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치된 민속씨름 사료, 하루빨리 안전한 곳에 옮겨야”
박승한 씨름연구소장
선수 출신으로 ‘박사 1호’, 교수·협회장까지 역임…현대 씨름 산증인
1992년 설립 후 메달·기념품·가마 보관에 이어 프로·대회 자료 정리
“보존할 수 있도록 박물관 생겨야”…2027년 협회 창립 100년사 작업
한국씨름연구소는 아파트와 상가주택이 모인 대구 수성구 매호동의 한 골목 초입 건물 2층에 자리하고 있다. 박승한 소장(71)이 거주하는 건물이다. 1992년 12월 설립 이후 한 번 자리를 옮겨 31년째 한국 씨름의 역사와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씨름연구소라는 그럴듯한 이름이지만, 현실은 2층 사무실과 자료보관실, 4층 자료실 등을 합쳐 총 35평 공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마저 없었다면 한국 씨름의 역사는 그대로 잊혔을 것이다. 씨름연구소에는 씨름의 역사와 스토리가 스며든 메달, 트로피는 물론 팬 기념품과 장사가 타던 가마(작은 사진)까지 보관돼 있다.
현대 씨름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박승한 소장이 30여년에 걸쳐 사명감 하나로 모은 것들이다. 박 소장은 최근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중요한 씨름의 역사들이 먼지와 습기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다. 지금이라도 우리 전통 스포츠의 역사를 하루빨리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수차례 말했다.
영남대 교수로 재직할 당시 한국과 북한 씨름의 역사에 관심을 보인 일본인에게 설명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어 창피했다는 박 소장은 “씨름선수 출신이면서 씨름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그분이 나보다 한국 씨름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는 점에 화가 났다”고 기억했다. 곧바로 대구 수성구 범어동에 당시 돈으로 매달 20만원씩 내고 작은 사무실을 임차해 씨름연구소를 열었다. 박 소장은 “집사람은 미쳤다고 했지만 언젠가는 누군가 시작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씨름은 전통 민속 스포츠로 꽤 오래 국민적 인기를 누렸지만, 역사 정리에는 소홀했다. 1983년 민속씨름(프로) 출범과 흥행, 1990년대 후반부터 빠져든 암흑기까지 씨름의 희로애락 속에서 씨름연구소만이 씨름 역사를 정리해왔다.
박 소장은 “내가 씨름인이고 협회에서 일을 한 현장 사람 아닌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물건이나 자료를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다”고 책임감을 이야기했다. 박 소장은 영신고-영남대를 거쳐 인천상공회의소에서 현역 생활을 한 씨름선수 출신이다. 당시 대회 포스터에 대표선수로 등장할 정도로 씨름계에선 제법 알려진 선수였다. 은퇴 뒤에는 1982년부터 영남대 체육학부에 부임, 씨름부 지도교수 등을 역임하면서 씨름선수 출신 ‘박사 1호’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2013년부터 4년간 제40대 대한씨름협회 회장도 지냈다.
씨름 역사 정리에 박 소장의 손을 거치지 않은 작업이 거의 없다. 경북 경산의 한 창고에 잠들어 있던 자료, 민속씨름(1983~2007년)이 몰락하면서 사무실에 방치됐던 한국씨름연맹 자료, 협회의 오랜 자료 등 대부분은 결국 씨름연구소를 통해 정리되고 있다. 프로씨름 자료는 작은 트레일러 하나 정도를 채울 만큼의 엄청난 분량이었지만, 박 소장은 “프로에서 열린 총 209개 대회 자료를 세세한 정보까지 담아 정리하고 있다. 쉽지 않지만 하나씩 정리되는 자료들을 보는 게 나의 보람”이라고 했다. 대한씨름협회 창립 100주년이 되는 2027년에 맞춰 100년사를 정리하는 사업에서도 박 소장이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박 소장의 고독한 노력에 조금씩 힘이 실린다. 씨름이 2017년 국가무형문화재(제131호), 2018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남북 공동)으로 지정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황경수 대한씨름협회장도 2년 전부터 씨름연구소에 인건비 일부와 장비를 지원하고 있다. 지난 3월에는 경기 성남에 디지털화한 씨름 자료를 보관할 ‘아카이브 센터’까지 마련됐다. 박 소장은 “아카이브 센터를 처음 보고 감격했다”면서 “혹시라도 씨름연구소에 불이라도 나서 자료가 없어질까 불안해 악몽도 많이 꿨는데 다행”이라며 안도했다.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씨름 전용 경기장, 씨름박물관 설립을 염원하는 박 소장은 “K콘텐츠로서도 씨름의 가치가 커질 기회”라면서 “현실적으로 당장 씨름 전용 경기장 건립이 어렵다면, 지금까지 방치됐던 씨름의 역사와 흔적이라도 잘 보존할 수 있도록 박물관이 하루빨리 생겨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정호 기자 alp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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