니다.
글을 쓴다는 건 없는 걸 쥐어짜는 게 아니지만, 있는 걸 마구잡이로 방출하는 것도 아닙니다. 귀한 손님에게 첫 음식을 내놓듯이, 어떻게 하면 담백하고 정갈하되 매력적으로 시작할지를 고민해보기 바랍니다(말은 쉽네요).
분위기 조성용으로 다른 얘기를 꺼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되도록 자제하기 바랍니다. 처음 읽을 때는 그 이야기가 이 글의 중심 글감인 줄 착각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알고 초점을 옮기죠. 이 경우 독자는 불필요한 에너지를 씁니다. ‘이 산이 아닌가봐’ 하듯이. 길이와 상관없이 한 편의 글에는 하나의 이야기가 들어가면 족하다고 생각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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