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 때려 죽여라”…바람난 남편이 전처와 자식 잔혹하게 고문한 이유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3. 11. 12.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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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탄 표트르 초상화.
[사색-47] “아드님이 사망했습니다.”

차디찬 감옥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건 다름 아닌 아들의 시신이었습니다. 수많은 매질과 주먹질로 몸은 만신창이. 세상이 무너질만한 장면이었지만 아버지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낯에서는 오히려 후련하다는 기분도 읽힙니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지요. 부모보다 먼저 자식이 세상을 떠날 때, 참척이라 표현합니다. 참혹할 참, 슬플 척.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만큼은 예외였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주도한 이가 아버지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아들은 귀한 자식이라기보다는 원수나 다름 없는 듯 보였습니다.

“녀석의 어미, 그 여자도 수도원으로 쫓아버리게.”

비정한 아버지는 이제 냉혈한 남편이 되고자 마음먹습니다. 죽은 자식의 친모이자 자신의 전 부인에게도 추방 명령을 내립니다. 그녀 역시 잔혹한 고문을 받은 직후였습니다. 가정을 부수려 작정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세계사 역사상 이름 난 폭군이냐고요. 아닙니다. 러시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명군,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의 이야기입니다.

유럽의 변방이던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끌어올린 군주이자 동시에 자신의 가정을 산산조각 낸 냉혹한 가장. 표트르 대제의 양면을 소개합니다. 이율배반의 사잇길을 천천히 걸어갑니다.

18세기 프랑스 화가 장 마크 나티에가 그린 표트르 1세 초상화.
태생부터 정치 소용돌이에 휘말린 표트르
“이름뿐인 왕.”

비정한 아버지의 가정사부터 돌아봅니다. 표트르는 1672년 러시아 왕손으로 태어났지만, 기반은 미약했습니다. 그가 두 번째 황후에게서 태어난 아들이어서입니다. 러시아의 왕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는 이미 첫 황후와의 사이에서 왕세자를 둘이나 낳은 상황. 러시아 왕좌를 두고 치열한 정치 게임이 벌어질 공산이 커진 셈이었지요.

“제가 왕이 맞긴 한 건가요?” 1670년대 표트르 대제 어린 시절 초상화.
표트르의 아버지인 러시아의 왕 알렉세이가 승하합니다. 왕좌엔 표트르의 이복형(표트르 3세)이 앉았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이내 세상을 떠납니다. 정치 싸움에 다시 불이 붙습니다.

두 세력의 대립이었습니다. 첫 황후의 소생인 소피아와 이반 남매와 두 번째 부인의 아들 표트르가 주축이었지요. 신하들은 계파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합니다. 먼저 주도권을 잡은 건 소피아였습니다. 그녀가 러시아의 궁수·사격수 부대인 스트렐치를 이끌고 정권 장악에 성공하면서입니다. 곡절 끝에 합의안이 마련되지요. 이반과 표트르의 공동 즉위, 그리고 소피아의 섭정. 사실상 소피아의 시대가 열린 셈이었습니다.

표트르와 이반의 공동통치를 나타내는 동전. 뒷면에는 실세 소피아가 새겨져 있었다. 당시 정치 상황이 정확히 반영된 동전인 셈.
변방에서 배운 ‘강대국의 조건’
“표트르, 너는 나의 말만 잘 따르거라.”

왕이라는 이름은 허울뿐이었습니다. 모든 결정은 이복 누나 소피아에 의해 이뤄지고 있었지요. 때로는 생명의 위협도 있었습니다. 어머니인 나탈리아는 표트르와 함께 여름별장으로 자주 떠났습니다. 사실상의 피난. 정치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지요.

세상의 중심에서 한 발짝 멀어졌을 때, 비로소 얻는 것들이 있습니다. 표트르 역시 어머니와 여름 별장에서 ‘부국’의 길을 습득합니다. 이곳에 자리 잡은 유럽인들에게서 서구식 군대 전술, 항해술, 조선술, 포술을 배우면서였습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볼 수 없던 것들이었지요. 유럽은 점점 강해지는데, 점점 뒤처져 가는 러시아의 현실을 보면서 그는 생각합니다. “유럽을 배워야 한다. 정치도, 문화도, 우리의 생각까지도.”

