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없어도 가을날 서정으로 물든 선운사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사계절 아름다운 고창 선운사에 만추 고즈넉함 가득/절벽 만월대에 새긴 도솔암 마애불 장엄/건강 기원하는 고창읍성 성벽 밟아볼까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바람 불어 설운 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그 꽃 말이에요∼♩♬”
차가운 겨울을 지나 2∼3월쯤 꽃을 만개하고 본격적인 봄이 오기 전 송이째 툭툭 떨어지고 마는 동백꽃. 그래. 송창식 노래 선운사를 가만히 귀 기울여 듣다 보니 커다란 눈동자를 지닌 여인 눈에서 툭툭 떨어지는 굵은 눈물방울을 닮은 것도 같다. 어떻게 이런 가사를 생각해냈을까. 대단한 감수성이다. 가슴으로 파고드는 노래만큼 가을날 서정으로 물든 선운사로 걸어 들어간다.
◆동백꽃 없어도 가을 낭만 가득한 선운사
노래 때문일까. 우리나라에 많은 사찰이 있지만 전북 고창군 선운사는 뭔가 좀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헤어질 결심을 하고도 눈물처럼 떨어지는 꽃송이가 하도 슬퍼서 마음을 돌릴 정도라니 말이다. 선운사 노래는 민요 아리랑과 김소월 시 진달래꽃의 중간쯤 어디에 있는 듯하다. 아리랑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며 떠나는 이에게 ‘원망’을 퍼붓는다. 반면 진달래꽃은 말 없이 고이 보내 드리고 가는 길에 꽃까지 뿌리겠다니 요즘 말로 아주 ‘쿨’하다. 선운사 노래는 원망도 없고 사랑을 구걸하며 매달리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보내 줄 생각도 없는 듯하다. 동백꽃으로 떠나려는 님의 감수성을 자극하면 사랑을 되찾을 수 있다는 서정적 믿음이 있을 뿐.
아치형 돌다리 극락교를 지나 선운사 현판이 걸린 천왕문을 통과하면 서정으로 물든 선운사에 들어선다. 만세루를 지나면 등장하는 대웅보전 뒷산을 가득 채운 초록 잎들이 모두 동백나무. 수령 500년, 평균 높이 6m 동백나무 2000그루가 군락을 이루며 4㎞에 걸쳐 있으니 꽃 병풍을 만들고도 남겠다. 선운사 동백은 다른 곳보다 더 늦게 보통 3월 말∼4월 말 꽃을 피운다. 동백나무숲 조성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산불로부터 사찰을 지키기 위해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동백꽃은 아직 없지만 산은 단풍으로 물들고 만세루 옆 커다란 감나무엔 먹음직스러운 감이 주렁주렁 달려 가을 낭만을 선사한다.
사계절 아름다운 곳이다. 동백꽃이 후드득 떨어지고 나면 화려한 연분홍 벚꽃이 만발하고 여름엔 시원한 계곡이 더위를 식힌다. 초가을엔 잎과 꽃이 만나지 않아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지닌 붉은 석산(꽃무릇)이 꽃말과 전혀 다르게 화사하게 펼쳐진다. 동백나무에 흰꽃이 피는 겨울 설경은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선운산은 336m로 높지 않지만 아기자기한 암릉과 울창한 수림, 계곡이 있어 부담 없이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절벽에 새긴 걸작 도솔암 마애불
계곡을 거슬러 도솔암으로 향한다. 선운사에서 도솔암까지는 약 3.2㎞로 걸어서 1시간 정도 걸린다. 쾌청한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울창한 숲길을 1㎞가량 걷다 보면 참당사를 만난다. 신라 진흥왕 때 의운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불상, 경전, 보인 등 문화재는 대부분 분실됐고 일부는 일제에 약탈당했다. 계곡을 더 오르면 도솔암 직전 진흥굴이 등장한다. 신라 진흥왕이 이곳에서 수도했다는 얘기가 전해져 그의 호를 따 좌변굴로도 불린다. 진흥왕은 왕위를 버리고 중생 구제를 위해 도솔왕비, 중애공주와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진흥굴 바로 앞에는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소나무가 서 있다. 키 20m가 넘는 소나무는 장사송. 선운사 입구 소나무숲, 동백나무숲과 함께 선운사를 대표하는 천연기념물이다. 수령 600년으로 이곳 옛 지명이 장사현이라 이런 이름을 얻었다. 진흥왕이 수도했기에 진흥송으로도 불린다.
