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운동 정신 잇겠습니다”···담장에 민주열사 동문 새긴 전남여고[현장에서]
“선영아 하늘에서 보고 있니. 네 후배들이 우리 소원을 풀어줬어.”
독재 정권 폭압에 맞서 싸우다 생을 마감한 박선영 열사의 어머니 오영자 여사가 지난 8일 광주 전남여자고등학교 담장에 새겨진 딸의 얼굴을 보고 오열했다. 오 여사 곁을 지키던 학생들은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선배들의 숭고한 정신을 잇겠습니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날은 ‘기억이음 벽’이 처음 공개된 날이었다. 기억이음 벽에는 박선영 열사(1985년 졸업)를 비롯해 들불야학을 만든 박기순 열사(1976년 졸업)와 1980년 3학년 재학 중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가 부상을 당해 1992년 사망한 김경희 열사 등 전남여고 출신 민주열사 3명의 얼굴과 행적이 각각 새겨져 있다.
기억이음 벽은 전남여고 학생들과 교사, 지역 시민사회 등이 함께 만들었다. 전남여고 담장에 가로 1.7m, 세로 2m로 된 담장 총 6개로 조성됐다. 각 면에 새겨진 민주열사 3명의 얼굴 주위에는 전남여고 학생들의 글과 그림 등 60개 작품이 붙어있다. 이들 작품에는 주로 태극기나 횃불을 흔들고 있거나 계엄군의 무자비한 총칼과 군화 등에 짓밟히는 열사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이 벽 한쪽에는 “민주·인권·정의 실현을 위해 헌신한 전남여고인을 기억하며, 쉼과 역사의 배움터가 되길 소망한다”고 쓰여있다.
전남여고는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상지이자 사적지이다. 이를 기념해 교내에는 여학도기념역사관과 여학도기념비, 여학도상 등의 기념물이 있다. 기억이음 벽은 학생독립운동과 5·18민주화운동은 ‘불의에 맞선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억되고 있고 서로 이어져 있다’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이다.
기억이음 벽 제작을 총괄한 박춘애 전남여고 수석교사는 12일 “박선영 열사 어머니 등 가족분들이 매일 이곳을 찾고 있다”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벽에 쓰인 글귀를 읽고 학생들의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려온다”고 말했다.
벽 제작 논의는 올해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사들이 새 학기 수업 방안을 논의하다 민주열사들을 조명해보자는 데 의견을 모았고, 5·18민주화운동 43주년을 앞두고 학생들이 민주열사 선배들을 조명하는 기념물 제작을 제안하면서 본격화됐다.
지난 7월 역사와 미술을 융합한 수업 중 하나로 학생들은 민주 열사와 관련한 그림을 그리고 기념물에 들어갈 문구를 구상했다. 당초 기념물은 ‘민주의 벽’이란 이름으로 교내에 마련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학생들과 논의를 거치며 이름을 바꿨다. ‘더 많은 시민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에 따라 버스정류장이 인근에 있는 현재 위치로 정했다. 광주 동구와 윤상원 기념사업회도 후원에 나섰다.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취업준비생 김상현씨(27)는 “미처 몰랐던 민주열사들을 새롭게 알게 됐다”며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학생들의 그림을 보며 지난 현대사의 아픔을 되짚어보는 계기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전남여고 2학년 최모양(17)은 “많은 분들이 민주열사들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유족들이 눈물까지 흘릴 줄은 몰랐다”며 “우리의 작은 관심과 노력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는지를 깨닫고 배우는 시간이 됐다”고 말했다. 기억이음 벽에 부착되지 않은 학생들의 작품은 전남여고 내 갤러리 ‘예담 1929’에서 만나볼 수 있다.
전남여고는 기억이음 벽을 계속 가꿔 발전시켜 나갈 구상이다. 내년에는 더 많은 학생들의 작품을 담장에 넣기 위해 규모를 확대할 계획이다. 정인웅 교감은 “더 많은 시민들이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그들의 정신을 기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고귀한 기자 g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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