네덜란드 선원들에게 기술을 배우는 표트르 대제를 묘사한 그림
1689년, 그가 17세가 되던 해였습니다. 사내의 향기가 표트르에게 묻어납니다. 내면은 통찰과 결기로 가득 찼지요. 군주로 보기에 손색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소피아의 손아귀에서 러시아를 해방하고, 유럽식 강국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그는 생각합니다.

표트르가 ‘친정’을 선언했을 때 많은 귀족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소피아의 자의적 통치에 대한 반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손쉽게 표트르의 시대가 막을 올렸습니다.

네덜란드 목수의 도움을 받아서 표트르 1세가 직접 만든 배. 그는 유럽 문명의 힘을 깨닫기 시작했다. [저작권자 = Ninara]
유럽을 배워라...수염 한올까지도
“러시아식 수염을 깎고 유럽인처럼 콧수염을 기르게.”

표트르의 핵심 정책은 ‘원대한 변화’였습니다. 정치·행정·군사를 유럽식으로 바꾸는 것은 물론, 의식주 역시 유럽식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여겼지요. 1697년 조선업자로 분장해 직접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그들의 선진 문물을 몸소 체험한 뒤였습니다. (Grand Embassy of Peter the Great). 전통문화를 고집해서는 새로운 사유와 생각이 깃들기 힘들다는 판단이었지요.

수염세 납세 증표 동전. 1705년.
정통 보수 계층에서 극렬한 반발이 있었지만, 그는 나름의 카리스마로 일을 진행했습니다. 1698년 9월에는 러시아식 긴 수염과 러시아 전통 의복을 입는 사람에게 세금을 부과하기도 했었지요. 그야말로 파죽지세의 정치행보.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새로운 국가는 새 수도를 요구합니다. 표트르 역시 같은 생각이었지요. 그는 전통이 깃든 모스크바에서 개혁은 힘들다고 여겼습니다. 그가 새로 점찍은 도시가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였지요. 이 도시는 이탈리아와 독일 건축가가 디자인합니다. 그만큼 러시아에서 가장 유럽스러운 도시였지요. 러시아의 도시 명칭에 독일식 어미인 -부르크가 붙은 이유 역시 그가 얼마나 유럽을 선망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을 고안 중인 표트르 1세.
거칠게 밀어붙인 정책들이었지만 성과는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제조업이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광업과 목재 산업도 점점 효율성을 더해가면서 러시아의 경제도 튼튼해지고 있었습니다.
표트르 1세로부터 시작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 [저작권자 = Florstein (WikiPhotoSpace)]
나라는 부강해지는데...표트르의 가정은 정반대로
정치는 순항했지만, 가정은 삐걱거렸습니다. “아내와 아이 빼고 다 바꿔라”라는 게 개혁이라지만, 표트르는 아내와 아이까지 바꾸고 싶어했지요. 시작부터 정략결혼이었던 데다가, 아내 에우독시아가 지나치게 보수적인 게 문제였습니다. 유럽 지향적이던 표트르에게 러시아 전통을 고수하는 에우독시아가 곱게 보였을 리가 없었지요.

표트르가 그토록 바꾸고 싶어한 전통 러시아의 모든 걸 에우독시아가 지니고 있었습니다. 표트르는 처음부터 정부를 들였고, 에우독시아의 불만은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다른 여자와 대놓고 잠자리를 가지는 남편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테지요.

“이 결혼 정말 맞는 건가요?” 표트르와 에우독시아 결혼 장면을 묘사한 그림. 두 사람은 러시아 전통에 따라 정략 결혼했지만, 이는 끔찍한 결과로 이어졌다.
“너의 아버지는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사람이란다.”