울창한 소나무숲과 대나무숲이 둘러싼 도솔암으로 들어서자 극락보전 뒤로 높이 솟은 암벽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수광전을 지나 나한전에서 길이 갈린다. 오른쪽은 도솔암 내원궁으로 가는 길로 선운사 지장보살좌상이 안치돼 있으며 상도솔암으로 불린다. 왼쪽으로 접어들면 입이 쩍 벌어지는 풍경이 펼쳐진다. 바로 깎아지른 수직절벽 만월대에 조각한 미륵장륙마애불이다. 도솔암 마애불로도 불리며 보물로 지정돼 있다. 신체 높이가 약 15.7m, 무릎 너비는 약 8.5m이며 연꽃무늬를 새긴 받침돌에 앉은 모습이다. 마애불의 양식으로 미뤄 고려시대 만든 것으로 추정되지만, 백제 위덕왕 때 검단선사가 새겼다는 얘기도 있다.
자세히 보면 마애불 머리 위에는 네모난 구멍들이 뚫려 있고 한곳엔 목재도 박혀 있는데 거대한 공중누각을 만들어 가리는 방법으로 마애불을 보호하려 했던 흔적이다. 왜 마애불이 드러나는 것을 감추려 했을까. 아주 흥미로운 얘기가 전해진다. 가슴에 네모난 복장이 보이는데 불상을 만들 때 금·은·칠보·서책 등을 넣는 공간이다. 복장에 보관된 비기가 알려지는 날 조선은 망한다는 얘기가 전해지던 18세기 말 전라감사 이서구가 복장을 열어 비기를 보려다 천둥소리와 함께 벼락이 떨어져 깜짝 놀라 도로 넣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100여년 뒤 동학농민혁명이 움트던 1892년 동학 접주 손화중이 그 기록을 무사히 꺼내 가져갔다고 한다. 새 세상을 열고자 하는 농민들의 염원이 담긴 전설로 짐작된다. 선운사를 구성하는 유문암 절벽의 불상은 주위를 깊이 파고 머리 부분에서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차 두텁게 새겼다. 암석이 물리적, 화학적 풍화작용을 받아 파인 타포니 형태와 점성, 강화 윤무암에서 볼 수 있는 마그마 자국인 유상구조도 관찰할 수 있다.
고창읍내에도 가을에 걷기 좋은 길이 있다. 바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으로 꼽힌 고창읍성 성곽길이다. 성곽 입구에서 머리에 돌을 얹은 아낙네들 조형물이 여행자를 반긴다. 고창읍성은 돌을 머리에 이고 성곽을 밟으면 병이 없이 오래 살고 저승길엔 극락문에 당도한다는 전설 때문에 매년 답성 행사가 열린다. 성밟기는 저승문이 열리는 윤달에 밟아야 효험이 있으며 같은 윤달이라도 3월 윤달이 가장 효과가 뛰어나다고 한다.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 돌면 극락 승천한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특히 반드시 손바닥만 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세 번 돌아야 하고 일정한 지역에 그 돌을 쌓아 두도록 했는데, 겨우내 부푼 성을 밟아 단단하게 만들려는 취지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성을 더욱 단단하게 다지려 돌을 머리에 얹어 체중을 불렸는데 돌은 유사시에 무기로도 사용됐다.
입구 홍화문을 지나자 ‘감옥’ 건물 앞에서 유치원 꼬마들이 너도나도 서로 매를 맞겠다고 투닥거린다. 곤장 체험을 하는 곳인데 아이들은 마냥 재미있기만 한 듯 웃음꽃이 떠나질 않는다. 성벽을 따라 걷는다. 푸른 하늘 아래 구불구불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이어지는 성벽과 울창한 소나무 숲이 어우러지는 풍경이 고즈넉하다. 걷다 보면 바람이 “사각사각” 연주하는 울창한 대나무숲도 만난다.
고창=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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