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GO 발언대] 게으른 구호엔 어떠한 감동도 희망도 없다
이스라엘 규탄 집회에서 한 발언자는 지식인을 향해 집회와 행진에 함께할 것을 촉구했다. 그것이 지식인의 역할이라 했다. 죽음의 행렬을 끝내기 위해 지식인이 나서서 행동해야 한다는 취지다. 의문이 들었다. 지식인과 대중의 역할을 기능적으로 분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시점 지식인은 혼탁한 현 사태를 냉정히 파악하려 애쓰고 기존의 답에 균열을 내도록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존재여야 하지 않을까. 팔레스타인 문제라는 오래된 비극의 해결이 요원할뿐더러 더 심각히 엉키는 작금의 사태를 보면 더욱 그렇다.
우리 사회로 시선을 돌려도 비슷한 고민이 든다. 정부에 의해 벌어지는 전방위적 후퇴 속에서 낡은 것들이 귀환하고 구태들이 이어지고 있다. 정부의 성격과 무관하게 심화되며 이어지는 불행의 깊이도 상당하다. 기후위기와 불평등, 인구학적 위기, 정치와 대표의 위기, 정치적 양극화나 포퓰리즘 등 다양한 문제들이 층위를 오가며 위기로 상정된다. 혼란한 위기에 맞선 사회운동의 역할은 무엇일까.
모으고 모이자는 외침이 이어진다. 위기로부터 발생하는 눈앞의 구체적 위협 앞에서 마냥 분노를 조직하는 것만이 당장의 역할일까. 사회운동이 대중의 요구에 반응한다는 것은 갈등을 증폭하거나 반대로 과잉된 분노를 감축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증폭과 감축의 대상을 구별하고 감각하는 것은 냉정한 판단과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최근의 사회운동은 냉정한 분별보다는 증폭의 역할에만 몰두하는 것처럼 보인다. 달라진 현실에 대한 고려와 주어진 답에 대한 성찰이나 질문보다는 기존의 문법에 머무른다. 그리하여 사회운동은 정치만큼이나 기능부전에 빠졌다.
집회 무대의 주요 의제는 때마다 바뀌지만 그 현안 각각이 만족스럽게 해결되었다는 얘길 들어본 적은 없다. 여의도 이슈처럼 집회 의제도 대중의 관심에 따라 휘발된다. 그렇다면 사회운동은 분노의 조직화 이전에 지금 처한 현실에 대해 다시 묻고, 우리가 답으로 상정한 요구들을 되돌아봐야 한다. 오래된 기능부전을 끝내기 위해선 냉정하게 돌아보고 스스로 묻는 시간이 절실하다. 총선을 앞두고 또다시 대통령 퇴진과 심판이라는 오답을 반복하거나 ‘양당체제 극복’이나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등 당위뿐인 납작한 답을 주문처럼 되뇔 수는 없다. 여기엔 어떠한 감동도 희망도 없다.
총선이라는 계기를 새로운 균열의 장으로 만들려는 이들도 있다. 수년째 반복한 오답이나 게으른 구호들 대신 기후위기라는 실존적 위협에 맞서 사회운동을 성찰하고 다른 질서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시도다. 현실정치 속에 타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질서와 단절하고 체제 전환이라는 새로운 길을 공동의 질문으로 채워가려는 시도다. 이런 시도를 통해 사회운동이 다른 길과 다른 희망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길, 당장의 답보다 서로를 향한 질문이 넘쳐나길 기대한다.
김건우 참여연대 정책기획국 선임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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