에우독시아의 복수는 자녀 교육을 통해 이뤄집니다. 황태자 알렉세이가 아버지 표트르를 증오하게 만드는 것이었지요. 러시아 정교회의 전통 교육을 받도록 고수하면서 표트르의 사고방식과는 정반대로 키워내고자 했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 방법이었지요. 1698년 표트르가 공식적으로 에우독시아와 이혼을 선언합니다. 알렉세이의 나이 고작 8살이었을 때였지요. 황태자는 표트르를 싫어하는 걸 넘어 혐오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표트르 1세의 아들 알렉세이. 그는 아버지 표트르를 끔찍하게 혐오했다.
해양세력으로 거듭나기 위한 ‘대륙 국가’ 러시아
“가자, 가자, 바다로 가자!”

가정에서 불화가 싹이 트는 걸 모른 채, 표트르는 개혁에 더욱 집중합니다. 항구를 손에 넣기 위한 군사 프로젝트를 구상하기 시작했지요. 대륙의 복판에 자리 잡은 지리적 요건이 조국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16세기부터 세계사는 바다를 중심으로 흘러갔지요. 표트르는 항구를 손에 넣기로 마음먹습니다. 항구는 세계로 향하는 관문이자, 유럽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창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바다는 발트해와 흑해. 두 거인이 입구를 딱 가로 막고 있었습니다. 발트해를 지배하던 스웨덴 제국과, 흑해의 강자 오스만 제국이었습니다. 이제 막 역량이 올라오던 러시아가 비벼볼 만한 상대가 아니었지요.

러시아의 표트르 1세가 1704년 나르바를 점령한 후 약탈하는 군인들을 막는 모습. 러시아 화가 니콜라이 사우어바이드가 1859년 그린 그림.
“스웨덴을 넘어야, 러시아가 선다.”

표트르는 도전하는 군주였습니다. 스웨덴에게 본격적으로 도전장을 내밀었지요. 대북방전쟁의 서막이었습니다. 스웨덴 제국에게 앙심이 있던 여러 국가가 러시아에 힘을 보탰습니다. 작은 규모의 세계대전이나 다름없었지요.

교회의 종을 녹이고, 고율의 세율을 걷었습니다. 총과 대포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세계 최강 수준의 스웨덴 제국 군대와 정면 승부는 피하고 보급로를 끊는 전략도 빛을 발했지요. 20년의 전쟁에서 미소 짓는 건 러시아와 표트르 였습니다. 전쟁이 막을 내린 1721년 뉘스타드 조약이 체결됩니다. 스웨덴령의 땅 일부를 러시아에 넘긴다는 내용이었지요.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표트르 1세.
이제 러시아는 발트해를 통해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표트르의 이름 뒤에는 대제(The Great)가 붙게 됐지요.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 여름궁전 중심부에는 수사자를 죽이는 삼손 조각상이 자리합니다. 스웨덴의 국장이 수사자이기 때문입니다.
1717년 프랑스 베르사유를 방문한 표트르. 유럽에서 높아진 그의 위상을 보여준다.
전쟁에서의 승리...그러나 가족은 풍비박산이 났다
전쟁이 마냥 아름다운 기억으로만 남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이 뒤따랐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황태자 알렉세이의 죽음. 그는 전장에서 영예롭게 싸우다 죽은 것이 아니었지요. 아버지 표트르의 명령으로 옥에 갇혀 고문받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북방전쟁에서 표트르는 알렉세이에게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황태자는 늘 기대에 못 미쳤지요. 어쩌면 의도된 것일 수도 있었겠습니다. 어머니를 소박 놓은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했으니까요.

