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김용균 이후, 법의 현실
다가오는 12월11일은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사망한 태안화력발전소 하청노동자 김용균의 5주기다. 새삼스레 그의 죽음을 꺼내는 것은 지난 5년간 한국사회에서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둘러싼 변화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28년간 제자리에 머물렀던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논의가 김용균 사망 일주일 만에 수면 위로 올랐고, 해를 넘기기 전에 ‘김용균법’이라는 이름으로 산업안전법 전부 개정이 이뤄졌다. 그러나 개정된 법은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이라는 비판을 받을 만큼 ‘위험의 외주화’를 규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중대재해처벌법이 국회 문턱을 넘을 것이라 예상한 이는 거의 없었다.
김용균 사망 2년여인, 2021년 1월 중대재해법이 제정되었다. 이후 지금까지 법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다행히 중대재해법 위헌심판은 기각되었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중대재해법 적용을 불과 3개월 앞두고 ‘추가 유예’를 위한 법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검찰과 법원의 솜방망이 구형과 판결도 반복되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이후 300건이 넘는 중대재해 사고가 발생했지만 검찰이 기소한 건수는 22건이고, 이 중 대기업은 한 곳뿐이다. 대형건설사 ‘DL이앤씨’의 경우, 중대재해법이 시행된 지난 1년8개월 동안 8명의 건설노동자가 사망했다. 처벌할 수 있는 법이 있지만, ‘DL이앤씨’ 경영책임자 누구도 처벌받은 적이 없다. 8번째로 사망한 노동자 ‘강보경’의 유가족은 또다시 거리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농성을 하고 있다.
김용균 사망사고 이후 법과 제도는 질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유가족이 나서야, 노동자의 사망이 발생해야 경영책임자들은 그나마 국정감사장에 불려나가 카메라 앞에서 머리를 숙인다. 수사의 속도는 너무나 늦지만, 수사 중이라는 이유로 사고조사서(재해조사의견서)의 공개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유가족들은 경찰서와 기업 문턱을 마르고 닳도록 넘어 다녀도 제대로 된 정보를 구하기 힘들다.
노동자의 죽음이 여전히 비극적 ‘사건’으로만 다뤄지는 한국사회에서 법은 노동자의 죽음을 흔적처럼 새긴다. 문송면의 수은중독,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이황화탄소 중독,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백혈병, 그리고 김용균. 죽음을 야기한 물질과 함께 새겨진 법은 딱 그 물질의 위해성만큼만 새겨질 뿐 물질을 둘러싼 구조적 위험을 포괄하지 못한 채 새겨져 있다. 수많은 죽음이 아무리 산안법에, 중대재해법에 기입된다고 하더라도 위험의 구조는 서로 겹쳐지지 못한 채 부분적인 시행령, 시행규칙에 나열된 대상물질과 국소적인 범위로 파편화된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법은 또 어떤가. 더 강한 처벌과 규범력을 위한 법개정으로 이어지는 무한루프 속에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이 사법의 테두리 안에서 맴돌고 있다. 법을 제정하고 집행하는 방향은 노동자들의 안전을 위한 참여를 보장하고, 이를 대의하는 정치의 구현이어야 한다. 김용균 이후 법이 강화되었지만 현실이 바뀌지 않았다면 그것은 법 이전에 살아 있는 노동자들의 생명을 대의하는 정치가 여전히 부재하기 때문이다.
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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