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그저 숏컷일 뿐인데 황송한 ‘페미’ 대접
어릴 적에 엄마는 항상 양 갈래로 머리를 땋아주셨다. 변화는 초등학교 입학 후에 일어났다. 자기 이야기가 지면에 실린 것을 알면 펄쩍 뛰겠지만, 두 살 터울인 오빠는 어릴 적 심한 밥투정꾼이었다. 엄마가 옆에서 일일이 “숟가락 들어, 입에 넣어, 씹어, 삼켜” 잔소리를 해야 겨우 밥을 먹었다. 결국 엄마가 먹여주다시피 해서 학교에 보내고는 했는데, 이제 아이 둘을 한꺼번에 등교시키려니 양 갈래 머리를 땋는 것은 엄마에게 너무나 큰 도전이 되었다. 그리하여 첫 방학과 함께 나의 ‘숏컷’ 인생이 시작되었다. 인류 역사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운 ‘초등학교 1학년 페미’의 탄생 설화다.
오랫동안 숏컷으로 살아왔지만, 그 때문에 황송하게도 ‘페미’ 대접을 받고, 또 그 때문에 위협을 느낀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20대 남성이 편의점에서 일하던 여성노동자에게 “머리가 짧은 걸 보니 페미”라면서 무차별 폭행을 저지른 사건 말이다. 내가 표적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반사적으로 일었다.
이 비슷한 두려움을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때에도 느꼈다. 그즈음 업무 때문에 만났던 여자 후배와의 대화가 기억난다. 우리 둘 다 평소에 ‘여성’을 자신의 대표 정체성으로 내세운 적이 없었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덕분에 사회의 다른 부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성차별을 덜 경험한 편이었다. 하지만 강남역 사건은 나에게 ‘그래봤자 여성’이라는 자각을 던져주었다. 후배도 나와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고 이야기했다. 여성이라서 부끄럽다는 말이 아니다. 재능, 개성, 인격, 계급과 살아온 삶의 궤적, 그리고 인간 존재로서의 장점과 단점. 이 모든 것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뭉뚱그려 그저 여성으로 범주화하는 것 자체가 여성에 대한 모욕이라고 느꼈다.
이번 사건도 그렇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성실한 청년이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3개나 거머쥔 운동선수든, ‘머리 짧은 여자’라는 범주화는 개인이 가진 모든 미덕과 다양성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페미니즘이라는 거대 악(惡) 앞에서 다른 특징은 모두 지워지며, 심지어 그들이 실제 페미니스트인지 여부조차 중요하지 않다. 대체 페미니즘이 얼마나 극악한 사상이길래!
페미니즘은 성별에 기반한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지적 노력이자 정치 운동으로 정의된다. 스탠퍼드대학의 온라인 철학백과사전에 페미니즘(feminism)을 검색하면 분석적 페미니즘, 실천주의 페미니즘, 페미니스트 역사학 등 200개가 넘는 주제 문서가 표출될 만큼 페미니즘은 학술적·실천적으로 깊이 있고 복잡한 사상이다. ‘머리 짧으면 페미’ ‘페미는 사회악’ 같은 저급한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고, 찬성·반대를 논할 대상도 아니다.
그런데도 상황이 여기까지 흘러온 것은, 그래도 되기 때문이었다. 온라인 공간의 인셀(incel) 공동체는 자유롭게 거짓과 혐오의 담론을 확산시켰고, 미디어는 이를 비판 없이 소개하며 마치 페미니즘과 대등한 사회적·학술적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포퓰리스트 정치는 안티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인셀 공동체의 자기효능감을 북돋았다. 그렇게 몇년이 흐르고 나니, 페미니스트라고 자부하기에는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마저도 짧은 머리 때문에 범죄 피해를 심히 우려하는 지경이 되었다.
이번에도 피의자의 음주, 조현병 병력을 거론하며 혐오범죄가 아니라는 설명에 바쁘다. 그렇다면 오히려 더 큰 문제다. 만취자의 주사(酒邪), 조현병 환자의 망상에 등장할 만큼 여성혐오와 안티페미니즘이 상식이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현실 부정은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그사이 공중화장실, 엘리베이터, 지하철, 길거리, 기차역, 편의점…. 여성들에게 위험한 공간의 목록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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