황태자 알렉세이의 아내 샬롯. 그는 아이를 출산하다가 사망했다.
두 사람의 사이가 더 틀어진 건 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알렉세이가 아들(훗날 표트르 2세)을 출산한 날이었습니다. 아내 샬롯이 난산 끝에 사망한 것이었지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찾아온 날, 가장 소중한 이가 떠나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그때 표트르 대제로부터 편지가 도착하지요. “국가의 일에 더욱 관심을 갖길 바란다.” 알렉세이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아들 알렉세이(왼쪽)를 꾸짖는 표트르 1세. 니콜라이 게가 1871년 그린 그림이다. 러시아 역사에서 유명한 일화.
두 사람의 사이가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모반 소문까지 번지기 시작합니다. 알렉세이는 표트르에게 벗어나기 위해 외국에 머물고 있었지요. 표트르는 즉각 귀환을 요구합니다. 알렉세이가 마지 못해 돌아오자 법원에 넘겨버렸습니다. 감옥에서 그를 맞이한 건 끔찍한 구타. 그는 더 이상 황태자가 아닌 반역자에 불과했습니다. 표트르의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형은 집행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미 사망해버렸기 때문입니다. 1718년 6월의 일이었습니다. 그의 친모인 에우독시아 역시 수녀원으로 강제 감금을 당해야만 했었지요. ‘러시아판 사도세자’의 비극이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 아들 살려내.” 알렉세이의 친모 에우독시아.
표트르의 죽음, 분열에 빠진 러시아
러시아를 제국으로 일군 대왕의 삶도 시나브로 빛이 희미해지고 있었습니다. 1725년 1월 그가 쓰러집니다. 요독증이었습니다. 과로에 과음까지 겹친 탓이었지요. 한 달 뒤 그는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52세라는 짧은 나이. 아들이 세상을 떠나고 불과 5년이 되지 않았을 때였지요.

표트르의 죽음은 반(反)개혁을 불렀습니다. 그의 손자인 표트르 2세가 황제 자리에 오른 뒤였습니다. 손자인 표트르 2세의 아버지는 알렉세이. 표트르 대제가 잔혹하게 감옥에서 죽게 만든 바로 그 사람. 표트르 2세가 보수적인 정책으로 간 배경에는 아버지를 죽게 한 할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러시아의 역사는 다시금 일대 혼란으로 접어들지요.

임종 직전의 표트르 1세. 이반 니키티치 니키틴 1725년 작품.
러시아가 표트르의 지도 아래 대국으로 성장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신분 고하에 상관없이 능력 중심 인재 정책을 펼친 것도 표트르의 공이었지요. 러시아인들이 제2의 빵이라고 여기는 감자와 커피, 담배는 모두 표트르 대제가 서구를 여행하면서 들여온 물건들입니다.

러시아 정교회가 지배하는 종교국가에서 세속주의 국가로 거듭나게끔 주도한 것도 표트르였습니다. 소련의 사회주의 독재자 스탈린이 그의 리더십을 극찬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공산주의자가 전 근대 왕조 국가의 인물을 높게 평가하는 건 무척이나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만큼이나 표트르가 러시아에 기여한 공이 크다는 것이었겠지요.

표트르 대제와 그의 시종 소년의 초상화. 그가 얼마나 편견없이 인재를 대했는지를 보여주는 그림.
위대한 군주의 두 얼굴에 역사가 있다
러시아를 부유하게 만든 그였지만, 가정을 파탄 낸 것 역시 표트르였습니다. 러시아의 가장 존경받는 위대한 군주이자, 최악의 아버지이자 뻔뻔한 남편의 전형. 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아내를 학대하고 아들을 죽음에 빠뜨리게한 모순적 인물인 셈이지요.

가화만사성이라지만, 역사에서는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음을 자주 봅니다. 역사는 때로 가정의 피 땀 눈물을 먹으며 진보하는 것일까요. 표트르와 그 가족의 삶을 보며 든 생각이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표트르 기마상. [저작권자 = Lite]
<네줄 요약>

ㅇ후진국 러시아를 제국으로 키운 건 표트르 대제였다.

ㅇ그는 러시아의 모든 걸 유럽식으로 바꿔 부국강병을 이뤄냈다.

ㅇ러시아 전통을 고수한 아내와 이혼하고, 아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ㅇ국가 차원에서 성군이지만, 가정에선 최악의 가장이었던 셈이다. 가화만사성은 표트르에겐 예외다.

<참고 문헌>

ㅇ린지 휴스, 표트르 대제-그의 삶·시대· 유산, 모노그래프,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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