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이라는 이름의 질병
[세상읽기]
[세상읽기] 김인아 | 한양대 교수(직업환경의학)
미국에서 2015~2017년 기대여명이 오히려 감소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세계 최고 수준의 병원이 즐비한 미국에서 발생한 현상에 전세계 많은 학자가 주목했다. 특히, 한창 일할 나이인 40~50대 백인 남성 사망률이 증가하였는데, 자살 및 약물, 알코올중독에 의한 사망이 급격하게 늘어 이것이 전체 인구의 기대수명을 끌어내린 결과였다. 이 심각한 사회 문제의 원인으로 불평등의 증가와 빈곤, 실업으로 인한 공동체의 붕괴와 사회적 고립감 등이 언급되었고, 이를 두고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앵거스 디턴 미 프린스턴대 교수는 ‘절망사’(Deaths of Despair)라고 이름 붙였다.(‘절망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미래’)
1800년대 말 급격하게 산업화된 사회에서 경제적 풍요로움을 따라가는 데 어려움을 겪던 사람들이 현재와 미래를 유의미하게 연결해 주는 자기연속성(self-continuity)을 확보하지 못해 자살에 이르게 된다는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도 다시 언급되었다. 미국처럼 극적인 현상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2008~2010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경제위기와 실업이 자살률 증가와 관련이 있다는 연구들은 유럽에서도 줄을 이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노동자들의 정신건강 문제가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최근 만나 본 유럽이나 북미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정신건강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예방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정신건강에 어려움이 있는 노동자가 직업 유지에 어려움을 겪게 돼 실업의 위험이 증가하는데다 차별받을 가능성이 커지고 삶의 질이 떨어진다는 측면에서 정신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경제적 차원에서는 이로 인해 늘어나는 병가와 상병수당, 장애연금 급증이 재정 부담, 사업장에서의 생산성 감소로 이어지는 상황에 대한 우려가 공존하고 있었다. 우울증과 불안장애로 인한 생산성 손실이 전세계적으로 1조달러에 이른다는 분석도 있다.
의학 분야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학술지 중 하나인 ‘랜싯’(Lancet)이 올해 10월 발표한 노동과 건강 관련 시리즈 논문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룬 것 또한 정신건강 문제였다. 이 논문에서는 노동조건이 노동자의 우울증 위험을 증가시킬 수 있고, 개인이 가지고 있던 정신질환의 재발이나 악화에도 큰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정신건강과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통합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학계뿐 아니라 최근 10여년 동안 스웨덴, 덴마크, 일본에서는 노동자의 정신건강 관리 의무를 사업주에게 부과하였고, 영국과 캐나다에서는 노동자의 정신건강 관리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개발하였다. 2015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정신건강과 일에 관한 보고서를 발간하였고, 국제표준화기구에서는 2021년 노동에서의 심리적 안정에 관한 국제표준을 제정했고, 2022년 세계보건기구(WHO)는 국제노동기구(ILO)와 함께 노동자의 정신건강 관리를 위한 정책 브리프와 가이드라인을 발표하였다.
다양한 정책적 노력들이 공통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노동조건에 대한 개입과 이에 대한 노동자의 참여, 정신건강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노동자를 위한 노동조건의 조정과 차별 금지, 심리적 위기를 가져올 수 있는 사건에 대한 지원, 정신건강 문제로 일할 수 없었던 노동자들을 위한 직장복귀 및 적응 지원, 사업장 관리자와 노동자, 복지 관련 담당자들의 정신건강에 대한 이해 함양 등이다.
한국의 생산가능연령(15~64살) 인구 가운데 정신질환 1년 유병률은 9.1%이다. 매년 자살로 숨지는 사람 중 약 40%는 사망 당시 일을 하고 있었다. 이들의 노동조건을 살피고 노동시장에서의 상태를 살펴야 한다. 산재로 인정되는 자살 이외에 개인적인 이유로 정신적 어려움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더라도 일하는 과정에서 적응을 어렵게 하거나 치료 또는 노동시장으로의 통합을 어렵게 하는 요소는 없는지 살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은 정신건강과 자살 관련 정책을 입안하는 부서와 노동조건과 노동시장을 다루는 부서가 다르고 접근 경로도 상이하다. 전세계가 강조하고 있는 통합적 접근을 위해, 절망이라는 이름의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모두가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머리를 맞대어 가능한 방식을 모두 동원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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